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어쨌든 눈앞에 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으라는 뜻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고 아버지는 쇠약해져 갔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으나 때깔 고운 죽음은 결코 아니었다.
먹은 것을 토했다는 이유로 금식 처방이 내려지고 콧줄이 끼워진 채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입으로 삼키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치매의 증세가 심해지고 혈당 관리가 전혀 안되어 우여곡절 끝에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된 아버지가 병원생활 14개월 만에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그 흔한 열도 없고 아무런 증상이 없었던 아버지가 며칠 후 갑자기 구토를 했고 자리에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숨이 차다고 했으며 3일 동안 수액과 영양제, 항생제와 산소를 투여받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많은 고통과 회한을 안겨주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후회되는 것이 마지막 두 달 동안 깨죽 말고 아무것도 못 드시게 한 병원에 항의도 못 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과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나를 보고 물을 달라고 했을 때 물 한 모금 안 드리고 물에 적신 거즈로 입술만 축여드린 일이다.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다른 환자들이 간식 먹고 있는 시간에 얼마나 드시고 싶었을까?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물도 주지 않는 딸이 얼마나 야속했을까?
아버지의 혈당이 인슐린 주사로도 조절이 되지 않고 고혈당과 저혈당을 오가며 널뛰기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난 다시 아버지의 그 문장이 떠올랐다.
먹고 죽은 놈이 때깔도 곱다고 했는데, 아버지의 유일한 낙(어쩌면 모든 환자들의 유일한 낙일수도 있는...)을 빼앗기겠구나...
내 예상대로 아버지는 일체의 간식을 금지당했다. 그렇다고 딱히 당뇨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식단을 제공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빤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요양병원의 당뇨식이라는 것은 일반식에서 밥에 보리쌀을 조금 섞고 단맛이 강한 요구르트를 주지 않는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아버지는 밥을 거부하고 물같이 줄줄 흐르는 깨죽 한 그릇을 삼시세끼 드시길 몇 달째였다.
아버지의 남은 삶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70대 중반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중 젊은 축에 속했다.
그러나 약으로 잘 조절되고 있는 듯했던 혈당이 말을 안 듣는다고 했을 때 나는 고장날대로 고장 나버린 내부 기관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남은 시간 동안 드시고 싶은 것 다 드시고 그 순간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나의 그런 바람을 함께 일하면서 친해진 간호사와 조무사에게 얘기했으나 모두 수간호사의 눈치를 보느라 말도 못 꺼낸 듯했다.
나는 더 이상 병원의 직원이 아니고 환자의 보호자이니 얼마든지 나의 요구를 말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갑이 아닌 을의 위치에 익숙해진 것인지 나 역시 수간호사에게 직접 말하지 못하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수간호사가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싸우고 싶지 않았고 혹시라도 심기를 불편하게 하여 아버지가 불익을 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길 각오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울 뿐, 현실은 내가 당장 일하고 있는 병원을 그만두고 아버지에게 달려갈 수도, 아버지를 퇴원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니 말을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당뇨병이 있으셨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였던 것 같다. 간호학과에서 당뇨병에 대해 공부하면서 식이관리의 중요성을 알게 되어 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하게 됐다.
미세혈관들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한 당뇨의 합병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에 나는 늘 신경이 쓰였다. 망막에 이상이 생겼을까 봐 안과 검진을 챙겼다. 발톱을 잘 못 깎아서 상처라도 생기면 잘 아물지 않는 상처로 발가락을 절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실제 사례로 보았기에 발톱 깎는 아버지를 보고도 잔소리를 했다.
대체로 나의 간섭에 대해서 아버지는 건성으로 "으응, 그래 알았다. 알았어."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끄덕, 표정은 듣기 싫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특히나 너무 단것을 드시지 말라거나 열량이 너무 높다거나 하면서 음식에 대해 말할 때마다 "옛말에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고 했다!"라며 내 말을 일축해 버리고는 드시고 싶은 대로 음식을 가리지 않고 드셨다. 마치 당뇨는 약만 잘 챙겨 먹으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의 혈당은 약으로 잘 조절이 되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치매가 시작되면서부터 혈당 조절약을 안 드시고 음식을 더욱 엉망으로 드신 것이다.
틀니를 사용했으나 잇몸이 불편하여 부드러운 것이나 죽 종류만 찾았고 탄수화물 위주의 배달 음식을 끼고 살았다.
나의 잔소리도 내가 가져가거나 요양보호사가 만들어 둔 음식도 소용없었다. 냉장고에서 밖으로 나와 보지도 못하고 상해서 버려지던 음식들을 치매가 더 진행되자 이번에는 한꺼번에 폭식했고 하루종일 먹을 것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중엔 냉장고 안에 또는 식탁 위에 있는 음식도 찾아 먹지 못하고 설탕물만 옆에 끼고 지냈다. 아메리카노를 즐겼던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 하루종일 설탕이 듬뿍 들어간 커피를 끊임없이 들이켰고 당뇨약을 비롯한 모든 약은 쌓여가기만 했다.
치매의 증상이 심해지는 것과 동시에 당뇨병도 심해지고 있었다. 소변 실수를 하는 아버지의 소변은 너무나 끈적거려서 방바닥에 흘린 소변을 밟으면 발이 바닥에 쩍쩍 들러붙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입원 중에도 혈당이 높았던 기간에는 간식 금지령이 내려졌고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먹을 것 없냐?"를 노래 부르셨다.
"아직 혈당이 너무 높대요. 정상으로 내려가면 간식 드실 수 있어요."라고 대답하면 아버지는 어린애처럼 물으셨다. "혈당? 언제 내려가는데?"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약 안 빼먹고 잘 드시면 곧 내려갈 거예요."
"응, 그래. 근데 뭐 먹을 것 좀 주면 안 되냐?"
"아이고, 아부지...... 혈당이 높아서 의사 선생님이 간식 먹지 말랬어요!"
그러면 아버지의 다음 문장이 어김없이 이어졌다. " 아따, 먹을 것 좀 주라니까 거 되게 그러네. 먹고 죽은 놈이 때깔도 곱다고!"
난 더 이상의 대꾸를 피하며 "이따가요, 얼른 다른 병실 한 바퀴 돌고 올게요."라고 말하고는 도망치듯 아버지의 병실을 나오곤 했었다.
요양병원의 전 병동을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간 후 한동안 외부로부터의 음식 반입과 면회가 일체 금지되었고 난 속이 타들어갔다. 어디 나뿐이었겠는가? 시설에 가족을 둔 대부분 사람들의 심정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몇 개월 만에 본 아버지의 얼굴은 글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모습이었다. 얼굴만이 아니라 온몸의 뼈가 앙상했다. 엄마의 돌아가시기 전 모습은 심부전과 신부전으로 인해 퉁퉁 부은 상태였다.
부어있거나 바짝 여위어 있거나 죽음을 바로 앞에 둔 몸을 바라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버지가 말한 '때깔 고운 얼굴'은 죽은 이에게서 아직 못 보았다. 먹고 죽는다고? 죽음에 가까워지면 먹는 기능도 배설 기능도 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건강하게 살다가 잠을 자다 갑자기 심정지가 와서 죽는다면 더 보기 좋은 모습일 것 같기는 하나 확률적으로 대부분은 그렇게 죽지 않는다.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론 또 얼마나 허망한 죽음인가 싶다. 남은 가족들은 얼마나 황망하고 안타깝겠는가...
적당히 아픈 기간이 있어서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들이 서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사랑한다 말하고 미움이나 원망을 덜어버릴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죽음이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언제 마음속 얘기를 꺼내놓아야 할지 모르기에 나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음식을 먹을 때, 넘치는 식욕으로 적당히 그만 두지를 못하고 과식을 하고 났을 때,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오늘도 나는 마음껏 좋아하는 음식을 드시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죄송한 마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밥을 먹었다.
이제는 그런 죄책감에서 벗어나 아버지를 향해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아빠, 먹고 죽는다고 때깔이 고운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건강을 오래 유지할 수가 있다니까요."
아마 아버지도 지금쯤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그래. 건강 잘 챙겨라. 아무거나 먹지 말고 건강에 도움 되는 음식을 먹어야 때깔이 고와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