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실력』출간 비하인드
내 나이 38살, '보증금 0원, 월세 24만 원'짜리 원룸에서 다시 시작하다
『실패의 실력』
팬데믹이 절정을 향해 가던 2021년 가을,
'방송 촬영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던 나는 영업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X인 모임 금지 조치'와 ' 영업시간 제한 조치'(오후 10시 이후 영업 금지)
양쪽 모두에 해당되는 내 사업장은 도저히 정상적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매출 없이 고정비만 나가는 상황이었다.
(고정비 : 월세, 관리비, 애스크컬쳐 사업 때 진 빚의 원금과 이자, 공간 보수 유지 비용 등)
이렇게 만으로 2년이 지나가자
쓰지 않던 통장에 쟁여 두고 모아뒀던 돈 마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은행에 찾아가 추가 대출을 알아봤지만,
담보도 없는 나는 별 다른 수가 없었다.
잔고가 아니라, '입금 금액'이다.
(6년 전 했던 애스크컬쳐 한국문화 공유 플랫폼 사업의 '빚'을 꾸준히 갚고 있었다)
2021년 겨울.
연말이 되자, 이제 잔고가 바닥났다.
쪼그라들어 텅 비어버린 통장만큼이나 이제는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닿았다.
왜, 내가 뭐만 하려 하면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건지.
왜 내 삶은 늘 이렇게 순탄치 않은 것인지. 대체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살았다고?
가족도, 친구도, 세상도 모두 보기 싫어질 정도로 마음이 굳게 닫히고 있었다.
20만 원으로 세계일주,
30만 원으로 창업,
베스트셀러 작가,
와튼스쿨, 스탠퍼드, UCLA, 런던 대학교에서의 초청 강연,
뉴욕 타임스퀘어에 광고하는 글로벌 기업인,
누구보다 화려한 20대를 보냈다고 자부했다.
열심히 했고, 열심히 한 것 이상으로 박수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따위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결론은(현실은) 빈털터리가 된 30대 후반의 인생 패배자가 됐을 뿐인데.
혼자 조용히 제주도로 갔다.
도착한 제주도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12월의 제주도는
미세먼지도 없이 공기도 깨끗하고,
맑고 따뜻했다.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
한국의 아름다운 정경을 보자 괜스레 가슴이 아려오고 뭉클해져 왔다.
주변 사람들이나 친구들에게 '국뽕' 맞았다고 비난받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유럽 / 북미 / 남미 / 아프리카
20대에 그렇게 세계일주를 2번이나 해봤고 많은 곳을 가봤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 한국을, 한국인을,
나 자신만큼이나 사랑했다.
그러니 한국문화를 좀 더 세계에 알리고 싶어
사비를 탈탈 털어 한국문화 공유 플랫폼 사업을 크게 벌였고,
그 실패에 대한 책임(책무)도 지고 있는 게 나로서는 당연했다.
갑자기. 문득.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떠나기 전에 세상에 무언가를 남기고는 가고 싶었다.
편의점에 들러 노트와 펜을 샀다.
렌트했던 차를 구석에 주차시킨 채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무작정 소설을 구상하고
정말 아무렇게나 기획안을 적었다.
노트에 아무 말이나 끄적이고 있었지만.
너무도 오랜만에 간절하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앞으로 글을 쓸 생각을 하니
첫 책인 <어쩌면 가능한 만남들>을 썼던 10여 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아니던 대학교 3학년 시절,
강원도 원주의 한 호숫가 앞 자취촌 원룸에 틀어박혀 1년 간의 세계일주 경험을 글로 썼고
이후로 무려 2년 간 출판사 216곳의 문을 두드리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학자금 대출 외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그 시절이 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보물(성공)따위가 아니라
보물을 찾아가는 모험이라는 것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10여 년 전에 자취했었던 대학가 앞,
그 원룸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다행스럽게도
'비대면 수업'이 한창이던 때라 대학가 자취촌에는 빈 방들이 넘쳐났다.
심지어 월세도 저렴했다. 십여 년 전에 내가 살고 있을 때보다도 저렴했다.
보증금 0원에, 관리비(전기, 수도, 인터넷) 포함 월 24만 원.
바로 계약하자고 말했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가 짐을 잔뜩 가지고 강원도 원주로 내려갔다.
원주.
졸업 이후로 10년 만이었다.
도착한 모교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호숫가에 산책로가 생긴 것을 제외하면
추억 속 그 모습 그대로다.
코로나 팬데믹이 절정이던 시기라 비대면 수업이 한창인 시기였고,
겨울 방학이고,
연말이라 교내와 학교 인근 자취촌에는 사람이 없었다.
식당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편의점도 문을 닫았다.
흡사 세상에서 사라진(잊힌) 마을에 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우선은 방으로 향했다.
내가 가장 열정 넘치고 목표와 꿈이 가득했던 24살에 살던
그 작은 자취방으로.
방은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구의 배치까지) 10여 년 전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빈집으로 있는지 오래되어서 그런가
작은 날 벌레들이 많이 죽어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짐을 정리하자,
내가 너무나 원하고 그리던 그 모습의 공간이 되었다.
(6평 남짓의) 좁고
(하루에 1만 원도 안 하는) 저렴한 곳이지만
간절히 그리던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다.
물론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가 존경하던 교수님들도, 친구들도, 함께 공을 차고 웃던 선배와 후배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만 인생이 10년 전으로 퇴보한 것 같았다.
마음을 다 잡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글(장편소설)을 쓰기에 앞서,
주인공의 집, 거리 모습, 배경 등을 스케치하면서
그렇게 나만의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2022년 1월
한 달간 정말 미친 듯이 글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습작'도 없이 '본작'에 돌입했다.
잠도 안 자고, 식사도 거의 하지 않으며 썼다.
원주 시내에 있는 이마트에서 '이마트 피자'를 3판씩 사 와서
냉동고에 얼려두고
정 배가 고파서 어지러울 정도가 되면 그제야 한 조각 씩 꺼내서 데워 먹었다.
그렇게 한 달간 거의 이것만 먹었다.
그리고 깨어있는 모든 시간에 글을 썼다.
쓰고 쓰고 또 썼다.
그동안 내 안에 있던 모든 감정의 찌꺼기를 여과 없이 글로 털고 있었다.
폭설이 온 날에도 썼고,
맑게 게인 날에도 글을 썼다.
그렇게 1월 31일 월요일이라는
스스로 정한 D-day에 맞춰서
한 달간,
무려 500쪽 분량의 장편 소설을 썼다.
마지막 에필로그를 마무리 지었던 1월 31일 저녁.
그 순간만큼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아직,
내가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작은 희망의 불꽃이 마음속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늦겨울과 이른 봄 그 중간쯤인 2월이 찾아왔다.
그 사이에 무척 기쁜 일도 있었다.
먼저 장가를 간 동생의 아이가 태어났다.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싶어 서울로 잠시 돌아갔다.
패배감을 많이 덜어내고
그들을 웃으며 볼 자신감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아직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형, 이제 온전히 작가 님인데, 만년필 정도는 있어야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서 뜻밖의 선물도 받았다.
그래, 나에게는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었다.
모든 걸 다 잃은 인생의 패배자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잃지 않은 '부자'였다.
닫힌 마음을 열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자
꽤 긍정적인 시그널들이 곳곳에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학창 시절을 보낸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는
내 모교인 신학초등학교 옆에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김수영' 선생님의 문학관이 있었고
내가 글을 집필하고 있는 강원도 원주시 매지리에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대하소설이라 칭송받는 『토지』를 쓰신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의 뮤지엄, 생가, 창작실이 있었다.
* 참고로 손흥민 선수의 모교도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소설가 김영하 선생님께서
내가 운영하는 루프탑 00 하루에 촬영차 방문을 하신 날.
그가 대중교통으로 왔다는 말을 듣고,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내가 차로 댁까지 바래다 드렸다.
김영하 작가님의 댁까지 향하는 차 안에서
약 30분 간 소설에 대해 단둘이 얘기할 수 있는 행운도 얻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에게서 응원과 칭찬과 격려를 받는 것은
이제 갓 '소설가 지망생'이 된 나에게 무척 큰 동기부여가 됐다.
이렇게 곳곳에서 긍정의 시그널들을 보며,
정확히는 볼 줄 알게 되면서.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된 나는
써둔 소설을 천천히 여유롭게 퇴고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고를 어느 정도 마친 어느 날이었다.
이제 소설을 출간할 출판사를 찾아야 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10년 전에
첫 책 『어쩌면 가능한 만남들』을 출간해줬던
웅진 리빙하우스의 박 대표님이었다.
나는 안부 인사를 핑계 차 전화를 했고, 박 대표님은 반갑게 맞아주셨다.
내가 먼저 시간 괜찮으시면 '근황 토크'겸 한번 뵙자고 말했다.
그렇게,
현재는 웅진 출판사에서 퇴사 후
새로운 출판사를 운영 중인 박 대표님과 10년 만에 만났다.
안부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내가 바로 소설을 보여드리자, 꽤 당황해하더니
"출간은 못 하겠다"는 답변을 했다. (1전 1패...)
본인이 수십 년 간 책을 만들었지만 그건 '인문서'와 '실용서'였고
소설 같은 '문학'은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곤란하다는 이유였다.
잔뜩 의기소침해진 나에게 그녀가 말했다.
"선기 씨, 그러지 말고. 장편 소설 쓰면서 손도 풀렸겠다,
이참에 차라리 그동안 실패했던 이야기들을 묶어서 글을 한 번 써볼래요?"
"실패했던 이야기를 요?" 내가 되물었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 잔뜩 부를 축적한 사람들
소위 '위너들'의 이야기만으로도 넘쳐났다.
누가 실패한 사람 따위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일까?....
"응, 선기 씨 입장에서는 아파서 꺼내기도 싫은 기억이겠지만,
도무지 한 청년이 혼자 경험했다기엔 너무나 다양한 경험을 했잖아요.
그 많은 실패와 성공들. 그 경험을 세상과 나눕시다. 분명히 의미 있는 글이 될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원주로 돌아와 곰곰이 생각을 한 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나를 위한 글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글이다.
가제는 『프로실패러의 이번에도 킹망했어』였다.
(이대로 냈으면 정말 킹망할뻔)
다시 미친 듯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완전히 새로운 글을 쓰는 것이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내 이름을 걸고, 내 이야기를 쓰자니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책임감과 압박감이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아니 XX, 이것도 내 잘못이었다고 해야 하나?' 싶은 부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글을 쓰기 전부터 글에 대한 기본 전제를
'시원하게 까발려보자. 어느 누구도 못 쓸 만큼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이라고 다짐한 마당에 뭐 부끄러울 일도 없었다.
최대한 담담하게 있는 그대로 써내려 갔다.
그리고 어느새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봄이 깊어갈 무렵,
드디어 지긋지긋했던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해제되었다.
초여름의 어느 날,
산책 삼아 모교에 갔다가 운동장을 가득 메운 학생들을 바라봤다.
운동장에서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젊음과 생기를 발산하는 학생들을 보니
그동안 '나만 피해를 입고 희생을 감수하고 있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갓 스무 살이 지난 친구들은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았을까.
그 젊음을, 그 에너지를 몇 년 간이나 억지로 억눌렀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까.
이 친구들만 힘들었을까?
시골에 계신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도시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으셔도 꾹 참으셔야 했다.
행여나 면역력이 약한 자신이 감염된 건 아닐까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부모들은 어땠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앞 카페나 식당조차 마음 편히 방문하지 못했다.
해외에 주재원으로 가 있는 한 친구는 배우자와 이제 갓 돌이 지난 아이가 보고 싶어
너무나 눈에 아른거려도 국경이 닫혀 꾹 참고 1년간 영상통화로 만족해야 했다.
오후 10시 이후 영업제한 조치가 한창이던 시기의 일이다.
집 근처 편의점 앞에서 본 광경은 나를 몹시 슬프게 만들었다.
(영업시간 제한 조치로) 10시가 넘었기에 파라솔 좌석도 이용하지 못하고
그 옆의 보도블록에 쭈그려 앉아 컵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던
택시 기사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누가 더 희생하고 누가 더 힘들었는지
굳이 비교하고 내세울 필요 없이
우리 모두가 긴 시간을 인내하고 희생하고 참아야 하는
그런 어려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 인고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평범했던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다시 나아가고 있었다.
봄부터 '실패'에 관해 써둔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와 다음 브런치, 몇몇 카페 등등에 조금씩 연재를 시작했다.
반응은 대체적으로 좋았다.
대부분의 회원, 네티즌들이
나의 진심(내 실패의 경험을 나누고 똑같은 실수와 실패를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공감했다.
조회수도 꽤 높았다.
여기저기에 올린 글을 모두 다 합쳐보니 누적 조회수가 100만을 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틈틈이 써둔 글을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고
원고를 조금씩 더 다듬으며 (이 시기에 연세대학교 미래 캠퍼스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지냈다.
다시 또 계절이 바뀌고,
여름이 왔다.
초여름이 끝나갈 무렵,
박 대표님이 출간 계약서를 가지고 찾아왔다.
10년 만의 출간 계약이었다.
나의 첫 번째 책과 두 번째 책이 모두 같은 대표님의 손을 거쳐 나오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무척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원고는 더 손 볼 것 없이 교정/교열/디자인만 하면 바로 출간이 가능한 상태였다.
6월 말
그렇게 계약서에 사인을 하자마자 출간 작업이 빠르게 이뤄졌다.
책 표지 콘셉트 시안들
책에 인용할 문구들을 고르는 마지막 작업.
(TMI)
나는 15년째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혹은 일상의 대화'에서
의미 있거나 독특하거나 크게 공감 간다고 생각하는 말이나 표현을 들으면
메모를 해뒀다가 엑셀 파일에 모아 해두고 있다.
지금은 약 8,000개 정도의 인용구, 표현, 단어들이 쌓여있다.
평생을 '작가'로서 살고 싶은 꿈이 생긴 나에게는 가장 큰 자산이다.
드디어 최종 표지 시안이 나왔다.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책의 제목은 '이번에도 킹 망했어~어쩌고~'가 아닌,
깔끔하게 '실패의 실력'으로 최종 결정됐다.
(그 외에 강력한 후보였던 또 다른 제목은 '참을 수 있는 실패의 가벼움'이었다)
책의 내지 디자인을 모두 마친 불과 얼마 전,
대표님과 둘이서 프린트해둔 본문을 펼쳐두고 이 잡듯이 원고를 뒤져
오탈자나 비문을 찾아내는 작업을 밤새 함께 했다.
그리고 파주에 위치한 한 인쇄소.
여기에서도 꽤 빵 터질만한 재미있는 일이 있었는데, 이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리고 책이 완성되었다.
내가 가장 못난 생각을 하고
스스로에게 가장 자신이 없었던 시기.
그 힘들었던 시기에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오히려 내가 경험한 '실패'와 친해질 수 있었다.
처음 써내려 갈 때는 '하아... 쪽팔리게 이런 것도 써야 하나?'
하던 마음이 책이 완성되는 시점에서는 정말 완전히 사라졌다.
유명인도 아니고
나 한 사람 따위 찰나의 쪽팔림이 무엇이 대수란 말인가.
지금 당장 실패를 겪고 있는 사람들,
이제 막 실패를 경험해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은 실패를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실패가 두려운 사람들,
그런 이들 모두가
나와 같은 시기에 동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 가족이고, 내 친구이고, 내가 사랑하는 이웃이다.
그들에게 눈곱만큼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2012년 봄과 2022년 가을
정확히 10년을 사이에 두고
한창 20대를 보내며 쓴 책(현재는 절판, 중고나라에도 없음)과
30대를 보내고 쓴 책 (2022년 9월 1일 출간, 서점에 있음)의 만남.
이렇게 남은 삶 동안 10년에 한 권씩
의미 있고 좋은 책을 꾸준히 쓸 수 있는 인생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나이 38살에 보증금도 없는 월세 20만 원짜리의
작은 원룸에서 집필한 글은 나를 살렸다.
나를 살린 글이, 또 다른 누군가도 살릴 수 있을지...
'성공, 경제적 자유, 부를 이루는 방법'
이런 허접한 문구 없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끌림) 가는 글이 될 수 있을지
새로 시작한 도전이 이제 시험대에 오르고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