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병옥 Feb 29. 2024

영화<아노말리사>-특이한 목소리를 듣고 싶다

'동일성의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

     

주변의 사람들이 옷과 머리모양만 다를 뿐, 같은 얼굴과 같은 목소리를 가진 동일인으로 느껴진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서비스 분야의 방법론의 대가인 마이클 스톤은 그 분야의 베스트셀러 책도 저술했고 여기저기 강연도 하러 다니는 유명인사이다. 신시내티에 강연하러 출장을 가는 동안 비행기 안과 공항에서 그는 얼굴과 목소리가 같은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피곤해한다. 택시 기사도 뻔한 말을 해서 그를 피곤하게 하고, 호텔의 벨보이도 판에 박힌 대사로 그를 질리게 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시내티에 와서 프레골리 호텔에 들어온 마이클은 결혼 전에 만났다가 그가 갑자기 이별을 통고해서 헤어진 애인 벨라가 생각나서 내일의 강연 연습에 집중할 수가 없다. 집에 전화를 하자 아내인 도나와 아들이 의례적으로 통화를 하는데 둘의 목소리는 같고 다 남성의 목소리이다. 충동적으로 벨라에게 전화를 하고 그녀를 호텔 술집으로 부른 그는 벨라의 왜 떠났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녀는 화가 나서 가버린다. 벨라의 목소리 역시 남성의 목소리이다.


다시 룸으로 돌아와 있을 때 복도 어디선가 하이 피치의 아름다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는 황급히 밖으로 나가보지만 찾을 수 없자 방마다 두드리고 다니며 목소리의 임자를 찾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어떤 방에서 묵는 두 여성 친구 중 리사라는 여자가 그 여자임을 알게 되고 둘을 술 한잔 하자며 로비의 술집으로 초대해서 대화한다.

다시 룸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그는 리사에게 자신의 방에서 대화를 더 나누자고 부탁한다. 리사는 늘 인기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친구였다며 의아해하지만, 수줍게 그의 방으로 따라온다. 그녀는 제과 회사의 고객 서비스실 전화 상담실 팀장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그의 저서 ‘고객을 대하는 방법’을 읽고 생산성이 많이 향상되었다며 그의 강연을 들으러 멀리서 왔다고 한다.

그녀가 가진 마법의 목소리에 매혹된 마이클은 계속 그녀에게 대화를 시키며 감동하고 나중에는 신디 로퍼의 노래를 들려달라고 부탁하고 리사는 노래를 부른다. 오른쪽 눈썹 위에 있는 흉터 때문에 머리를 내려서 가리고 다니고 오랫동안 남자친구가 없었던 리사는 마이클의 칭찬이 어리둥절하지만 진심으로 기쁘다. 그는 그녀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고, 변칙이라는 의미를 가진 ‘anomaly’와 그녀의 이름 ‘Lisa’를 합쳐 ‘Anomalisa’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로 한다.


끝없이 대화하던 둘은 뜨겁게 사랑을 하고 같이 잠이 드는데, 꿈속에서 마이클이 호텔 지하에 내려가자 비현실적으로 큰 사무실에 남자 매니저가 앉아있고 그는 마이클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다른 여성이면 모르지만 절대로 리사와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한다. 겨우 도망친 마이클의 얼굴 가면이 떨어지고 다시 주워서 붙인 뒤 방으로 돌아와 리사를 잃고 싶지 않다며 그녀를 피신시키겠다고 한다. 그는 리사에게 사람들은 사실 모두 같은 사람이고 다들 그를 좋아한다고 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다른 사람은 오직 리사뿐이고 그래서 리사와 인생을 함께 하고 싶다고 한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리사와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잠이 깨고 같이 아침을 맞이한 둘은 룸서비스를 시켜 식사를 하게 되는데, 스크램블드 에그를 먹는 리사가 계속 포크를 이에 부딪치자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음식을 입에 물고 말을 하는 리사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리사는 어제와는 달리 택시 기사가 이야기했던 뻔한 유명관광지 이야기를 하고, 갑자기 그녀가 말하는 목소리에 남성의 목소리가 겹쳐서 이중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마이클은 리사를 두고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와 아들이 남자의 목소리로 그를 맞고 집안에는 같은 얼굴과 같은 목소리를 한 친지들이 모여서 그를 환영하지만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고, 그는 절망하며 계단에 주저앉는다.

          



영화에 나오는 호텔 이름이 ‘프레골리’인데, 이는 실제 이탈리아의 배우의 이름으로 그는 연극에서 빠르게 변장한 뒤 다른 인물로 나오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신 의학에서는 자신이 보는 여러 사람을 옷만 바꿔 입은 동일인으로 잘못 인식하는 망상을 '프레골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이미 호텔 이름에서 주인공이 처한 정신적 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주인공 마이클이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다 똑같게 인식하는 증상이 일종의 정신 질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마이클의 증상은 확대해 보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현대인이 겪는 권태의 비유이다. 현대인들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기시감이 드는 상황과 예상이 되는 반응이 지겹다. 마이클이 쓴 책에 나온 그대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상용구를 외워서 말할 때, 그는 당연히 그들이 무슨 멘트를 할지 예상할 수 있고 그것이 지겨움을 유발한다. 그들은 마이클이 만들어준 가면을 쓴 사람들이다. 따라서 얼굴과 말 내용과 목소리가 똑같은 로봇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 영화는 극한의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인형을 만들고 동작을 바꾸어가며 1초에 24번을 찍어서 만드는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방식을 선택했다.


보통 우리도 세일즈 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말투를 들을 때 이상한 기분을 느끼는데, 영화에서는 이것을 확대해서 주인공 마이클의 목소리, 여성 리사의 목소리, 그 외 인물은 모두 한 남성의 목소리로 딱 세 명의 목소리만 나온다.

주인공은 같은 목소리만 듣는 것을 참을 수 없어한다. 그는 한병철이 그의 저서 ‘타자의 추방’에서 이야기했던 ‘동일성의 지옥’을 경험하는 것이다. 한병철도 지적했듯이, 마이클의 주변 인물들은 마이클 자신의 말을 동어반복한다.     

이때 특이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고 마이클은 이 마법의 목소리에 빠진다. 대화할 때, 노래할 때 듣는 그녀의 특이한 목소리는 그를 살아있게 만든다. 그에게 숨결을 불어넣는 그녀는 그의 마음속 아니마이다. 그는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 그는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마음속 다른 요소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친다. 꿈속에 나타난 페르소나(꿈속의 매니저)는 안정된 구조를 해치는 새로운 부분의 영입을 방해한다. 특이한 리사만은 절대 안 된다고 한다.

그 후 리사도 마이클에게 똑같게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한계를 넘지 못하고 마이클은 리사를 버리고 도망쳐서 노멀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이전에도 벨라를 버리고 도망쳤었다. 아내 도나도 처음에는 사랑했으나 결국 같은 목소리를 가진 운명이 되었다. 그는 리사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마이클은 이전의 그가 아니다. 이미 출장에서 리사의 목소리를 경험한 것이다. 아노말리사는 일본어로는 천국의 여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를 지옥에서 구출해서 천국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리사인 것이다.

마음속 아니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의 영혼은 황폐해진다. 계단에 주저앉은 그가 다시  살아나려면 빨리 리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전 06화 영화<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사랑을 찾아 헤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