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인 May 31. 2024

전쟁이 파괴하는 영혼

《나목》_박완서 (세계사, 2017)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마저도.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전쟁을 다룬 작품들, 영화나 글이나 그림을 보고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여기, 박완서의 《나목》도 그렇다. 얼마나 끔찍한지, 박완서의 문장들이 독자의 뼈를 때리는 듯하다. “검붉게 물든 홑청, 군데군데 고여 있는 검붉은 선혈, 여기저기 흩어진 고깃덩이들. 어떤 부분은 아직도 삶에 집착하는지 꿈틀꿈틀 단말마의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296쪽) 주인공인 경아 오빠들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렇게 아들 둘을 눈앞에서 폭격으로 잃은 경아 엄마는 이후 좀비처럼 살아가다가 병에 걸리는데, “무슨 복에 죽을 병이 들겠니?”(335쪽) 라며 얼른 죽지 못해 한탄한다. 누가 죽을 병을 복이라고 할까. 단 한 마디로 엄마의 참혹한 심경이 그대로 전해진다.      

21살인 경아는 엄마와 둘이 산다. 엄마에게 깊은 애증을 갖고 있다. 미군 PX에서 일하면서 또래의 젊은 태수를 알게 된다. 그런 한편으로 같은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화가인 유부남 옥희도와 사랑에 빠진다. 3각 관계의 불륜 멜로물처럼 전반부가 흘러가면서 일부 독자는 좀 지루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정수는 책의 후반부에서 두드러진다. 왜 경아가 엄마에게 그렇게 깊은 애증을 가지고 있는지, 왜 그렇게 신속하게 옥희도를 동경하게 되는지 비로소 독자는 그녀를 이해하게 되고 연민과 공감을 갖게 된다. “너무도 아득한 시간, 5년이나 10년쯤. 바로 산 너머쯤에 전쟁이 있는 이 살벌한 거리에서 5년이나 10년 후쯤을 꿈꾸다니 얼마나 미련한가 말이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아주 상식적이고도 완만한 궤도로부터 과감히 탈선해서 지름길로 삶의 재미난 것을 재빠르게 핥으며 가야 하는 것이다.”(107쪽)

꽤 긴 장편소설이지만 술술 읽힌다. 작가 박완서의 문장이 가지고 있는 힘 덕분이다. 사건과 사유가 잘 엮여서 독자들을 몰입시키고 이해시킨다. 전쟁이 던진 참혹한 모습을 묘사한 것은 단지 몇 장면이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독자들은 전쟁의 폐해를 절감할 수 있다.     

박완서는 40세에 이 소설로 여성동아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이후에 쉼 없이 작품을 발표한다. 2011년에 81세로 생을 떠날 때까지 장편 단편소설, 동화, 에세이 등 다양한 글을 썼다.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의 참화와 동족 간의 갈등, 그에 연루되는 가족의 고난을 여러 작품에 담아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나 《엄마의 말뚝》 등이 대표적이다.  소설 같지 않고 자전 에세이 같기도 하다.

《나목》도 비슷하다. 작가는 실제로 6.25 전쟁 중 미군의 PX에서 화가 박수근과 일했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전쟁 속 예술가가 겪는 생활과 심리를 주요 소재로 다루었다. 사실이 아니냐는 오해도 받았지만, 작가가 1976년 판 후기에서 밝히기를, 줄거리는 허구일 뿐이고 당시 참혹한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예술가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쉽게 느껴지는 점 두 가지. 경아는 안 지 얼마 안 된 젊은 남자 태수와 차를 마시며 그의 농을 듣더니, 아버지뻘의 유부남 옥희도와 술집에 가서 그의 품에 쉽사리 안긴다. 여자 쪽에서든 남자 쪽에서든 당황이 없다. 마음과 몸이 그리 쉽게 움직이나? 그 시대는 그랬구나 싶기도, 그 시대는 왜 그랬나 싶기도, 과연 그랬나 싶기도 하다. 이 또한 전쟁 때문일까. 일부 독자들은 시대 유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또 하나. 이 책이 쓰일 당시의 언어 쓰임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어를 그대로 쓴 부분이 꽤 보인다. 작가가 의지가 있었다면 우리말로 바꿀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 이 땅에서 전쟁이 끝난 지 70여 년이다. 불안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작품들을 보면, 전쟁 없는 세상을 바라는 염원이 더 커지지 않을까? 그렇게 바람과 힘을 모아서 함께 안전한 평화가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