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누군가 내 종이 위에다가 몇 문장 남짓한 글귀를 남겼다. 글자는 작지만 사이사이 간격이 커 한 줄에 많은 글자가 들어가진 않았는데, 나름 아기자기한 글씨체에 가독성을 더하는 적절한 간격을 가진 그녀의 글씨체를 보고선 편지 쓰기 좋은 글씨체라고 말해주면서 그와 달리 평소에 한 장 안에 밀도 높은 내용들을 담아내야 해 자연스럽게 빽빽하게 쓸 수밖에 없는 내 글씨는 읽기 힘들다는 고민 아닌 고민을 공유했다.
글씨체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글을 쓰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생 때 시험기간이 되면 엄마의 감시 아래 공부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옆에서 구경하던 엄마는 내가 연필을 쥔 모습을 보고는 그렇게 쓰면 안 된다며 핀잔을 주곤 했고, 나중에는 교정에 필요한 연필에 끼우는 홈이 파인 고무 같은 것도 쓰게 했다. 그러나 정석이라고 부르는 그 자세가 너무 불편했던 난 엄마가 안 볼 때마다 몰래 뺀 채 쓰곤 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원래 하던 방식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엔 중학생 때, 좋아하던 여자애가 내 노트를 빼곡히 채운 글자들을 보면서 나처럼 필기구를 쥐면 글씨를 작게 쓸 수가 없는데, 검지와 중지로 세밀한 컨트롤이 가능한 일반적인 방식과 달리 모든 손가락으로 움켜쥐는 듯한 나의 방식은 저절로 글씨가 커지는 탓에 예쁘게 쓸 수 없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나에게 예쁜 글씨의 기준 중 하나는 우선 작게 쓸 수 있는가가 됐다. 실제로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게, 내가 가장 못 쓰는 글자가 ㄹ과 ㅂ이다. 여러 번 방향을 꺾어야 하는 글자들. 그런데 그렇다고 뭐 어떡하냐. 내가 나를 좋아하지 않던 그녀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듯이 무심코 던진 그녀의 지적도 10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 내가 글씨체를 바라보는 시선에만 영향을 줬을 뿐, 내 글씨체 자체를 바꾸진 못했다. 그러나 그 한 마디가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박혀, 누군가 내 글씨체를 두고 확실히 많이 쓴 사람답게 예쁘다고 칭찬을 해와도 잠깐 기분이 좋다가 그때를 떠올리며 금방 아니라고 부정하곤 한다.
어쩌면 난 누군가 내 글씨체를 두고 별로라고 이야기하기를 기대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군 생활 중 가장 친한 동기가 내 글씨체를 보고 글자 사이 간격이 너무 좁아 읽기가 너무 힘들다고 까고는 했는데, 글씨체에 대한 나의 고민과 더불어 이제는 정말 변화를 맞이할 때가 됐나 싶어 휴가 때 2주 동안 다니려고 동네에 있던 글쓰기 교정 센터에다가 문의를 넣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2달 동안이나 다녀야 할뿐더러 학원비도 60만 원이나 돼 결국 돈도 아낄 겸 혼자서 바꿔보기로 했고 하루 20분 정도 빈 종이에 적는 연습을 했지만, 그런 결심이 얼마나 가냐는 듯 혼자 하던 연습은 2주도 안 돼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하자는 결론으로 귀결됐다.
그러나 내가 하던 대로 하자는 결심과는 별개로, 글씨체에 관한 고민은 여전히 가끔씩 떠오른다. 여전히 펜을 쥐는 방식 때문에 글을 다 쓰고 나면 절로 손에 힘이 풀리고, 글자 사이사이에 다른 게 들어설 공간이랄 것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가 있는 글자들을 읽을 때마다 숨이 막힐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응집력이라는 말로 좋게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새로운 타인이 들어서기 힘든 나의 삶을 비유하는 듯한 저 글자들을 보고 있으면 고치지 못하는 문제에 짜증스러운 고민만이 더해진다. 하나하나 쌓여가는 종이들에 적힌 흑연 자국들을 눈으로 직접 볼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최소한 그걸 위해 내가 쏟아낸 시간보다는 훨씬 적겠지만, 글의 내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텍스트가 표현되는 시각적인 방식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가늠만 해도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고칠 수 없는 글씨체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마주하는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보다 적당히 안은 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전부 맘에 들지는 않지만, 적당히 글을 쓴 후 읽는데 불편함은 없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