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코로나 시대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보자. 한국에 관광을 오는 외국인 혹은 서울에 놀러 오는 사람들이면 꼭 한 번씩 둘러보고 가는 곳 중에 하나로 뽑혔던 곳 명동. 항상 명동거리는 외국인 관광객과 쇼핑을 하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특히 화장품 가게는 항상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명동 길거리에서 외국어로 적힌 간판은 손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 또한 외국어에 능통한 직원들이었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초등학교 영어 교과서에서도 '명동'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겠는가? 화려한 간판들과 스피커를 통해 크게 나오는 한류의 주역 K-POP노래들과 빼먹을 수 없는 길거리 음식 등등... 누구나 보기에 화려한 명동거리였고 한번 명동에 오면 시간은 마하의 속도로 흘러간다 하지만, 필자에게 '명동에서의 기억?'이라고 물어보면 "혼자만 길 가운데 멈춰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2배로 빨리 감기 되어가는 느낌? 유독 나에게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던 곳"이라 대답할 수 있겠다. 작년 12월 을지로에 방문할 일이 생겨서 잠시 들렸다가 문득 명동에서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작고 나의 소중한 니콘fm2 필름카메라를 들고 그때의 기억과 지금의 분위기를 흑백필름 한 롤에 담아봤다. 이제부터 명동 거리에 대한 기억 그리고 코로나 시국의 명동거리에 대해서 필름사진과 글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청춘? 아무것도 몰랐기에 가능했던 도전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간다. 2022년 현재 사진업을 하고 있는 31살의 필자는 예전에 부모님 말씀을 무진장 안 들었고 사고뭉치였던 아이였다. 공부와는 콘크리트 벽을 치고 살아왔으며 사진학과에 진학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다녀왔다. 2012년을 넘어가면서부터 우리나라에는 엄청난 공무원 열풍이라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너도 나도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공무원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시험성적 + 면접 성적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붙는다. 어떠한 능력도 보지 않았고 60살 정년 + 연금이라는 어마 무시한 혜택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보면 가장 남들과 동일 선상에서 출발하고 오직 성적이 우수한 학생만 합격증을 받아갈 수 있는 가장 공정한 경쟁이 아니겠는가? 영어 be동사가 뭔지도 몰랐던 놈이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보겠다 하니 부모님은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하지만, 고3 때 한번 선행학습의 결과랄까? 결국 나의 고집에 부모님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으셨고 그렇게 2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필자에게는 공무원 시험 합격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명동거리 그리고 인형탈을 쓰기까지 발걸음을 하게 만든 학원의 나비효과
처음에 모든 일이 그렇듯이 정말 순탄하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노량진에 올라왔을 때 티브이에서만 보던 값싼 물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공무원 수험서를 들고 다니고 노량진 골목에는 유명 학원 선생님들의 개강 안내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처음 노량진에 왔을 때는 나도 이제 공무원 수험생의 일원으로써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도 있었지만 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도전을 하게 되어서 약간의 설레는 마음도 있었으며, 그렇게 학원 - 고시원을 반복 생활을 하고 수험기간이 1년이 넘어갈 때쯤이었다. (정말 필자는 노량진에서 그 누구도 친구도 안 사귀고 혼자서만 아니, 나 자신만 알고 살아왔다.) 처음 시험에서는 뭐 당연히 떨어졌고 부모님의 반응 또한 "그래 첫 시험이니 간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기죽지 말고 열심히 다음 시험 준비하자"라는 격려 속에 다음 시험을 준비했지만 한번 더 떨어졌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 당시 공무원 바람은 전국적으로 불었으며, 주변 한 다리만 건너면 공무원 준비한다는 지인들을 찾을 수 있었다. 노량진에 위치한 학원들은 점점 수강료를 올리기 시작했으며 어머님과 통화할 때 "엄마.. 학원비.." 이야기를 꺼내면 어머님은 "학원비가 그렇게 비싸..?"라는 대답이 수화기 건너편에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필자의 마음은 울기 시작하였다. 교재 값도 점점 올라가기 시작하였고, 25살이 넘어가는 나이에 이제 부모님도 뒷바라지해주실 여력이 점점 떨어짐을 짐작하였고 주말에 잠깐이면 가능한 아르바이트 그리고 최저시급보다 비싸고 주급으로 현금으로 받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검색을 하기 시작하였고 '명동 고양이 카페 인형탈 아르바이트 모집'이라는 글을 클릭하였다. 일단 돈을 벌어야 나의 수험생활도 가능하였기에 무작정 버스를 타고 을지로 2가 명동으로 면접을 보기 위해 향했다.
괜찮겠어...?
고양이 카페에 도착하여 사장님과 면접을 보기 시작하였다. 모든 게 시급하였던 나였기에 모든 사정을 다 털어놓았으며 사장님은 "차라리 이 시간에 공부를 더 해서 빨리 합격하는 게 부모님 도와드리는 일 아닐까?"라고 물어봤지만 나의 대답은 "괜찮습니다. 시켜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다. 그 누가 봐도 그 시간에 더 공부를 하는 게 답이지만 당시 나의 기분과 마음 상황이 그렇지가 않았고 내 성격상 또 그런 걸 못 본다. 원래는 중학생? 고등학생 애들이 하기로 하였는데, 일이 힘들고 지금까지 학생들이 하겠다고 왔다가 1~2주 만에 도망가버린 케이스가 많아 나를 그 자리에서 주말 인형탈 아르바이트로 채용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렇게 나의 명동 고양이 카페 인형탈 아르바이트이자 광대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나의 임무는 전단지를 돌리고 사람들을 재미있게 해 주고 고양이 카페 위치를 물어보면 친절히 입구까지 안내해주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명동거리에 숨겨진 불문율
한여름 6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시작하였다. 인형탈과 복장은 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무겁다. 신발은 잘못하면 넘어질 정도로 사이즈가 상대적으로 컸으며, 특히 탈 속에 들어가니 땀에 찌든 냄새와 꾸리한 냄새는 내 코를 사정없이 찌르기 시작하였으나 뭐 어찌겠는가.. 일단 길거리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5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까? 점점 숨이 막히기 시작하였고 땀은 마치 폭우를 맞은듯한 느낌으로 계속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안에 입었던 옷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일단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지만 '어차피 여기서 진짜 나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고 전단지를 나눠주고,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지 않았는가? 슬슬 자신감이 올라오더니 화장품 가게 앞에 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에 이르렀고 나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기 시작하였다. 춤을 목각인형처럼 뚝딱거리면서 잘 추든 못 추든 상관없다.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한 자신감이 독이 되었을까? 길거리에서 음식을 파는 남성들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하였다. "야! 인형탈! 꺼지라고! 장사 방해하지 말고! 비켜! 말 안 들려?" 라며 나를 향해 소리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 명동골목에는 불문율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은 내가 돌아다닐 수 있는 구역이 정해져 있었고 그 구역을 넘으면 바로 고성이 오가기 시작하였다. 마치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듯싶은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하는 그런? 것이 있었다. 하나의 3.8선 같은 느낌이었다. 그 뒤로 잠시 위축이 되어있었고 나는 쉬는 시간이 다가와서 잠시 휴식을 취하러 카페에 다시 들어갔다.
카페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나는 다른 방법이 없을까?라고 생각을 하였고 이참에 내 구역에서 더 이목을 끌어보자 생각을 하였다. 어떠한 방법이 있을까? 카페 직원분이 주신 시원한 음료와 얼음을 아그작 아그작 깨 먹으면서 고민에 빠졌고 시간은 나에게 휴식시간 종료라는 신호를 알려주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인형탈과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다시 명동골목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인형탈 속에 숨겨진 이면, 하지만 세상은 아직까지 따뜻했다.
우리가 흔히 광대라는 직업은 무슨 일이 있든 자신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직업이다. 인형탈 또한 마찬가지다. 최대한 이목을 끌어야 하고 웃음과 모든 사람들의 장난을 다 받아줘야 한다. 특히 인형탈만 보면 때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글을 보면 정말 인형탈을 다시는 때리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주라고 말하고 싶다. 일단, 인형탈이 장난으로도 맞으면 탈 전체가 울리면서 나의 머리에도 충격이 온다. 어지러우면서 그 충격은 정말 오래간다.. 인형탈을 쓰고 일을 하는 것도 다 사람이 한다. 인형탈이라고 감정이 없겠는가? 당시 필자도 수험공부 걱정 등등 많은 걱정이 있고 기분이 안 좋을 때도 많았다. '나만 뒤쳐지는 거 아닌가?' '지금 다른 수험생들은 책 페이지가 더 넘어가고 있겠지...?' 등등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고 신경질 나기도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했으니 일단 해야지.. 아! 이제 보니 새로운 방법을 말 안 했다. 새로운 방법은 사람이 내 구역에서 유일한 작은 사거리? 가장 많이 다니고 자주 다니는 극장? 같은 곳 앞에 부채질하면서 드러누워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한 손에 전단지를 들고 있으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어머! 쟤 인형 탈좀 봐!" "쟤 대놓고 농땡이 피네!" 이러면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건지 아니면 신기하고 웃겼던 건지 나랑 같이 사진도 찍고 전단지를 받아 카페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전단지를 바닥에 펼쳐두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면서 장난을 치고 지나가는 손님들 중에 나에게 시원한 물과 음료수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끄는 방법을 터득하였고 시선이 나에게 쏠려도 길거리에서 음식을 파는 건장한 청년들은 나에게 아무 말 도 못했다. 춤을 추고 뛰어다니면서 사람들과 장난치고 전단지를 펼쳐두고 자는 연기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명동골목에서 고양이 인형탈을 쓴 고양이 카페 광대가 되었다. 특히나 사람들이 가장 신기해했던 것은 탈 입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저 사이 빨대로 음료수를 마시면서 돌아다니는 광경을 가장 좋아했다. 이제 주말마다 이러한 루틴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퇴근을 하려면 롯데백화점 앞에서 버스를 타야 노량진까지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버스를 탈 수 있다. 온몸에 땀냄새는 쩔어있고 챙겨 온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퇴근하지만 그래도 찝찝함을 어쩔 수 없었으며 심지어 내가 퇴근버스를 타는 장소는 명동 롯데백화점 바로 앞이다. 주말 밤 9시.. 당시 길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서로 무엇이 그렇게 행복한지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렇게 나는 점점 뒤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서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창 밖 서울 야경을 보면서 노량진으로 돌아갔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1년 6개월..그리고 합격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을 시점을 알려주는 선선한 바람이 불 때 나에게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봤던 해양경찰 시험에 붙어버린 것이다. 자그마치 1년6개월 수험기간.. 그동안의 고생? 과 함께 휴학하고 공무원에 도전해보겠다고 부모님에게 말씀드리는 순간부터 아침 일찍 학원에 줄 서서 들어가고 일어서서 수업을 듣고 정말 책만 보고 살았고 인형탈 아르바이트 이 모든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영어 be동사도 모르던 놈이 드디어 붙어버린 것이다. 합격 소식을 부모님에게 알려드릴 때 그 누구보다 좋아하던 부모님의 모습과 목소리는 아직까지 잊히지가 않고 주변에서 엄청나게 축하를 많이 받았다. 살면서 그렇게 축하를 많이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나 같은 놈도 이렇게 뭔가를 이루고 이곳을 떠나는구나'라는 만족감과 행복함을 가지고 나는 체력시험과 면접까지 합격하여 이곳 노량진 그리고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하지만 8개월 만에 그만두고 사진일을 시작하였고.. 경기도로 다시 왔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사진과 글로 적어보도록 하겠다.) 내가 근무하게 될 곳은 전라남도를 관할하는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소속이었으며, 잠시나마 정들었던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에 살짝 아쉬움이 묻어있긴 했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붙었다는 행복함에 좋은 기억으로 보내줄 수 있었다. 아! 물론 명동고양이 놀이터 카페 사장님에게도 사실을 알려드렸고 사장님께서도 너무나도 좋아하시며 축하해주셨다.
5년 만에 찾아온 명동...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다.
다시 사진일을 하면서 서울에 자주 오고 수도권에서 일을 하지만 5년 만에 이렇게 제대로 명동을 다시 찾아온 적은 처음이다. 지나가기만 자주 앞을 지나갔을 뿐.. 현재 전 세계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뒤덮고 있다. 중국에서 그저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 세계로 뻗어나갔으며 2년 이상 코로나 시국을 보낼 줄 상상도 못 했다. 그저 3~4개월 혹은 5~6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코로나는 지금은 더 미쳐 날뛰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자영업자들과 경제는 파탄 나기 시작하였다. 정말 현재의 명동 골목은 그러한 모습을 적나라게 보여주는 듯싶었다. 물론, 그동안 명동 상권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던 이유도 있다. 지나치게 외국인만 우대해주는 분위기, 터무니없는 가격, 내국인 등한시 등등 여러 가지 말이 많았지만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여론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단번에 해결해버렸다.. 대한민국 대표 상권이었던 명동거리는 곳곳에 '임대' 문구가 붙어 있었으며 '이게 내가 알고 있던 명동 거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줄어들었고 내국인들 발걸음이 줄어들었다. 신나는 음악도 사라지고 외국어로 안내 방송하는 목소리도 사라지고 명동거리 곳곳에는 '폐업' '임대' '70% 할인' 문구를 정말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많지만 지금은 코로나로 인하여 모두가 힘든 시기이고 정말 자영업자들은 위기로 몰린 상황이기에 말을 아끼겠다. 아무튼 서울 상권의 중심이었던 명동에서 사람들은 하나씩 짐을 싸서 그들에게는 정들었던 터전을 떠나기 시작하였으며, 나의 필름 카메라도 촬영 컷수가 끝나감을 알려주기 시작하였다.
무거운 발걸음
옛 기억에 사로잡혀 명동 고양이 카페 바로 문 앞까지 다가갔지만 5년 만에 찾아온 명동의 거리는 너무 많은 게 변했음에 충격을 받았다. 정말 보는 가게마다 전부 '임대' 문구가 붙어있었으니 나도 모르게 '그 사이 사장님이 바뀌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고양이 카페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좋았던 기억과 슬프고 힘들었던 기억... 하지만 그 속에서 음료수를 챙겨주고 물을 챙겨주고 걱정해주고 도와주는 소소하지만 따뜻했던 기억.. 장난치고 함께 웃었던 기억까지.. 나에게는 모든 것이 이제는 지나간 추억이 되어버렸다. 아니, 명동 고양이 인형탈 알바생에게는 그런 추억이 있었다로 남겨두는 게 맞는 듯싶다. 명동 상권이 망해간다는 소식을 뉴스에서만 접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방문해 당시 기억을 되짚어보면서 비교해보니 너무나도 극과 극을 적나라게 표현할 줄 상상도 못 했다. 이런 추억들을 뒤로하고 명동 인형탈의 기억은 마지막 셔터 소리와 흑백 필름 한통에 남겨두겠다.
2017년 여름.. 서울의 중심 명동 골목에서 고양이 인형탈을 쓰고 춤을 추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장난을 치며 함박웃음을 머금고, 농땡이로 버스킹 공연을 관람하던 명동 고양이 인형탈 알바생은 대한민국 해양경찰을 거쳐 동탄에서 흑백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혹시나..정말 배려심이 깊고 자상하시면서 저를 항상 걱정해주고 잘 챙겨주던 당시 명동고양이 카페 사장님에게 감사인사를 드리며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꼭 연락을 주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