오랜만에 친구와 등산을 했다.
친구도 나도 예전엔 꿈도 꾸지 못했던, 평일에 주어진 한가로운 시간에 무척이나 뿌듯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서...
무릎이 안 좋아서 등산은 안된다는 친구에게 등산을 하면 무릎 주변의 근육이 단련돼서 오히려 통증이 없어지고 체중부하를 받는 등산만큼 골다공증 예방에 좋은 게 없다고 입이 아프게 설득한 결과였다.
무리하지 말고 가볍게 오르기로 하고 가장 짧은 코스를 택했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 보니 금세 낮은 봉우리의 정상에 올랐다. 사진을 찍기 위해 전망이 좋은 자리를 찾으니 앞에 온 사람들이 먼저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갑자기 친구는 눈살을 찌푸리며 "도대체 여기까지 와서 무슨 짓인 거야!"하고 혼잣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툴툴거렸다. 난 무슨 일인가 하고 두리번거렸지만 친구가 뭘 말하는지 눈치채지 못했고 친구는 다시 말했다.
"아주 신이 났구먼, 신이 났어. 제 세상이야!"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는 내가 답답했는지 친구가 인상을 쓰며 턱 끝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세 명의 여자들이 깔깔대며 포즈를 취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여전히 난 무엇이 친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건지 몰랐고 웃고 떠들며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자리를 뜨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들이 너무 시끄럽다고 친구가 저러나?'
우리는 함께 셀카를 찍기도 하고 다른 등산객에게 부탁해서 벼랑 건너편의 멋진 산 봉우리들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포즈를 취했다.
산을 내려가면서 친구는 다시 아까 보았던 여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까 봤지? 개념이 없어, 정말. 남편이 그러더라고, 여자들 산에 제발 레깅스 좀 안 입고 오면 좋겠다고."
그때서야 난 친구가 말하는 의도를 이해했다. 그 여자들은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입고 있는 차림새와 다르게 몸에 꼭 붙는 스판 라운드 티셔츠와 레깅스 차림이었다.
정상까지 오르느라 더워서 벗어버린 점퍼를 바위에 올려놓고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참 건강미 넘치는구나. 운동 꽤나 한 듯 탄탄하고 볼륨 있는 몸이네...'라는 생각이 잠깐 스치듯 지나갔던 기억도 났다.
계속 씩씩대는 친구에게 난 말했다, "에이 뭘, 그냥 내버려 둬~"
친구는 다시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너무 심한 거 아냐?"라고 말했고, "하긴, 앞에서 올라가고 있으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좀 민망할 수도 있긴 하겠다..."라는 나의 말을 듣고서야 목소리의 톤이 낮아졌다.
"그렇지? 얼마나 민망하겠어? 그런 옷을 입고 산에 온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
친구의 말에 반박하기 위한 말들이 속에서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모처럼 나온 산행을 언쟁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난 화재를 돌리기 위해 2년 전쯤 같은 산에서 보았던 어느 노부부 등산객의 옷차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30년 만에 홈커밍 행사 때 만난 담임 선생님의 건강관리 비결이 등산임을 알게 된 같은 반 동창생들은 하나같이 등산을 해야겠다고 선언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고 나도 말뿐인 계획과 핑곗거리만 가득했다.
그러다 어느 날, 동창회 이후 혼자서 꾸준히 주말 등산을 하고 있는 유일한 친구를 따라 큰맘 먹고 산에 올랐다.
산의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에, 사이좋게 손을 꼭 잡고 저만치 아래에서 하산하고 있는 희한한 옷차림을 한 커플을 보게 되었다.
눈에 확 띄는 요란한 색깔의 옷과 모자, 백팩을 똑같이 착용한 그 모습은 그냥 화려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장무도회가 아니면 서커스 공연 무대에 서야 할 것 같은 차림새였다.
온갖 색깔의 꽃무늬가 화려한 점프슈트와 모자에 달린 프로팰러 장식까지 아무리 봐도 등산객의 차림새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큭큭 웃는 나에게 친구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자주 마주치는 그 커플은 70대 노부부이며 매번 특이한 옷차림으로 온다는 것이다. 어쩌면 위험에 처했을 때 남의 눈에 쉽게 띄기 위해 요란한 복장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해도 심하게 독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이후 몇 주 지나서 같은 시간대에 그 친구와 같은 등산로를 올라가면서 또 그 노부부를 만났다. 이번에는 한 쌍의 공룡이 되어 있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선명한 초록과 노란색이 어우러진 복장에는 공룡의 등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삼각형의 스파이크들이 등 한가운데 늘어서 있고 꼬리가 길게 늘어뜨려져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두 손을 꼭 잡고 산에 오르는 요란한 복장의 노부부에게서 남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자신들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여유를 느꼈다. 뭔가 깊은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분명 그 장면은 내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공룡 의상의 노부부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건네며 멋진 의상이라고 말해줄걸...'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다음에 혹시라도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꼭 말을 걸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레깅스 입은 여성들 때문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친구는 다시는 산에 가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가까이 살기에 몇 번 함께 가자고 얘기했으나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혼자서 산에 열심히 다니던 동창은 이제 골프에 재미를 붙여서 등산은 당분간 안 하겠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에게 그리고 모임에서도 등산을 제안해 보았지만, 꽃구경은 좋은데 등산은 질색이라는 대답이 대다수였다.
결국, 처음으로 혼자서 산에 오른 나는 혼자 노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 맞추느라 아침에 허둥댈 필요도 없고 굳이 불필요한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내 속도에 맞추어 걷고 사색에 방해받지도 않았다.
등산이 무릎 건강에 해롭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정말 많다. 안 하던 운동도 처음 시작할 때는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는 법. 그렇다고 포기해 버리면 건강한 몸은 저절로 얻어지나?
등산하기에 딱 좋은 가을.
옷이야 아무렴 어떤가, 움직이기 편하면 됐지.
쌀쌀한 날씨에 따뜻하고 가벼운 옷이면 그만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무 때나 훌쩍 오르는 나 홀로 산행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 쌍의 트리케라톱스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알록달록한 커플룩을 차려입은 노부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지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