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본 게 언제였을까. 고등학교 당시 권장도서였던 듯한데, 헤세의 청소년기를 다룬 자전적 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에 감동받고서 다른 책을 찾아보다 읽은 책이었다. 40년도 더 흐르고 나서 그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감동받았던 기억만은 잊히지 않았다. 이제 다시 읽어보니 그때와는 다른 성찰이 찾아온다. 어렸을 땐, 한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데 끌렸지만, 이제는 선과 악의 공존과 조화라는 점이 더 깊게 다가온다.
에밀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 허세를 부리다 어둠의 세계에서 괴롭힘을 당하지만 데미안을 만나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종교와 신에 대해 기존의 사고와 다른, 데미안의 새로운 시각을 접하고 싱클레어는 혼란에 빠진다. 이후 데미안과 헤어지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환락과 일탈에 빠지지만 거리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난 후 마음의 안정을 찾고 그림을 그리게 된다. 새의 그림을 그려서 데미안에게 보내고 답장인 쪽지를 받는데 이렇게 쓰여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암기하고 인용하는 구절이다. 나 또한 과거에 읽은 내용은 다 잊었지만 이 구절만은 당시에도 따로 적어서 갖고 다녔었고 기억에 새겨진 문장이었다. 이후 싱클레어는 이 아브락사스 신을 찾아다니면서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 나서게 된다.
이 책은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다. 헤세는 1877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목사인 아버지와 신학자 집안에서 자란 어머니의 영향으로 종교적이고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청소년기에 학교를 자퇴하고 자살 시도를 하기도 하는 등 방황한다. 그러다 문학수업을 받고 27세에 <피터 카멘친트>를 발표하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수레바퀴 아래서> <크눌프>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 등 많은 고전을 남겼으며 1946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1962년에 사망했다.
헤세는 동양과 서양, 예술가와 사상가, 은둔자와 세속인, 선과 악 등의 대립과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삶을 그리면서 인간 내면에 있는 양면성의 조화와 통일을 추구해왔다. <데미안>에서도 이런 자아탐구의 여정이 주요하게 그려진다.
<데미안>에서는 중요한 여성이 2명 등장한다. 베아트리체와 에바부인이다. 베아트리체를 거리에서 본 후 그 이미지만으로 싱클레어는 정신적 안정을 찾게 된다. 에바부인은 데미안의 어머니인데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데미안과 아프락사스와 동일하다. 헤세는 여성에게 연인과 어머니의 모습을 동시에 추구했는데 그의 첫 번째 부인은 9살 연상이었다. 그의 이런 성향이 <데미안>에서는 에바부인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정신적 어려움을 겪을 때 헤세는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칼 융에게서 치료를 받았다. 이때 칼 융에게서 들은 아프락사스의 이야기가 그에게는 구원이 되었다. 헤세는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곧 자기완성이라고 했다. <데미안>의 첫 문장은 “나는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코너스톤 출판, p11)이다. 그렇게 자아 탐구를 시작하는 싱클레어가 끝에는 데미안과 똑 닮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기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즉 독자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 궁금하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추상적인 묘사가 많고 상징도 많아서 요즘처럼 직관적이고 짧은 문장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에게도 호응을 받을지? 고전은 세대를 초월해서 전해지는 것이라지만 요즘의 세대 변화는 너무 커서 시대에 맞는 새로운 ‘데미안’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