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나면 가슴 치는 그 고릴라 있잖아요
제 여자친구요?
귀여워요 처음 만난 날에는 조잘거리는 입술만 쳐다보기 바빴어요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 저를 한 팔로 끌어안는 듬직함에 반했죠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과 행동으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끊이지 않아요
일 잘하고 똑부러지고 직장 선배들에게 사랑받는 게 제가 다 뿌듯해요
실행력이 대단해요 뭘 하기로 마음먹으면 하루도 안 지나서 이미 하고 있어요
저에 대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세심하게 신경 써줘요
제가 아무리 찌질이처럼 굴어도 손을 놓지 않고 함께 걸어가 줘요
돌려 말하지 않아요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기 때문에 미묘하게 어긋나는 일이 없어요
책임감이 강해요 방에 누워있기만 하던 저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와줬어요
그런데...
가끔씩 한밤 중에 허공을 바라보며 귀신 보이는 척을 해요
퇴근길에 가까운 사람과 통화 연결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길에 멈춰 서있어요
차가운 말투와 직설적인 화법으로 종종 상대에게 상처를 줘요
주변의 모든 환경과 소음에 예민하게 반응해요
밥을 먹다가도 무언가에 자극받으면 모든 행동을 멈추고 눈을 감아요
가끔 전화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요
거실에 누가 들어와 있다던가... 티비가 꺼져 있는데 소리가 난다던가... 누군가 자신을 감시한다던가...
통제성향이 강해요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요
별거 아닌 이유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춤추고 노래하다가
별거 아닌 한마디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돼서 방 안에 틀어박혀 눈물 흘려요
화가 나면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고릴라처럼 변해요
밖에 잘 나가지 않아 다리에 힘도 없고 추위에도 약한 나
저혈압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든 나
아직 고등학생 때 쓰던 고릴라가 달린 키플링 지갑을 쓰는 나
카카오톡 친구가 30명도 안 되는 나
인스타그램 계정도 없는 나
서울에서 자랐지만 홍대라는 곳에 가본 적도 없는 나
체크카드 한 장 없지만 사는데 아무 지장 없던 나
나 같은 찌질이에게 이런 (귀엽고 착하고 예쁜) 인싸 여자친구가 생기다니!
첫 데이트 날 당당하게 소파 자리에 먼저 앉고
고릴라 키링을 달랑거리며 현금으로 파스타 값을 계산하고
우연히 가게 된 영화관에서 상대에게 묻지도 않고 고소한 맛 팝콘을 사오고
<사바하>를 보며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떨고
산책하며 다리가 아프고 눈이 부셔했지만...
오직 외모가 그녀의 취향이라는 이유로 간택당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그날 자랑스럽게 흔들었던 고릴라 키링이 그 모든 것의 복선이었다는 것을...
내 여자친구는 (정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걷는 것을 미친 듯이 좋아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걸으며 데이트하곤 했다.
그리고 그녀가 걷기를 좋아하듯이 나는 햄버거를 좋아했다.
맥도널드, 버거킹, 맘스터치, KFC 종류를 바꿔가며 한 달도, 1년도, 10년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종류를 안 바꿔도 가능하다.)
2019년 4월의 어느 날
그날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맘스터치를 먹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여자친구는 퇴근 시간에 맞춰 내게 연락을 줬다.
나 역시도 준비 중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상 나의 준비는 별다른 문제없이 아주 물 흐르듯 순조로웠다.
지하철에 오르기까지는...
여자친구의 집까지는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다.
자리에 앉았고 가볍게 딴생각을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이 하는 그냥 그 정도의 평범한 생각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이따가 맘스터치에 가서 싸이버거를 먹을까?
아니면 나도 여자친구처럼 새로 나온 신메뉴를 먹어볼까?
신메뉴에는 계란프라이가 들어간다던데 그게 과연 맛있을까?
음료는 콜라를 먹을까? 아니면 사이다를 먹을까?
가만... 제로가 있던가? 아무래도 제로가 낫겠지?
다른 사이드는 뭘 먹을까? 김떡만? 치즈볼? 아니면 코울슬로? 여긴 비스킷이 없지?
근데 매콤 김떡만은 좀 매운데 갈릭 김떡만은 좀 심심해...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했다. 이건 진짜 분명 망했다.
그 순간 지하철 문이 열렸다.
그때 확신했다. 분명 가야 할 곳을 지나쳐왔다고.
가벼운 몸의 장점은 몸이 잽싸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의 홍수 속에 잠겨 허우적대다가 망쳐버린 것을 수습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내렸다.
그리고 열차는 그 다음역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나는 역을 지나쳐온 게 아니었다.
내가 그 수많은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지하철은 고작 한 정거장에 다다랐을 뿐이었다.
이미 핸드폰에는 화가 난 여자친구의 카톡이 쌓여있었다.
일단 전화를 걸었고 이 사실을 고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그녀는 이미 내가 출발했다고 한 시간에 있는 지하철을 다 검색해서
혼자 도착 예상시간을 계산하고 있었을 거였다.
여자친구는 매우 화가 났고 이제 더 이상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그동안 몇 가지의 상황을 계산한 그녀는 자신이 이곳으로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원래 먹으려던 신메뉴가 아닌 싸이버거를 먹겠다고 말하곤 끊어버렸다.
왜 갑자기 싸이버거를 먹겠다고 하는 거지? 단품일까 세트일까?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내가 마중을 가야 화가 좀 풀리려나?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근데 그냥 내가 다음 열차 기다렸다가 타고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일단 길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지금 햄버거가 대수인가? 화가 난 그녀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다.
난 차이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바보 같이 지하철을 잘못 내려서 화가 많이 난 것 같단 말이야.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그녀는 내가 미리 햄버거를 시켜놓지 않아서
싸이버거를 시키란 말을 듣지 않고 신제품을 시켜서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미안하다는 말은 했다. 근데 그래도 화가 아주 많이 난 것 같다.
우리는 말없이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체할 것 같은 건 난데 옆에서 그녀가 연신 가슴을 두드렸다.
한번, 두 번, 세 번...
반쯤 먹다가 내려놓더니 이젠 본격적으로 양손을 이용해 가슴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살짝 그 모습이 고릴라 같다고 생각했다.
(외모가 아니라... 그 행위가 말이다)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길거리로 나왔다.
이제 다시 그녀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온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근데 아직 화가 안 풀린 모양인지 고릴라스러운 행위는 더 심해졌고 가끔 소리도 질렀다.
(나에게 소리를 지르진 않았다)
내가 할 일은 그냥 잠자코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침묵이 그녀를 더 화나게 한 것 같았다.
근데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생각하느라 지하철에서 못 내린 줄 알아서 후다닥 뛰어내렸는데
알고 보니 한 정거장 밖에 안 지나있었다는 말을 고릴라한테 어떻게 하냐고.
그녀는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길거리를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길에 지나가는 사람들 때문에 더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길거리 사람들의 웃음소리, 클랙션 소리, 갑자기 멈추는 사람 같은 자극에 예민하다.
하지만 지금 이 길거리에서 가장 자극적인 사람이 본인이란 것은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갑자기 전봇대를 내려치기도 하고
신발을 벗어서 갑자기 차도로 멀리 던져버리기도 한다.
그럼 나는 씩씩대는 그녀를 지나쳐서 달려가서 주워 온다.
그걸로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중간중간 고릴라답게 가슴도 내려쳤다.
'답답해... 답답해...'
중얼거리다가 도로를 향해 '아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려고 하기도 했다.
나에게도 그 모든 상황이 상상 이상의 자극이었다.
가까스로 남은 본능으로 그녀를 말리고 있지만 머리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망했다. 개 망했다. 내 여자친구가 고릴라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약 2주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앓아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