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제 남자친구요?
정말 착해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아요
예의 바르고 어른들이 좋아하세요
처음 남자친구랑 찍은 사진 올렸을 때는 제 SNS가 폭발했다니까요
윤시윤을 닮았다나 뭐라나...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으면서도 길고양이를 보면 꼭 한 번은 쓰다듬어줘야 하고요
작은 것에도 쉽게 감동하고 감사할 줄 알아요
보도블록 한 모퉁이에 피어난 새싹을 발견하면 한참 멈춰서 들여다보는 따뜻함도 가졌어요
사람들은 너무 말랐다고 하지만 저는 나란히 앉으면 자리가 널널해서 좋아요
저보다 오빠지만 챙겨주고 싶게 만들어요
제 지랄 맞은 성격도 다 이해해 줘요
그런데...
평생을 서울에 살았으면서 버스 타는 걸 무서워해요
약속 시간에 밥 먹듯이 늦어요
낮과 밤의 구분이 없어요 한번 잠들면 12시간은 기본이에요
머리 감을 때 샴푸하는 걸 까먹고 그냥 말린 적이 있어요
오전에 만나는 건 꿈도 꿀 수 없어요
처음 가는 곳은 혼자 갈 수 없어요
씻는데 기본 1시간 걸려요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해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처음 봤을 땐 그런 생각을 했다.
'종이 인형'
말랐는데 잘생겼고 무해해 근데 펄럭 거리네 좀 심하게
스물세 살, 스물네 살 인생 첫 연애를 시작하게 된 우리는 말 그대로 돌아있었다.
그렇지만 연애 초반에는 모두가 돌아있잖아요?
문제는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도 돌아있었다는 것이다.
2019년 4월
말 그대로 풋풋한 커플이었던 우리는 보통 주 5회 정도 내 퇴근 시간에 맞춰 가벼운 데이트를 했다.
여기서 가벼운 데이트란 파스타를 먹고 카페에 가고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햄버거를 먹고 코인 노래방을 갔다가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산책하는 데이트를 말한다.
여의도의 한 방송국 막내작가이자 아가리 다이어터였던 나는
점심에 주로 샌드위치를 먹거나 굶으며 잔뜩 예민해진 상태로 퇴근하곤 했다.
퇴근 시간이란 것이 늘 일정적인 게 아니어서 내가 퇴근할 때쯤
집에 있는 그에게 연락하면 준비를 시작해서 서로의 집 부근에서 만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두 사람의 집은 은평구에 위치해 있고 지하철 두 정거장, 걸어서 40분 거리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맘스터치였고
우리 집 앞에 있는 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한채 나는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도착할 때까지 그에게선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준비하는 동안 연락이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우리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는 연락이 없었다. 이쯤 되면 뭔가 싸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몇 번의 연결 끝에 나는 분명히 만나기로 약속을 한 그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중이야!"
"어어 그래, 나 지금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지하철로 두 정거장은 5분 정도가 걸린다. 서울에 산지 4년 정도 됐으니 나도 그쯤은 안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록 그는 도착하지 않았다.
"어디야?"
"가고 있어."
"거짓말하지 마. 너 어디야? 내가 지하철 어플로 다 봤어. 네가 탔어야 하는 지하철은 이미 지나갔어. 근데 너 어디야. 너 지금 어디야?"
"...."
사실대로라도 말해줬으면 좋겠지만 이 남자의 입에서 사실이 나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28살의 나라면 기다려줬을까? 사실 모르겠지만 아무튼 23살의 나는 참지 않았다.
"어디야. 그것만 대답해 지금 어디야."
"... 구산역"
연신내 -> 구산 -> 응암
한 정거장만 더 오면 되는데 그걸 못 왔다.
두 정거장을 지나쳐와야 하는데 한 정거장만 지나서 내려버렸다고 한다.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차라리 화장실이 급해서 내렸다고 해
그러나 이 남자는 정말 모르고 내렸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고 그냥 화가 났다.
나는 아침에 출근해서 일하고 (심지어 점심도 대충 먹고)
퇴근해서 버스 환승하고 지하철도 타고 너를 만나러 왔는데
너는 고장 지하철 두 정거장을 못 와서 거기 멈춰있다고?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뭔갈 바라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 가장 쉬운 지시를 내렸다.
"지하철 역에서 나가서 2번 출구로 가면 맘스터치가 있어. 거기 미리 가서 시켜놔. 난 싸이버거 먹을 거야."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 복잡한 퇴근 시간 내가 구산역에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따릉이에 올라탔다.
원피스만 입고 다니던 연애 초반의 나는 가랑이를 부여잡고 구산역으로 질주했다.
물론 가는 내내 후회했다. 그냥 버스 탈걸.
그리고 약 10분 간의 질주 끝에 맘스터치 앞에 도착한 나는
내가 지시한 그 쉬운 지시사항조차 시행하지 못한 그를 만났다.
이 남자는 화난 나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먼저 들어가서 주문을 해놓으라고 해둔 이유는 단순히 화가 나서가 아니다.
맘스터치는 주문 즉시 조리를 시작하기 때문에 음식이 늦게 나온다고
나는 배가 고프니까 얼른 먹고 싶었다고...
또 한 번 몰려오는 화를 참고 주문을 하러 들어갔다.
나는 싸이버거를 먹겠다고 했다. 근데 자리로 돌아온 그가 가져온 것은 인크레더블 버거였다.
사실 회사에서 매우 배가 고파 인크레더블 버거를 먹겠다고 말하긴 했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 않아... (사실 내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오기로)
싸이버거를 먹겠다고 했는데 그것 조차 들어주질 않았네?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내 입보다 큰 인크레더블 버거를 먹었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토할 것 같고 힘겨웠다.
미친 듯이 가슴을 치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그때 나의 모습이 마치 성난 고릴라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의 사건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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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시선으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