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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엄지 Mar 12. 2024

글을 쓰게 된 평범한 어느 날의 이야기

호텔방에서 쌍싸대기를 날리다

연락두절은 일상이다. 한번 연락이 끊기면 기본 8시간, 최고 기록은 24시간까지...

5년을 반복된 일이기에 나름 익숙해졌다. 하지만 문득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너만 정신병자니? 나도 정신병자야



평소와 같은 패턴으로 오후 4시쯤 연락이 뜸해지더니 자정이 가까워서야 답이 왔다.

'헉 깜빡 졸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 마음속에서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가 출발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잔 거...'

'그게 왜 미안해 니 인생인데! 니 인생 망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



나는 진짜 화가 난 걸까? 아니, 이게 화를 낸다고 해결될 문제긴 한가?

그러다가 잠들어버렸다. 슬며시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너도 기다려봐라...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침이 밝았다. 그리고 또 반복되는 패턴...

'미안해'

아니 나는 화 안 났어. 화낼 일이 아니잖아. 근데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이상하네

봐, 다른 친구들 단톡방에는 아무렇지 않게 웃긴 말 잘하잖아.



그러다가 온 친구의 카톡.



'너 오늘 기분이 안 좋니? 금요일이니 웃어보자~'



어떻게 알았지?

내 기분이 1 밑까지 내려갔어. (나는 내 기분을 1부터 10까지 단계로 셀프 측정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까불지를 않았네...? 갑자기 일어서서 춤을 추질 않았네...?

변기에 앉아서 기분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한다.



내가 내 기분을 제대로 알아챈 이상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남자 친구를 버린다? 가끔 짜증 나지만 그건 절대 안 돼.

출근을 안 한다? 어제도 그제도 안 했잖아 게다가 오늘은 회의라고.

집을 떠난다? 이거다. 이거네. 내가 요즘 너무 집에만 있었네.



바로 숙박 어플을 열고 특가로 나온 호텔을 예약했다. 용산, 5성급, 조식 포함, 결제 완료.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스스로의 판단만으로 20만 원이라는 거금을 써버렸네.

뭔가 되게 즉흥적으로 떠나는 영화 주인공 같잖아.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드디어 불쌍하고 가여운 내 남자친구를 용서해 줘야겠다.



잔뜩 풀이 죽어있을 남자에게 연락했다.

'내가 오늘 기분이 좀 꿀꿀해서 호텔을 예약했거든? 근데 조식이 2인이네 오려면 오던가'

'... 뭐라고? 나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와서 이해를 못 했어'

'오늘 밤에 호텔 가서 자자고. 짐 싸서 와라!'



우리는 내 퇴근 시간에 맞춰 용산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기 호텔 가기 진짜 어려워. 너 시간 맞춰서 안 오면 버린다'

협박도 잊지 않았다.



6시 땡 맞춰 퇴근한 나는 여의도에서 택시를 타고 15분 만에 용산역에 도착했다.

지하철 타고 금방이지만 환승을 한 번이나 해야 하고 오늘은 내 기분을 전환시키는 날이잖아.

게다가 방금 전에 신발이 찢어진 걸 발견했다는 좋은 핑계도 있었다.

아이파크몰에서 마땅한 신발을 둘러보며 상습적 지각쟁이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엄마랑 40분 정도 통화를 했을 즈음...

'걔 또 늦는 거 아니야? 확인해 봐 어디쯤 왔나'

'오고 있대. 걱정 마! 지하철이래'



엄마랑 전화를 끊고 지각쟁이에게 확인 전화. 확인 전화. 확인 전화. 왜 안 받고 지랄이야?

또 시작이다. 늦는다면 얼마나 늦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은 해주는 게 기본 상식 아니야?



'너 어디야?'

'.... 지하철 타러 가는 중'

'너 아까 10분 전에 지하철이라며'

... (정적)

몇 분간의 대치가 이어진다.



사실 소용없다는 걸 안다. 그의 지각에는 이유가 없으니까. 정말 말 그대로 이유가 없다.

그는 늘 시간이 그렇게 빨리 흐른 줄 몰랐다고 한다.

내가 이 남자 때문에 길에서 버린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아마 연봉 1억은 가뿐히 넘을 것이다.



사실 오늘 약속은 내가 점심 무렵 변기에 앉아서 내 멋대로 정한 약속이다. 그렇지만 너도 오겠다고 했잖아? 약속했잖아! 이 약속을 늦으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줄게.

1. 체크인을 늦게 하면 낮은 층수를 배정해 준다고 어느 블로그에서 읽었다.

2. 9시가 넘어가면 문을 닫는 식당이 많아진다.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이 싫고 불안하고 짜증 난다.

3. 오늘 내 기분 풀어주는 날인데 내가 기꺼이 널 껴줬는데 감히 늦어?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서 만난 풀이 죽은 지각쟁이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버렸다.

왜 저렇게 북한 군인처럼 생겼지...

'너 사람들이 간첩인 줄 알면 어떡해!'

밥을 먹으러 가는 내내 나는 미디어에서 비친 북한 군인의 모습이 어떤지 열변을 토했다.

현빈, 공유, 강동원 등등... 아 그니까 욕 아니라고~! 물론 100일은 굶은 것처럼 보이지만...



늦게 체크인한 호텔 방은 가장 높은 층이었고, 식사도 무리 없이 끝났다.



잠에 들기 전 꽤나 진지한 토론도 했다. 몇 시에 일어나서 조식을 먹으러 갈 것이냐.

조식시간은 6시 반부터 10시 반까지였고

나를 자극하려는 것인지 호텔 측은 빨간색으로 조식 혼잡 시간을 표시해 두었다.

모처럼 쉬러 와서 조식 먹으러 갔다가 줄을 선다는 건 너무 끔찍한 거 아니야?

조식까지 먹어야 이번 호캉스가 완벽하게 끝난다고.

나는 7시부터 매우 다양한 시간대의 알람을 시간 별로 맞춰두었다.



다음 날 아침

정말 혼잡하다는 시간에 조식을 먹으러 가게 됐다. 무거운 접시를 들고 연어를 먹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가...

절망했지만 아주 놀랍게도 여유로웠다.

빈자리도 꽤 많았다. 아침이라 입맛이 없고 차분한 나의 동반인과 함께 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내가 상상했던 모든 문제가 상상으로 끝났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호텔의 체크아웃 시간은 12시. 우리는 10시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일단 한 시간 정도는 침대에 누워서 과자를 먹으며 낄낄댔다.

이게 바로 호텔에 오는 이유지. 바로 침대에 누워서 과자 먹기. 너 입 벌려봐 내가 던져볼게 슝-



그러다가 11시, 당연하게도 나는 갑자기 불안해진다.

일단 모범을 보이기 위해 내가 먼저 씻기 시작했다. 나의 샤워는 대부분 5분 이내에 끝난다.

사실 원래 이 정도로 빠르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본보기 식으로 점점 짧아졌다.



모두의 예상대로 그의 씻기 시간은 최소 30분.

이 호텔의 화장실은 특이하게 오픈되어 있는 형태였는데

그가 커튼을 치고 머리를 감는 동안 나는 바로 옆 세면대에서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저 짧은 머리만 감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그의 머리 스타일은 북한 군인 수준이다)

나는 커튼을 살짝 열고 그를 훔쳐봤다. 아주 평범하게 오래도록 머리를 헹구고 있었다.

그러다가 들켰다. 우리는 서로 낄낄댔다. 커튼이 다시 닫히고 나는 잠시 뒤에 다시 훔쳐봤다.



또 들켰을 때 나는 뒤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앞에 있을 걸 예상한 듯 앞을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후, 뒤에 있는 것도 들켜버렸다.

그의 머리 감기는 매우 평범했다. 아주 오래도록 꼼꼼하게 귀 뒤도 씻는다는 것 말고는..

흥미를 잃은 나는 다시 침대로 향했다. 그때가 11시 반쯤 되는 시간이었다.



다 씻고 나온 그는 자신을 훔쳐본 나를 나무랐다.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 어떻게 씻길래 그렇게 오래 걸리나



그리고 준비를 끝마치고 그의 준비 과정을 지켜봤다. 11시 40분, 45분...

이제 나가야 되는데 옷을 왜 안 입지? 왜 갑자기 저렇게 날뛰지? 빨리 옷 입어. 이제 나가야 돼. 그만해!

아까 차분하게 아침 먹던 사람 어디 갔지? 그와 말이 통하질 않았다.

아기인가 강아지가 말을 안 들어서 끌어안고 울던 사람을 본 적 있다.

드라마에서였을까? 다큐멘터리? 아무튼 그 사람에게 100% 공감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반드시 12시 전에 나가야 한다. 그게 약속이다.

(사실 5분, 10분 정도 늦는다고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나도 안다.)



나는 그를 쳐다보며 내 뺨을 스스로 후려쳤다. 너 그만할 때까지 나 이거 계속할 거야.

한 번, 두 번, 세 번... 아 아파 뒤지겠는데... 멈출 생각을 안 하네.

그때 이 남자도 내가 뺨을 후려치는 박자에 맞춰 자신의 뺨을 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짝)


짝 (짝)


야!!! 이 새끼야!!!


...


결국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러버렸다.

좀 오버했나? 이 정도 했으면 멈췄겠지? 근데 내가 못 멈추겠는데?



나는 바로 옷을 입고 짐을 싸고 카드키를 두 개 다 챙긴 채 호텔 방을 떠났다.

문을 닫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두 번쯤 그가 말을 걸었지만 무시했다.

그 와중에 그는 내 양말도 신고 있었다. 그게 내 것이란 것도 모르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벗어준 양말은 주섬주섬 신고 나왔다)



긴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내가 여기다가 쟤를 두고 갈 수 있을까?

여기서 나오는 방법은 알까? 집에 돌아오는 방법은? 여기가 어딘 줄은 알까? (다 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다시 돌아갔다. 제일 끝 방인 우리 방에 다다르니 그가 나왔다.



나란히 걷고 있으니 그가 나에게 대뜸 말을 걸었다.

소화전에 쓰여있는 <방 수 구>라는 단어를 가리키며 '방구'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화를 낼 때마다 길에서 웃긴 단어를 찾아낸다.

몇 년 전 <봉고부동산>을 보고 '똥꼬부동산'이라고 했던 게 시작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버려서 진짜 이를 꽉 물고 참았다.



정말 진지하게 그를 향해 말했다.

'우리 어제오늘 계속 문제 되는 게 뭐인 것 같아? 알고 있어?'

그는 조용한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향해 속삭였다.



'TICK TOCK‘



.

.

.



몇 시간 뒤 그는 진실을 말해주었다.

머리 감는 걸 훔쳐보는 내가 자신을 자극했다고.

앞에서 보는 건 웃겼지만 뒤에서 쳐다보고 있을 때는 정말 무서웠다고.

내가 머리를 다 말리고 떠난 후에도 그는 계속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날 뛰기 시작했다고.


.

.

.



망할 시간과 잠, 충동, 강박, 분노, 웃음으로 가득한 우리의 이야기를 이곳에 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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