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피곤해서 9시쯤 잤다가 일어나니 5시였다. 여름의 끝무렵에서 계절이 변해가는 걸 보여주듯이 해는 여전히 떠오르지 않은 채 어둠만이 커튼으로 가리지 않은 하늘의 풍경을 덮고 있었고, 전날 제대로 닫지 않은 창문 틈새 사이로 흘러들어온 새벽 공기의 한기에 짓눌려 이불을 온몸에 두른 채 도망간 졸음을 어떻게든 끌고 온 채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아침 9시쯤 다시 일어나니, 분명 피곤함은 싹 가신 상태였다. 그러나 온기가 없어 파르르 떨리는 팔뚝이 그 어떤 것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게, 결국 집에서 동아리 면접 준비를 한다는 핑곗거리를 스스로에게 대며 또다시 강의에 빠지기로 하고, 그렇게 베개 옆에다가 시사 유튜브와 롤토체스 구루루 영상을 틀어놓은 채 또다시 잠깐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갑자기 전화가 왔는데, 리서치를 하러 도서관까지 걸어가던 친구가 심심하다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원래도 연락은 자주 하다가도 전화를 할 일은 별로 없었는데, 최근 둘이서 롤토체스를 하면서 소통을 가장한 전화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곳과 시차가 3시간씩 나는 뉴욕에서 벌써 점심시간을 지나 이른 오후에 접어든 그에 반해 나는 아침을 지나 오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도 여전히 쌓여있는 일들의 무게에 도망치려고 하는 마음에 익숙해진 건지, 고작 아침 이불 밖 추위 따위에 하루의 시작을 고민하는 태평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세세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데, 그가 뜬금없이 우리 나이대에선 한심하지 않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한 것만큼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그가 말한 한심해지지 않기 위한 조조건, 나름대로의 삶의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고, 의미 있는 첫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 비싼 등록금을 다니면서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이들에게 찾아오는 그맘때의 공통적인 과제인데, 나에게 너무나도 어렵게 다가오는 그 과제는 매일을 고민으로 채운다.
사실 그가 스스로 한심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던 게,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고등학교 면접 대기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공부라던가 커리어를 쌓아나가던가 하는 인생의 길을 닦아나가는 데 있어서 그런 것들과는 자석의 같은 극을 이루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그가 한심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을 들으니 그의 고민에 관한 호기심이 떠오르는 동시에 역으로 나에게 매 순간 바늘이 모공을 정확하게 찌르는 듯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러자 아침에 일어난 순간 몇 시간 동안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침대 밖을 나가는 행위가, 그의 몇 마디를 듣고 난 후에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 되어버렸다. 아니 쉬워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린 걸까. 그동안 이불 밖에서 나를 누르던 추위와 피로감의 압력이, 마치 한 순간 진공 상태라도 된 듯이 가벼워졌는데 그가 걱정하는 한심함의 기준에 내가 더 가까운 것 같다는 위기의식이 무게를 덜어준 걸까.
원래보다 늦게 일어나긴 했지만, 그렇게 시작한 하루동안 나름 7시간 동안 공부를 했다. 이전에 제대로 못 끝낸 일들을 뒤늦게 처리하느라 그렇기도 했고, 전날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머리를 자른 후 일찍 집에 돌아가 아무것도 안 한 탓에 평균적으로는 부족한 걸 채웠을 뿐이지만, 그가 던진 한심함이라는, 나에게 일종의 경고처럼 다가온 단어는 열심히 달리겠다고 선언한 채 어딘가 빈틈으로 가득 찬 나의 행동을 깊게 아리게 하는 울림이었다. 오늘 하루를 한심하지 보내지 않는 것, 모든 날들이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최소한 학기 중에는 이어나가서 나쁠 게 없는 태도인 것 같은데, 그의 말마따나 나의 하루도 계속해서 한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기준과 그걸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 의식하지 않은 사이 찾아와 버렸다는 사실을 체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