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자코메티, #부정의 변증법
* 이 계몽 개념 자체가 오늘날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저 퇴보의 싹을 함유하고 있다.
예전에 독서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청담동 루이뷔통 명품관에서 열렸던 '자코메티' 전시회에 방문했었던 기억이 있다. 루위뷔통 매장을 몇번 지나간 적이 있긴 했지만 명품관에 진열되어 있는 제품들은 특별한 무언가를 내뿜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응대하는 직원들은 입구에 들어서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자, 여러 방향과 각도에서 비춰지고 있는 내 모습이 파편화되어 마치 거울 속에 갇혀있는 것만 같았고, 5층에서 만나게된 자코메티의 작품은 실존주의 이미지가 무색할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개인의 자각을 강조하는 실존주의와 대량생산을 특징으로하는 기성품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우라'란 예술 작품에서 느껴지는 고상하고 독특한 분위기 또는 품위나 품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실존주의는 인간의 주체적인 존재성을 강조하고 허무와 반복 속에서 자기를 부정한다. 하지만 자본은 논리적 비약이 있어보이는 영역까지도 포섭하여 처음부터 그것이 자신에게 속해있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수도 있다.
자코메티는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만든 후 해체하고 그것을 다시 붙여나가며, 삶이란 완전한 것이 아니라 미완성을 향해 만들어가는 것을 것이라 표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루이뷔통은 명품관에서 연출하는 럭셔리한 분위기에다가 실존주의를 덧입혀 소비와 욕망이 가지고 있는 기호성을 개성과 차별성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본은 완전한 것이 되어 존재성을 과시하려 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소유함으로써 브랜드가 연출하고 있는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키치'란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을 뜻하는데, 이러한 키치는 독창적인 구조의 필요성이나 동질성과 일치하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지 않고 상업적이고 대중적인 가치를 강조하며 진부하고 감상적인 요소가 많아 움베르트 에코는 문맥을 벗어난 양식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보통 계몽이라고 하면, 구습이나 절대적 이념에 사로잡혀 무지몽매한 상태에 빠진 인류를 '이성의 빛'으로 몰아내기 위한 것으로,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진보의 혜택을 누리고 정신적인 삶을 만끽하며 좀 더 과학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교양적인 이상주의를 말한다. 이러한 계몽주의는 18세기에 시작하여 구태의연한 사회와 종교, 그중 비과학적인 생각으로부터 해방을 목표로 했으며, 공평한 사회의 실현을 꾀했다.
계몽주의자들은 과학적, 합리적 사고가 확산된다면 사회는 기존의 불합리한 가치를 전복시키고 이전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그러한 계몽이 가지고 있는 이질적인 특성을 예상하지 못한채 발전에만 몰입하였고 그 결과, 경제적인 격차와 주체 상실에 의한 문제점들이 대두하게 되었다.
인간을 더욱 높은 단계에 올려놓고자 했던 계몽주의는 어떤 이유때문에 그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일까? 일단, 계몽주의는 그것을 주창헀었던 인물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상뿐만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도 모순되는 이질적인 면모들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토머스 홉스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방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하고 국가권력을 통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군주제를 통한 독재적인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군주의 이익은 곧 신민들의 이익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회계약으로서 군주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자유를 넘기면 민주주의의 폐해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제가 성립된 국가에서도 아노미 현상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었고, 민주주의가 가져오는 폐해보다 더 큰 문제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리고 신민의 이해관계가 국정운영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국가들이 더 많았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계몽과 이질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존 로크는 본래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인간의 공동자산이 된다고 했고, 거기에 인간의 노동이 더해지면 그것은 개인의 소유물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노동의 생산물을 사유재산에서 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생산물이 만들어지는 장소인 토지까지도 사유재산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만약 생산물과 토지의 소유자가 겹치게 된다면 이익은 최종적으로 누구에게 귀속되어야 하는가? 만약 토지 소유자가 자기 소유의 토지를 빌려주는 대가로 토지의 수확물을 소유하게 된다면, 토지 경작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얻은 생산물을 소유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자연에 자신의 노동을 가했을 때 그 결과물이 노동한 자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로크 자신의 주장과 모순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장 자크 루소는 계몽주의자였으나 반계몽주의자라 불리기도 했는데, 그는 인간을 이전의 사회보다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각종 문명과 사회규범이 변질되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문명 이전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문명 이전의 세상이 이상적이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루소가 살았던 시대보다도 훨씬 더 비참하고 가혹한 것에 가까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어보면 인간은 어느 정도의 동질성과 친밀성이 공유되는 쪽에는 협력을 하지만, 자신들과 이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잔혹하게 대했다는 것을 서술하는 대목들이 나오는데, 문명의 단계를 거치게 되면서 언어와 규범이 만들어졌고 교역을 통해 다른 종족이나 민족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의 안정과 평화가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니체가 말했듯이 도덕에는 '권력의지'가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있는 것이 진실에 가깝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질적인 것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계몽주의로부터 파생된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을 부르짖으면서 시작되었고 부르주아들은 민중들과 합세하여 그들을 억압하던 전제정권들을 몰아내었다. 그런데 혁명의 이상과는 달리, 목표가 달성되자 부르주아들은 구세력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민중들도 조건이 된다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이전보다 나은 지위를 성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득권 세력과 신진세력 간에는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발생하였고, 선민의식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 해결사를 자처하고 믿음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단적인 주장들이 힘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자율적인 사고방식을 요구하는 계몽의 본질을 외면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시민은 다시 신민으로 역행하기 시작했고, 계몽은 그 자체를 스스로 변질시키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항상 그래왔듯이 혁명의 여명은 잠시동안 그 빛을 비추었고, 어두운 밤이 다시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계몽의 이상은 점차 사라졌고, 권력의지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사회가 발전하고 연결될수록 진보적인 결과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전의 악몽들은 두번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어왔다. 하지만 네 차례의 산업혁명은 빈부의 격차를 더욱 심화시켰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야만성을 다시 확인하기도 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전 세계가 신음하면서 잠시 손을 잡는 것 같았지만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며 한동안 잠잠했던 이데올로기들이 되살아났고, 유보되었던 전쟁들은 현재진행중인 상태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전보다 퇴보된 모습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계몽이라는 이상 위에 맥락과 상관없는 의도들이 삽입되면서 변종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하나의 사건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요소들과 혼합되었다. 진위를 밝히려는 노력들이 오히려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데, 아도르노는 계몽에는 퇴보의 가능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으며, 사물을 옳게 판단하고 진위, 선악 또는 미추를 식별하는 능력인 '합리적 이성'을 배제하고, 목적 그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보면 계몽은 그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인간은 존재 목적을 잃어가고 누군가를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지만 정작 주인공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다.
'데페이즈망'은 '정든 고향을 떠나다.'라는 뜻으로 익숙한 사물이나 대상에 부적절한 삽입으로 인해 새로운 경험을 자극할 수 있는 기법으로, 기존의 문맥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나 느낌을 부여하고 예상치 못한 조합을 통해 관객에게 신선하고 충격적인 인상을 주고 싶을 때 사용한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계몽주의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구현되는 경우도 있었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차 대전 이후 패전국이었던 독일, 오스트리아와 같은 나라들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식민지를 내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패전국의 식민지를 내놓게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과 독립을 열망하는 약소민족들에게는 시대의 조류가 주는 커다란 희망으로 해석되었다.
사실, 3.1 운동 또한 민족대표들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고 지식인의 입장에서 일제에 대한 저항을 퍼포먼스로써 연출하려는 의도였기때문에 큰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애초부터 탑골공원에 갈 생각이 없었고, 경찰서 앞에서 선언문을 낭독한 후 체포되는 선에서 조용히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시위를 기다리다 지친, 열정이 가득했던 풋내기 전도사 한 명이 단상에 올라 기미독립선언문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해버렸고, 이로써 독립운동의 포문이 줄기차게 열려버렸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인도의 위대한 시인 타고르는 `기탄찰리`를 통해 우리나라를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찬미하기도 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흑인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벌어진 싸움이었다. 북부는 공업시설이 발전했고, 남부는 목화 재배가 유명했는데 공장의 일손이 부족했던 북부는 흑인을 교육시켜 산업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려고 했고, 남부에서는 그러한 일이 생기게 되면 대규모 농장에서 흑인 인력들이 이탈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이에 반대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남북전쟁은 경제적 이해관계의 갈등의 여파가 시작되었고, 미국의 부상에 위협을 느끼던 유럽 강대국들은 남부를 지원하며 사태가 더욱 악화되기를 원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링컨은 전략적 의도에서 전쟁의 명분을 노예해방을 위한 것으로 선포해보렸고, 이것은 정의와 인류애에 기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졸지에 인류의 대의에 반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유럽강대국들은 싸울 명분이 사라져버렸고, 공산주의 진영에 있었던 마르크스는 '남북전쟁은 내전을 넘어선 혁명 전 교전'이라며 크게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북부의 승리는 의도를 넘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커다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필자가 같은 맥락에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바로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이다. 그는 연예인으로서 <국민의 일꾼>이라는 시트콤에서 역사 교사 출신으로, 부정부패에 저항하는 청렴한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코미디에서 끝나지 않았다.
시트콤의 출연진들은 동명의 정당을 창당하였고 젤렌스키는 대선에 출마하여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드라마에서나 가능했던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정치경력이 전무하였으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두려움 없이 러시아에 맞섰고, 인류의 양심에 호소하여 세계의 지지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를 포함헤서, 어느 누구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전개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우크라이나가 물자 부족과 각국들의 이중적인 모습 때문에 전쟁에서 밀리고 있지만, 인류의 대의라는 명분 앞에서 강대국들이 젤렌스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세계 역사상 특기할만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또 이 사태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매개체로 비판을 받아왔던 SNS와 유튜브 같은 매체가, 뉴스보다 더 생동감 있고 신속하게 정보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뉴스에서 간과해 왔던 영역들을 심각하게 인식했고, 강자가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국제적인 관행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넘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트럼프주의가 다시 대두되면서 인류의 대의를 업고 싸웠던 우크라이나 전선은 이탈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키치'가 될 것인지 아니면 '데 페이즈망'이 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워져버렸다.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 이론은 이러한 종류의 사례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역사의 발전은 헤겔의 변증법처럼 모순되는 과정이 하나의 결과로 개념화되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예상하지 못했거나 개념이 간과하고 있었던 지점에서 일반성을 뛰어넘을 만한 가능성이 발현될 도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결과가 긍정적인 것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것인지는 결국 해석의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계몽 그 자체에 내재되어있는 전복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아도르노는 한 사물의 한 단면에만 천착하는 것은 전체적인 모습을 왜곡하여 폭력을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즉 권력이란, 그 시대의 지식을 독점하는 것으로 시선을 지배하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며, 계몽 또한 권력의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선한 의도에서 시작되었더라도 견제받지 않은 채로 있는다면, 그것이 추구했던 이상을 스스로 파괴하는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히려 계몽은 대립되는 가치들 사이에서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운동력을 추동할 수 있으며, 주체가 깨어있기 위해서는 대상 또한 '있는 주체'에 시선을 두고 바라보는 것이 요구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필요에만 급급해 전체를 부분으로 격하시키거나, 부분을 전체로써 일반화시켜서도 안 된다.
개념 그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계몽의 본질이며,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 참고도서
< 개념의 변증법, 테오도르 아도르노, 호크하이머, 문학과 지성사, 2001.08. >
< 철학용어 도감, 다나카 마사토, 성인당, 2019. 4. >
늙는다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퍼지는 자연스럽지만 위험한 질병이다. 우리를 압도하는 결함에 대비하고 최소한 그 진척을 늦추기 위해 각별히 주의하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수상록, 몽테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