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뭉시리 May 23. 2022

'산책'과 '말'과 '감정'과 나

'에릭 로메르' 영화를 보고 든 생각, 영화가 마음에 들어 쓰는 글




  5월 단기 방학을 앞두고 반 학생에게 영화를 추천받았다. 평소 영화와 책을 좋아해서 몇 번 책과 영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던 학생이었는데, 그런 아이가 이번 방학에 자신이 보려는 영화가 있다면서 에릭 로메르 감독을 아느냐고 물었다. 감독이나 배우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니기도 하고 선뜻 생각나지 않아 모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이 보여주는 에릭 로메르 특별전 소개를 봤는데, 몇 편의 영화 가운데 낯익은 영화 장면이 보였다. '녹색광선'이라는 영화였다.

  '녹색광선'은 사실 최근에 보게 된 영화였다. 그래서 며칠 전에도 영화에 잠시 나오는 동명의 소설을 보고 싶어서 한동안 중고책 사이트를 찾아보게 했던 영화였다. 반갑고 기뻤다. 마침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도 좋았고, 학생이 말하는 낯선 감독의 영화 가운데 그래도 한 편 정도는 봤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감독의 이름까지는 잘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최근 본 영화 가운데 특별히 인상적이고 좋았던 영화였다. 주위 사람을 짜증 나게 하는 주인공의 칭얼거리는 모습이 혹시라도 내 모습은 아니었나 하고 돌아보게 했던 영화였다. 가끔 여전히 종종 현실적이지 못하단 말을 듣는 것을 보면 사랑에서도 삶에서도 나도 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단기 방학이라고는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을 잔뜩 미뤄뒀던 탓에 나를 위한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못했었다. 그리고 이때 결정했다. 이번 방학에는 나를 위한 시간으로 잠시나마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 빠져봐야겠다고. 그렇게 다섯 편의 영화를 예매했다. 하루는 세 편을, 또 다른 하루는 두 편을 연속으로 보는 일정이다. 평소라면 영화 한 편의 여운은 최소 하루를 두고 되새기는 것이지만, 잠시 바쁜 일상을 벗어나기에는 이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본 영화는 '해변의 폴린', '여름 이야기', '겨울 이야기', '봄 이야기', '가을 이야기' 이렇게 총 다섯 편의 영화였다.



|| 해변의 폴린 ||


  연극을 떠올리게 했던 첫 장면은 바닷가 별장에 작은 차가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문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 문을 열고, 차가 들어서고, 문을 열어서 고정해 두는 것으로 주인공 폴린과 사촌 언니의 휴가가 시작된다.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이후 이어지는 마당 테이블에서 둘의 대화 장면이었다.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그들의 대화는 유독 귀에 더 잘 들렸고, 대사 문장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대화의 주제는 사랑이었다. 정확히는 남녀 사이의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사촌 언니는 이미 결혼과 이혼을 경험한 듯하고 주인공 소녀 폴린은 아직 연애 경험 없는 어린아이인 듯하다. 사랑을 주제로 한 이들의 대화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사촌의 옛 애인과 그에게서 서핑을 배웠다는 한 남자와의 대화로도 이어진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 내지는 환상들이 있는 듯하다. 그 자리 모두가 겸손하기보다는 조금 성급하고 분명하게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다 하고 말하고 있다. 어른들보다 폴린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리는 것도 그러한 탓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휴가 기간  이들의 연애와 관련한 작은 일화들을 보여준다. 사촌의  애인은 여전히 사촌을 좋아하고 있었고, 사촌은 새로 만난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사탕 파는 아가씨와 바람을 피웠고, 이것을 사촌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폴린과 사귀기 시작한 소년에게  사실을 대신 떠넘기기도 한다.


  이렇게 보니 잔잔한 바닷가 산책과 텍스트가 허공에 떠다니는 듯한 환각만 기억에 남았던 영화가 마지막에는 꽤 여러 사건을 보여줬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휴가는 끝난다. 계절이 지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사실 이들은 서로의 만남과 사랑이 그 한 철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그 이상의 의미는 처음부터 없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첫 장면의 그 시선 그대로 이제는 별장의 문을 닫고 작은 차에 올라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별장을 떠나기 전 차 안에서의 폴린과 사촌의 마지막 대화는 그 내용을 정확히 다 듣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생이 유한한 것처럼 사랑이라는 감정도, 사람들과의 만남도 현재의 시점이라는 한정된, 한철 휴가지에서만 허락된 것이었음을 모의하는 것 같았다. 영화의 종료와 함께, 늦여름의 휴가가 끝남과 함께, 이들의 한 철 사랑도 끝이 난다.



|| 여름 이야기 ||


  영화는 여행객을 실은 배가 선착장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배에서 기타를 손에 든 젊은 청년이 내린다. 청년은 뚜벅뚜벅 어느 건물 층계를 올라 방 안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한다. 잠시 기타를 튕기는 듯하더니 밖으로 나가 해변을 걷기도 하고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기도 하고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해변을 걷기도 한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다.

  휴가를 보내는 중인 이 청년은 이곳 해변에서 만나기로 했던 여자친구를 기다리는데, 그녀는 언제 올지 말지 기약이 없다. 그러던 중 식당의 종업원으로 처음 만난 여인과는 해변에서의 우연한 만남 이후로 매일 산책을 같이하면서 친해진다. 그리고 그녀가 그와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던 그녀의 다른 친구와도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는데, 이때 그 기약 없던 여자친구를 만난다.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결국은 세 명의 여인과 같은 장소, 같은 날에 약속을 잡게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받은 연락은 전부터 구하던 녹음기 매물이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세 여인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다시 배를 타고 휴가지를 떠난다.


  우연한 만남과 관계, 영화 내내 보여주는 산책 장면처럼 주인공 청년의 연애와 데이트는 어렵지 않고 무겁지 않고 가볍다. 그래서 좋았다. 주인공은 자신이 쉽게 누군가를 만나고 마음을 여는 것이 어렵다고 했지만, 몇 번 만나지 않은 상대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만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을 만한 친구와 이 영화를 같이 봤다면 너는 누구를 선택했을 것 같냐고 물었을 것 같다. 젊음이 한순간이었던 것처럼 짧은 휴가 기간에 주인공이 만난 세 여인과의 관계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었을 수도 있고, 기회나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주인공의 최종적인 선택은 때마침 매물로 나온 녹음기였다. 아니, 그가 음악가를 꿈꾸는 수학도였다는 점에서 그의 선택은 예술을 향한 꿈이었다고 해야 할까.

  영화는 누군가의 특별한 경험을 보여주기보다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또는 했을 법한 일상의 경험을 보여준다. 그래서 감상자에 따라서는 곧 있을 미래로, 지금 겪는 현재로, 한 차례 파도를 겪고 난 과거로 밀려오는 한 철을 생각하게 한다. 나에게는 이 작품이 휴가지에서의 산책으로 다가왔다. 휴가지에서 느끼는 잠깐의 여유와 사색은 그것이 충실한 삶을 위한 일상이 아니고, 아무리 길어도 짧게만 느껴질 휴가 기간이어서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또 때로는 아쉬움을 느끼게도 한다.



|| 겨울 이야기 ||


  영화는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는 한 남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라의 모습으로 바닷가를 누비는 그들의 모습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그래서 풋풋한 젊은이들임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래도 미욱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들은 휴가지에서 만난 사이였다. 그래서 이후의 장면은 기차역에서 파리의 집 주소를 불러주고 받아적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인은 파리에 도착해서 귀가한다. 그런데 화면에 보이는 지하철역이나 거리의 모습이 남자에게 적어줬던 주소와 다르다. 알고 보니 자기 주소를 실수로 잘못 적어주었다는 것이다. 5 뒤의 그녀는 휴가지에서 사랑을 나눴던 남성의 아이를 낳고 미혼모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녀 주위에는 연인 또는 친구라고  만한  남자가 있다.  사람은 시립도서관에서 일하는 지성미 넘치고 자상한 남성이고, 다른  사람은 미용실을 운영하는 남자로 지적이지는 않지만, 현실적인 인물이다.

  둘 가운데 여인의 처음 선택은 미용실 남자였다. 미용실 남자는 전처와 이혼하고 나서 그녀와 함께 근교에 새 미용실을 차리고 함께 하기로 한다. 2층에 큰 방이 딸린 미용실에서 행복한 나날을 계획했지만, 새로 개업한 미용실 일이 바빠서 조금 무신경했던 탓인지 그녀는 또 갑자기 파리로 향한다.

  이번에는 시립도서관의 남자를 찾아간다. 여전히 자신들은 친구임을 말하면서 자신과 자기 딸을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는 그와 그의 집에서 잠시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  우연히 버스에서 5  휴가지에서 사랑을 나눴던  남자를 만난. 그리고 그렇게 둘은 그녀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주인공 여인의 시선에서 보면 오랫동안 간직했던 사랑을 다시 찾은 일이  기쁘고 행복한 결말이다. 하지만, 남은  남자는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지 않을  없었다. 주인공 여인의 행복한 결말 장면 중간에 미용실의 남자든, 도서관의 남자든 누군가가 언제라도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지만, 에릭 로메르 감독의 영화에서 그런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용실 남자와 도서관 남자를 만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사랑은 5년 전 그 남자와의 사랑뿐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사랑은 아니지만, 자신과 함께하기 위해 이혼을 단행한 미용실 남자를 따라 도시를 떠나기도 했고, 다시 며칠 만에 이게 아니라며 도서관 남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에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감독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 같다. 다만, 선택의 문제와 더불어 사랑이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휴가지에서 만난 남자와의 불꽃 같았던 사랑도, 현실적인 생활과 생계를 이어가려 했던 미용실 남자와의 사랑도, 애틋하고 상냥한 도서관 남자와의 사랑도 사실은 선택의 문제는 아니었던  같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남자 사이에서 선택 아닌 선택을 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삶을 어느 한순간의 선택이 아니고 그녀의 생애가 흐르는 과정으로 두고 본다면,   남자의 모습은 다시 평범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사랑의 경험과 감정들로   있지 않을까 한다.



|| 봄 이야기 ||


  주인공은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이다. 퇴근하고 남자친구와 지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어질러져 있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집을 정리하려다 말고 주인공은 멀지 않은 자신의 스튜디오로 향한다. 하지만 이곳은 이곳대로 파리에서 시험을 치르는 중인 사촌에게 빌려준 상태였고, 사촌은 며칠  머물 것을 부탁한다. 하는  없이 그길로 그녀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파티에 간다. 그리고 딱히 머물 곳이 없어 앉아 있던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혼자 앉아 있는 소녀를 만나서  마디 얘기를 나눈다.

  파티에 흥미가 없는 둘은 소녀의 집으로 향한다. 소녀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아버지와 지내는데, 아버지는 출장 중이라며 자기 집에서 머물라고 한다. 그리고 이후 둘은 한동안 함께 지내게 된다. 소녀의 아버지는 자기 나이 또래의 여자친구가, 소녀는 아버지 나이 또래의 남자친구가 있다. 그런데 소녀는 어머니의 목걸이 분실을 계기로 아버지의 여자친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근히 주인공이 자기 아버지의 여자친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인데, 몇 가지 사건들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바람이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이후 주인공과 소녀 사이에는 작은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주인공이 소녀가 찾던 어머니의 목걸이를 우연히 찾게 되면서 화해한다. 그리고, 주인공은 소녀의 집을 나와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  안을 정리한다.


  '봄 이야기'는 사계절 연작이 보여주는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감정이 사실은 둘 이상의 인간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때면 서로 비슷하거나 통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을 필요 조건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이왕이면 그런 편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또 그러는 편이 나와 다른 남을 구분하고 혹여 관계가 수월하지 않을 때면 나를 보호하고 상대를 깎아내리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배우들의 진심인지 대사인지 모를 말들로 서로 대화를 이어간다. 이 말들이 대사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말이 하나의 장면 상황이나 마음을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구체적인 저마다의 사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었던 만큼 이들의 만남은 다소 부끄럽고 갑작스러웠고 말끔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 만남을 마치고 났을 때는 다시 집 안 정리를 할 수 있던 것처럼 모두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들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새로운 만남을 이어준 인물들 사이의 대화는 서로의 다툼으로도 이어지고 또 그 다툼을 해소하기도 한다.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곧 그러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가을 이야기 ||


  딸의 결혼식 준비 이야기가 한창인 어느 가족의 식사 자리에서 어딘지 괴짜처럼 그려지는 엄마 친구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그녀는 수줍음이 많은  같기도 하고 자존심이 강한  같기도 하고 자신만의 원칙이 뚜렷한 사람 같다. 영화의 주요 이야기는 혼자인 그녀에게 남자친구를 찾아주는 이야기이다.

  그녀의 남자친구를 찾아주기 위해 그녀 친구와 친구 딸의 노력이 시작된다. 친구는 연애 구인 광고를 그렇게 질색하던 그녀를 대신해서 광고에서 괜찮은 남자를 찾아 이어주려 하고, 친구의 딸은 자신의  연인이었던 학창 시절 선생님과 이어주려고 한다.   결전의 날은 딸의 결혼식 날이다. 결혼식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그녀는 신문 구인 광고 속 남성과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게 된다.


  아마도 계절 연작 중 마지막 작품인 듯하다. 구태여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배경이나 분위기가 그랬다.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8, 90년대의 프랑스를 보는 것이었는데, '가을 이야기'의 배경은 내가 기억하는 2000년대 초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가의 표지판이나 상점의 간판도 그렇고 길에 보이는 차들도 낯익은 모습이었다. 그 옛 기억은 내가 스무 살이 되었던 해였다.

  스무  시절의 기억을 배경으로  인물들은 40 초반이나  이상이 되는 듯하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이와 차이가 크지 않다. 사계절 연작  여름, , 겨울이 나로서는 지나온 삶과 경험에서 그들이 펼치는 사랑과 우정을 생각했다면, '가을 이야기' 현재와 더불어 다다르지 않을  같은 가까운 미래를 보여주는  같았다. 그래서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결국은 영화를 통해서나마 삶의 진행 가운데 흐르는 감정의 변화와  모습을   있었다는 점에서는 기뻤다고만 하는 것이 맞겠다.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슴 아파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에 대해서는 여전히 설레하기도 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한 것은 시절과 시간의 단절이 아니고 연속된 개인 삶의 모습이었다. 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그때 거기에 두고 온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 있는 내 모습이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해주는 인간의 감정은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작품마다 그 안에 어떤 인물과 사건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자체의 상징이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처음부터 그런 상징적인 장치가 있었을까. 특히 사계절 연작 시리즈처럼 연작으로 구성된 에릭 로메르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평소에 너무 당연하고 쉬운 것으로 여겨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인간의 감정과 그 감정을 떼어놓고는 살 수 없었던 삶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단순히 '사랑'을 주제로 다뤘다고만 하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사랑'이니 '우정'이니 하는 감정을 이렇게 많이 생각한 일이 최근에는 잘 없었다. 오히려 이제껏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고민했던 적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생각하는 연애의 감정을 넘어 생애에서 겪는 연속적인 개인의 감정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새삼 느끼게 됐다.

  '사랑과 우정'이라는 감정을 새롭게 정의한다거나 전에 없던 연애 감정을 일깨우게 되었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는 누구나가 간직하고 있을 그 감정이 삶의 어느 순간순간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한 사람의 일생에서 그가 성장해 가기도 하고 삶의 변곡점들을 하나씩 추가해 가는 동안에 여전히 그 개인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것은 명쾌한 답을 전해주기보다는 우리가 계속해서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으로서 본원적인 인간 감정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전글 지퍼를 올리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