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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Oct 21. 2024

시간을 담은 건축- 제주 '수풍석 뮤지엄'

다큐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

수 미술관, 제주

제주도에 여러 번 갔었다.

신혼여행을 필두로, 대가족이 함께 피서 여행을 가기도 하고, 아들들이 성장하고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 가족여행으로 가기도 했다. 부부만 갈 때도 어떤 때는 자연을 주제로 돌아볼 때도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건축을 주제로 돌아볼 때도 있었다.

나이 들어, 오래된 친구들과 제주를 가게 되었을 때 예전부터 가고 싶었던 이타미 준의 ‘수풍석 뮤지엄’을 어렵게 예약하여 갈 수 있었다.

다시 해가 지나고 다큐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를 보며 그때 미술관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떠올리며 이 글을 정리하게 되었다.

     

영화는 수풍석 미술관 외에도 건축가 이타미 준의 인생과 그의 다른 작품도 많이 소개한다.

또 본명 유동룡인 그가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라면서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가 자란 일본에서 활동하며 어려웠던 이야기와, 방황으로 어두웠던 내면까지 보여준다.

그의 여러 작품 중 일본 도쿄에 있는 ‘먹의 공간’이 특히 나의 관심을 끌었다. 건축 부지 앞의 두 그루의 오래된 벚나무를 자를 수 없어서 애초의 설계를 변경하여 건물의 파사드를 대나무로 바꾸고 벚나무를 살린 그의 건축은 거의 예술 작품처럼 보인다. 교토에서 공수했다는 대나무는 초기에는 초록색을 띄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갈색으로, 나중에는 거의 검은색으로 변화한다. 자신도 건축가인 그의 딸이 시간에 취약한 대나무를 자재로 쓴 이유에 대해 질문하자, 아버지는 건축은 시간에 따라 다른 맛을 주는 작품이라고 하며 모든 건축이 결국은 폐허가 될 운명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시간이 가면서 대나무가 색도 변하고 비와 바람에 의해 세로로 갈라지면서 나중에는 대나무가 발처럼 가느다랗게 쪼개질 때를 기대한다. 봄밤에 벚꽃이 만발했을 때 찍은 이 건축의 사진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아름답다. 하얀 벚꽃과 배경의 대나무들이 대조를 이룬다.

먹의 공간, 도쿄


    

제주의 ‘방주교회’는 굳이 일본에 가지 않고도 제주도에 여행하는 동안 쉽게 볼 수 있는 건축이다. 영화를 보니 설계는 아버지가, 시공은 건축가 딸인 유이화 씨가 맡은 합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을 했었다. 물에 떠 있는 방주라는 생각 자체가 신의 구원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고, 뱃머리의 창에 어린 구름의 형상이 인류가 희망을 찾아가는 상상을 하게 한다. 실제로 배의 앞부분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거기에 삼각형으로 조각난 타일들을 모아 만든 배(교회)의 지붕에서 제각기 반사하는 빛들의 향연을 보면, 신이 여전히 인간에게 복을 내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방주교회, 제주


     

제주라는 섬의 기본인, 물을 기본으로 하는 ‘수 미술관’은 하늘에서의 뷰를 보면 마치 큰 대야 모양의 타원형 수조이다. 지면에서 보면 높지 않지만, 비탈을 그대로 살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반대편 입구 쪽은 한층 아래인 구조이다. 돌아서 들어가면 둥근 대야 모양으로 잘린 하늘이 보이고 자갈이 깔린 얕은 물이 고여있다. 그 물에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이 담긴다. 영화는 이곳을 하루종일 저속 촬영해서 빛의 경로를 보여준다. 벽에 마치 물고기 모양같은 빛의 형상이 어리는데 이것이 태양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다가 저녁이 되면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맑은 날 방문했었고 파란 하늘이 너무도 예뻤지만, 영화 속 비가 오는 장면을 보니 그또한  장관이다. 고속 촬영으로 보여주는, 천천히 떨어지는 빗방울이 수조의 물과 만나는 장면과 그때 내는 소리가 마치 물방울들이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것 같다. 눈 내리는 겨울날의 장면도 비현실적으로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친구들과 수 미술관에서

     

제주의 또 다른 특징인 바람을 보여주는 ‘풍 미술관’은 바람을 시각화할 수 있는 억새와 풀이 많이 있는,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 자리 잡았다. 멀리서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풀밭 저편에 미술관이 서 있다. 건축 자재도 바람이 통하지 않는 막힌 벽이 아니라 길고 좁은 나무판자를 틈을 두고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나무로 붙여 만든 벽이라 바람이 술술 통과하는 집이다. 공기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와 빛도 통과한다. 문조차 없는 집 안으로 들어오면 모든 것이 안과 밖으로 드나든다. 굳건한 벽을 세워서 들어오는 것들을 막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틈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들어온 빛은 집안을 하루종일 여행한다. 영화는 이 빗살무늬의 빛과 그림자의 여정을 보여준다.

풍 미술관, 제주


     

마지막으로 제주에 지천인 돌을 주제로 한 ‘석 미술관’이 있다. 돌이 주제라고 하지만 집의 재료는 금속이다. 이것도 역시 시간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반짝이는 금속의 외벽이었다가 비와 바람을 맞으며 산화해서 붉은색으로 변했다. 변화를보면서 사람들은 더 긴 시간이 지났을 때 이 건물이 어떤 폐허가 될지를 상상하게 된다. 지붕에는 원통형 창이 있고 그것을 통해 들어온 빛은 하트 모양을 이루고 하루종일 방 안에서 여행한다. 벽의 아랫부분 가로로 길쭉한 창밖으로 역시 가로로 긴 바위가 놓여있다. 그것을 관조하노라면 오래된 돌과 인간의 짧은 생이 대조되며 겸손해진다. 그러나 인간도 건축도 바위도 결국은 소멸한다. 남은 건 돌아다니는 빛뿐이다.

 

석 미술관, 제주

    

친구들과 함께 본 ‘수뮤지엄’은 너무 인상적이었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도 꼭 감상하시기를 권유한다. 그 당시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영화를 보며 다큐를 제작한 분들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보통 어떤 작품을 감상하는 건 대부분 1회성 경험일 경우가 많다. 마니아라고 해도 모든 일을 떨치고 거기에 엄청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갔던 때가 가장 좋았을 때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맑으면 맑아서,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봄이면 봄이어서, 겨울이면 겨울이어서 좋은 것이다.

그러나 책을 보며 수년간 노력한 작가의 땀 덕분에 태어난 걸작을 몇 시간 만에 들여다보는 것처럼, 7년간 영화를 찍느라 고생하신 분들 덕분에 영화를 보는 몇시간동안 세세한 경험을 다시 맛볼 수 있었다.

내가 간 계절뿐 아니라 모든 계절의 풍경을 볼 수 있었고, 나는 몇십 분만 머무를 수 있었던 공간의 하루를 저속 촬영으로 내내 보여주어서 빛과 그림자의 여행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통해 긴 과정 중의 한순간에 불과했던 나의 경험을 확대할 수 있었다.

때로는 고속 촬영으로 만든 슬로 비디오로 순간을 늘려주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에서는 시간을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며 우리의 경험을 확장해 준다.

    

영화를 통해 일본에서는 조센징으로, 한국에서는 재일 교포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예술가 이타미 준이 평생에 걸쳐 남긴 훌륭한 작품을 감상하며 그의 고국에 대한 사랑, 건축에 대한 철학, 건축 재료에 대한 애정 등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말년에 뜻이 맞는 건축주를 만나 고국 제주에서 자신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역사를 초월하고 그의 우주를 발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에 '시간'을 담은 건축가 이타미 준을 기리며, 많은 사람들이 여행과 영화를 통해 그의 인생과 작품들을 감상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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