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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쓰는 복학생 Dec 04. 2023

그녀를 만났다

그것도 8년 만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784는 28의 제곱이다. 784에 9를 곱하면 7056이 되고, 또 9를 곱하면 252의 제곱인 63504가 된다. 그리고 이 숫자를 21의 제곱으로 나누면 144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중학생 때부터 반쯤은 버릇으로 머릿속으로 소인수에 7이 들어가는 숫자의 계산에 대해 거의 10년 가까이 생각해왔는데, 무의식적으로 생각 속에서 굴려놓기만 하던 수많은 계산 과정의 시작이 언제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들 그럴지도 모르지만, 난 스스로 기억력이 꽤나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능력을 암기에도 좀 잘 활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맥락 기억이라는 말이 있듯이 수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조금의 단서와 함께 떠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맥락도 떠올리지 못하게 되면서 사라지는 기억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사실을 요즘 체감하고 있지만, 정말 오랜만에 만난,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을 만난 건, 돌아오지 않는 과거의 시간 속에 묻혀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 마주하게 했다.


중학교 친한 친구와 만날 때마다 소식을 전해줘서 뭘 하고 사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에 시달리다 보니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기억에 파묻힌 사람에 대한 관심은 지속될 수 없기 마련이고, 어차피 다시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을 거라는 확신 속에, 그녀는 나의 기억의 파편 속에만 담겨 있는 가상의 존재로 남아 왔고, 그렇게 받아듣는 소식들도 명절날 가족들끼리 모여 보는 뉴스 내용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는 했다. 어쩌면 미국에 온 이후로 한 번 궁금해서 그녀에게 인스타그램 팔로우 요청을 보냈던 순간부터 잔잔했던 물결이 파도로 이어졌던 걸지도 모르겠다.


연휴를 보내려 뉴욕에 왔다. 몇 달 전부터 추수감사절에 친구들끼리 모이자고 미대륙 반대편에 있는 나를 부르는 끈질긴 요청에(그땐 그다지 간절하지 않은 조연 역할을 위해 이렇게까지 끈질겨야 하나 원망스러웠지만, 지금 돌아보면 어느 정도 고마움을 느낀다) 반쯤 끌려온 별로 내키지 않은 여행이어서 이전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장소들 중에 인상 깊다고 생각했던 곳을 제외하면 딱히 갈 곳도 생각해두지 않았다. 어차피 술 열심히 마시다가 오후가 다 돼서야 늦게 일어나서 잠깐 돌아다니고 또 밥 먹고, 숙소 돌아와서 술 마시는 시간을 반복하면서 연휴의 산뜻함이라는 건 그다지 못 느끼고 그냥 버클리에 남아있을 걸 하는 후회만 남긴 채 돌아가는 비행기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망상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같이 술을 마시며 모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를 보냈지만, 그거 하나만으로는 내가 뉴욕에 와야만 했던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지는 않았는데, 다행히도 그게 현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느끼게 하진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긴 시간 동안의 휴식을 갈망했던 나에게 5일 가까이 되는 추수감사절 연휴는 쉼 없이 돌아가기만 하는 쳇바퀴 위에서 어지러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 찾아온 소중한 휴식 시간이었으니까. 여행 동안 뭔가 새로운 걸 해야 한다는 강박 따윈 버리고 온지라 그냥 수동적으로 구글맵 열심히 보면서 길 찾는 친구들 따라다니면서 인스타 스토리 태그 하면 같이 공유해 주고, 뭐 먹자고 하면 가서 맛있게 먹어주고, 토크 참여하라고 잔소리하면 참여하고, 하루 만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우리들의 시간 속 나에게 기대받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인스타 스토리에 올린 브루클린 브릿지 사진에 달린 그녀의 좋아요를 봤을 때, 왠지 모르게 예상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편안하게만 흘러가고 있던 여행에 어딘가 새로운 변수가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사실 예전에 설마 받아주겠어 싶은 생각으로 보냈던 팔로우를 받았던 거에도 의아함을 느꼈긴 했는데, 과도한 망상은 인생에 해롭기에 뉴요커가 여행자에게 보내는 형식적인 반응이라고 치부하고 넘겼다.


수요일과 비슷하게 목요일도 친구들끼리 숙소로 돌아와 술을 마셨는데, 원래 술을 정말 못 받는데 애들 페이스를 따라가다가 정말 오랜만에 완전히 취해서 어지러움에 잠깐 소파에 눕자마자 곧바로 쓰러졌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아래층 침대에서 눈을 떴고, 집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이름을 불러봤지만 돌아온 건 침묵뿐이었고 그제야 첫날부터 노래를 부르던 클럽에 가려고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정확히 언제 필름이 끊겼던 건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2-3시간 이상 잠들어있던 건 분명했다. 아까 전에는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던 심장 박동이 안정을 되찾았고, 두통도 어느 정도는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게다가 취한 덕에 별로 내키지 않던 클럽도 자연스럽게 면제? 하고 싶은 건 실컷 하고 하기 싫은 건 안 하는 이상적인 여행의 그림이 완성되어가고 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언제쯤에 돌아오려나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켰는데, 카톡으로 보낸다는 걸 주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DM을 확인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에게 메시지가 와있었고, 순간 놀라 ‘이 사람이 나한테 이런 문자를 보낼 리가 없는데, 아직 내가 술을 덜 깰 건가’ 싶어 다시 제대로 봐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이게 진짜라는 걸 깨닫자마자 잠깐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어떤 내용이 온 건지, 뭐라고 답해야 할지 유심히 고민했다. 마침 그때 추수감사절이라 클럽이 닫은 탓에 애들이 일찍 돌아왔고, 전부 잠자리에 든 이후 혼자 거실에 나와 여행에 대한 글을 쓰면서 어떻게 답할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처음에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론은 금방 났다. 다른 애들이 먼저 떠나고, 뉴욕 사는 친구와 나만 남는 토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았는데, 여행 전에는 상상조차 못한, 당장 내일로 다가온 그녀와의 만남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거진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마주친 적도 딱히 없는, 오히려 처음 만나는 사람들보다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그녀와의 만남이 어떨지 좀처럼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친구를 통해 전해 들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 지 얼마 안 돼 미국으로 편입해 뉴욕으로 갔다는 것뿐이었으니까. 내가 아는 거라고는 과거의 그녀에 대한 기억뿐인지라,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만나 새로운 사실들에 열려있을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보다도 어렵겠다는 걱정이 밀려왔다. 지금 와서 보면 아무 의미 없는 기우였지만.


이제 와 고백하자면 원래 25일까지로 예정되어 있었던 뉴욕 여행에서 혼자 26일에 돌아가기로 한 건 온전한 실수였다. 정말 별생각 없이 떠난 여행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그냥 싼 비행 편을 찾으면서 고르다가 무심코 26일에 떠나는 항공편을 예매했고, 그게 애들 일정과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건 뉴욕에서 친구들을 만난 후 돌아가는 일정을 공유할 때였으니까. 박약한 의지, 그에 맞는 허술한 계획 때문에 생긴 빈틈 덕분에 우연한 만남을 위한 공간이 생겼는데, 처음엔 하루라도 혼자 다닐 수 있는 날이 있다는 안도감이 들다가, 그녀와 약속을 잡은 이후에는 뭔가 여행 중 의무가 하나 생긴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딱히 그런 걸 느낄 이유는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습관적으로 새로운, 특히 예상하지 못한 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다닌다.


어쨌든 토요일 오후 5시 반에 K-타운에 있는 북창동 순두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먼저 가기로 한 친구들과 헤어진 후 혼자 뉴욕을 돌아다녔다. 11시 넘어 늦게 나오긴 했지만 9/11 메모리얼에서 추모 박물관까지 가 꽤 오랫동안 있던 탓에 처음에 세운 계획대로 미술관 한곳까지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센트럴 파크 바로 옆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도착했을 때가 딱 오후 3시 반이었는데, 보통 미술관에서 2-3시간은 있으니까 지금 들어가면 다 못 보고 도중에 나와야 할 게 분명해 나중을 기약한 채 센트럴 파크를 가로질러 타임 스퀘어로 향했고, 전날에 구경만 하다가 넘어간 바지를 산 후 곧장 약속 장소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에게 실례일 것 같다는 생각에 일부러 15분 정도 일찍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마침 문자로 10분 정도 늦게 도착할 것 같다는 연락에 여유가 생겨 전날에 갔던 고려 서적에서 책 구경을 했다. 우리 학교 East Asian Library에도 한국어 책이 엄청 많이 있지만 정작 책을 읽으러 가지는 않는데, 서점에서 한 권에 최소 $20에서 비싸면 $70까지도 호가하는 책들을 보면서 미국에서 학교 다니면서 무료로 읽을 수 있을 때 도서관을 자주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가 탓일 수도 있겠지만 책값이 상상 이상으로 비싸서 상대적으로 한국에 있는 책들이 혜자처럼 느껴진다. 왜 요즘 사람들이 뭐만 하면 책 내려고 하는지 알겠네. 예전에 비해 줄어든 수요량을 높아진 가격으로 메꾸는 걸까.


비록 비싸기는 했지만, 버클리에서 박완서 책을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 $30 가까이하는 <나목> 한 권을 집어갔다. 아마 이것도 읽히지 않은 채 서랍 안에 쌓여가기만 하는 수많은 책들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시간이 많을 때는 책 생각이 안 나고, 책 생각이 날 때는 다른 걸 해야 하고. 무조건 무언가 하나를 포기해야만 하지만 포기하는 것들 중에 포함되지 않은 내 독서습관이, 군 시절과 비교해서는 많이 약해진 것 같아 아쉬움이 들었다.


그렇게 약속시간이 돼서 식당 앞으로 갔는데, 꽤나 길게 늘어진 줄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냥 말 안 하고 (나름 센스 있게) 먼저 예약을 해놓을까, 아니면 그냥 올 때까지 기다릴까. 이렇게 보면 어떤 게 더 나은 행동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것부터 그녀와 나의 관계가 그다지 가깝지 않다는 걸 방증한다. 그렇다고 이제 와 다른 식당을 찾기에는 어차피 이 시간대에 줄 안 서야 하는 곳은 찾기 힘들 것 같아 먼저 안에 들어가 예약을 했다.


다행히 두 명은 자리가 금방 났는데, 문제는 일행이 오기 전에는 못 들어갈 수가 없어서 뻘쭘하게 서있는 와중에 구석에 놔둔 캐리어를 가져가는 사람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빨리 오라고 보채기는 좀 그래서 그냥 핸드폰이나 보면서 만날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런 점에서 약속 시간을 미뤄준 게 오히려 고마웠달까. 어딘가 부담스럽게만 여겨지는 누군가와의 만남을 앞둔 상황에서 숨을 고를 수 있는 틈을 준 거니까.


몇 분쯤 지나 유리문을 통해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을 봤을 때, 비로소 어딘가 예상치 못해 좀처럼 그려지지 않던 상황들이 비로소 현실이라는 분명한 형태를 갖췄음을 자각했다. 자세히 보니 옛날에 비해 키가 엄청 컸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기억 속의 데이터와는 완전히 상반된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기억 속에 활엽수림이었던 곳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찾아갔을 때 침엽수림으로 바뀐 듯한 반전을 가져다줬다. 만약 얼굴이라는 형태가 아니었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 그녀를 보자마자 내가 건넸던 첫 번째 질문도 " 야 너 목소리가 왜 이렇게 변했냐?"였다.


지금 돌아보면 그녀와의 대화에서 어떤 일정한 흐름 같은 건 없었다. 원래 내가 대화하는 스타일이 조금 그렇긴 한데(군 생활 때 탄약고 초소 근무를 설 때 2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던지라 계속하다 보니 이런 쪽으로 완전히 굳어져 버렸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는지, 어쩌다가 미국으로 유학 온 건지, 학교 다니면서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등 형식적인 것들뿐 아니라 정말 사소하고 쓸데없지만 재밌는 것들, 예를 들어 여행하면서 느낀 캘리포니아와(라고 하기에는 베이 에어리어랑 LA만 가봤지만) 뉴욕의 차이, 유학생이 되고 난 후 특히 더 공감이 되던 두바이에서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 이야기, 재밌게 읽은 책 추천, 전날 있었던 해프닝 같은 것들도 얘기하니 6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오랜만에 한 대화 속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라면, 도중에 미국으로 편입하는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하는 높은 목표 의식과, 그만큼 엄청나게 열심히 산다는 거였는데,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평소에도 작업에 엄청난 시간을 쏟으면서 내내 일 생각만 한다는 것만 들어봐도, 이제야 미국에 온 지 3개월 된 나와는 달리 훨씬 치밀하고 치열하게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신감까지... 내가 갖춰나가야 하는 것들을 이미 충분히 갖고 있는 듯한 모습에 뭐든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안일하게 살아온 지난날의 시간을 저절로 반성하게 됐다.


만난 후 시간이 좀 지나 써서 전부 기억나지는 않는데, 하나 덧붙여보자면 식당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포장해 가는, 일반적인 행동에 감명을 받았는데, 미국에 온 이후로 음식량이 많으면 다 먹거나 버리곤 했는데, 알지만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던 제3의 선택지가 조금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 양이 많으면 두 끼로 나눠서 먹으면 되는구나. 이토록 간단한 걸 여태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거지' 나보다 훨씬 오래된 유학 생활을 통해 알뜰하게 살기 위한 삶의 지혜를 갖춘 듯해 많이 부러웠달까. 이렇게 보면 지혜라는 게 뭐 복잡하고 어려운 게 아니라 일상 속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사고의 전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틀에 갇힌 행동과 생각을 반복하는 나로서는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신기하게 느껴진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처음에는 적당히 사리면서 별로 익숙하지 않은 가식까지 부렸던 것 같은데, 점점 대화가 자연스러워지면서 긴장이 풀리니 너무 투명하게 속을 다 내보인 것 같기도 하다. 생각보다 솔직하게 할 말 다 하는 상대에게 나도 자연스럽게 동화됐던 걸까. 옛날이야기를 하던 도중에 그때 자기에게 어떤 매력을 있었길래 좋아했던 걸까 하는 그녀의 물음에 처음엔 답을 내놓지 못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어쩌면 부쩍 자란 키와 급격하게 낮아진 목소리 톤 사이에서 변하지 않은 채 남아있는 무언가이지 않을까 싶다.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무안할 정도로 과거의 내 행동이나 생각 중에 이해되지 않는 게 너무나 많은데, 그래도 지금 내가 봐도 납득이 갈만한 어떤 이유가 있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로 장식된 즐거운 시간을 뒤로 하고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만남을 기약한 채 그녀와 헤어진 후, 열차를 기다리며 전체적으로 뉴욕 여행을 복기하니 오기 전 그렸던 흑백 스케치와는 달리 진짜 여행은 물감 놀이라도 한 것처럼 선의 경계를 침범해 불규칙하게 칠해져있었지만, 여러 가지 색깔들이 혼란 속에서 만들어낸 즐거운 순간들이 뉴욕 여행을 정의한다. 처음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갔다 오고 난 후 어딘가 생기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 든다. 높은 여행 비용과 오가는 비행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 그런 점에서 반쯤 강제로 나를 뉴욕까지 오게 한 친구들에게 조금은 감사함을 느낀다. 덕분에 학교생활 중 찾아온 첫 연휴가 그저 집과 동네에만 박혀있는 채 별다른 것 하지 않은 시간에서 벗어나 제한적인 삶 밖으로 얼굴을 내민 채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던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사족으로,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해 준 것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삶을 대하는 운명론적인 관점이었는데, 중학교 이후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으리라 여겼던 그녀와의 만남이 우연히 뉴욕 여행 중에 이뤄줬던 것처럼, 인생 살다 보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마주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10년 전 갓 전주를 떠나 분당으로 이사 왔을 때 지금의 결과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처럼, 10년 후로 가는 길 위에서는 그보다 훨씬 다이나믹한 것들을 마주하지 않을까. 그 안의 경험들 속에서 느낄 다양한 감정과 깨달음으로 삶의 깊이는 쌓이고, 그렇게 작은 서류 상자를 겨우 채울까 했던 글들은 나만의 공간을 가득 채워 결국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바란다.


미국에 온 이후로 별다른 변수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생활 속에서 과거에는 간절히 꿈꿔왔던 일들이 일상적인 부담이 되면서 의욕이 줄어들고, 자연스럽게 삶 자체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고 있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을 때 떠난 뉴욕 여행, 그리고 그 안에서 반쯤 우연처럼 찾아온 그녀와의 만남은 앞으로의 시간을 대할 태도에 변화를 가져다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또다시 학교로 돌아와 2주 남은 학기의 마지막까지 치열하고 밀도 있는 시간을 보내야 하지만,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데에는 뉴욕에서 만난 그녀처럼, 학기 이후 운명처럼 마주할 삶의 새로운 변수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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