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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오니 Jun 10. 2024

베란다에서 독백

안온을 위한 부산스럼

01.

 햇볕을 좋아하던 탓에 집을 구할 때 채광을 제일 우선으로 보곤 하였다. 내 예산에 맞는 따닥따닥 붙어있는 구 임대 아파트들 사이에서 내리쬐는 해를 바로 볼 수 있는 집을 단박에 계약하였고 집에 산 지 6개월이 지난 지금, 베란다에 간의 의자와 테이블을 가져다 두고 노곤노곤 광합성 하며 식사, 독서, 글쓰기 등을 하며 안온함을 누리고 있다.  





  요즘 열중하고 있는 것은 마라톤이다. 단순히 다이어트를 위한 달리기가 아닌 기록주를 위해 거리를 채우고 스피드 훈련을 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발목 염좌 이슈로 달리기를 아예 쉰 지 2주일에 접어드니 스멀스멀 체지방이 다시 올라온다. 가을 마라톤에서 더 나은 기록과 부상 방지를 위해 체지방 감량은 필연적이기에 다시 식단을 조심스럽게 시작하였다.


 왜 '조심스럽게'이냐면 얼마간 '강박일 수 있구나'란 생각에 꽤 충격을 받아 한동안 식단을 신경 쓰지 않으려 일부러 군것질을 먹고 배달음식을 찾았다. 이후, 약 두 달간의 방황을 끝에 요즘, 다시 '식단'이란 단어를 사용할법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강박'이라 한동안 생각했던 것들은 즐겁게 지속 가능한 운동을 위해, 그리고 만족스러운 인생을 위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스윗밸런스 망고리코타치즈 샐러드와 블루베리 그릭요거트. 그런데 세상 건강해 보이는 그릭요거트는 사실 무가당 허쉬 코코아 가루, 알룰로스를 듬뿍 두른 저칼로리 초코 그릭요거트다. 여기에 냉동 딸기까지 넣으면 요아정 저리 가라인데 안타깝게도 냉동 딸기는 어제 내가 모두 과자처럼 해치워버렸다. 아무튼 이런 지속 가능한 유지어터 식단을 제법 오래 한 터라 이런 편법적인 식단을 아무렇지 않게 직접 해 먹을 수 있는 나 자신이 제법 웃기다.








02.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운동을 잠시 쉬니 평일 퇴근 후 시간이 이리도 남아돈다. 시간이 여유롭다 못해 넘쳐흐르다 보니 마음속 꽁꽁 묻어뒀던 잡념 덩어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 덩어리들과 맞서려 근 2주간 여러 시도를 해보았다.


 깁스한 채로 진해루를 빙빙 돌아보았다. 2014년과 같은 맑은 날씨 덕에 기분은 좋았으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향한 어르신들의 안쓰러운 시선과 안부 인사에 금방 걸음을 멈추고 얼른 인근 카페로 들어갔다. 마침 해가 지고 있어 분홍빛 하늘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었다.


 진작 졸업했던 점을 다시 봐보았다. 한창 내가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있던 때는 그리도 위로받았는데 지금은 돈이 아까울 따름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무작정 고민을 털어놔도 들을 수 있을 법한 두루뭉술한 말들을 해주시는 통에 생각 덩어리 없애려다 부쩍 어른이 된 내 모습에 뿌듯함을 잔뜩 느껴 의도와는 다르게 기분 좋게 잠들었다.




 냅다 자 보았다. 근육통, 새벽 달리기 훈련들 덕분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지 오래돼 처음엔 폭신한 이불에 파묻혀 있는 순간이 좋았다. 그런데 잠을 계속 자면 2시간에 한 번씩 눈이 떠지고 또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잠들 수 있다. 그니까 잠은 자는데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잠을 잔다. 그러니까 밤도 낮 같아진다. 이상한 꿈도 꾼다. 어느 가정집에서 소개팅을 하는데 음료에 설사약을 탄다. 갑작스러운 신호를 어떻게 참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는데 그분이 화장실에 다녀오고 내가 갔더니 세상에 그분의 배설물을 다 봐버렸다. 이 꿈을 꾼 이후로 12시간 되기 전엔 침대에 눕지 않는다.    





03.


  엄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던 터라 학창 시절에 밖에서 잘 놀지 못하고 집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심심해서 집에 있던 전집, 마을 도서관 소설들을 독파했다. 12~17살까지의 5년 동안이 가장 책을 많이 읽었던 순간이다. 그리고 2024년 지금이 두 번째로 책을 많이 읽는 순간이다. 여러 시도 끝에 새로운 생각을 가져와 원래의 생각 덩어리 위에 얹었더니 현재 떠오르는 생각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 평온하였다.


 눕기 전에 혜원 언니가 선물해 준 책을 야금야금 읽었다. 안온한 일상을 그린 책인데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나적나 상태에서 부유하고 있진 않나 되돌아보기도 하고 휴일, 방학의 폭신한 아침 루틴을 상상하며 혼자 웃었다. 마음에 띵하니 박히는 내용들이 제법 자주 있었던 탓에 자기 전에 초콜릿 하나씩 까먹듯 소중하게 읽었고 다 읽었을 땐 아쉬웠다.  





 다음 달 독서모임 주제 도서를 새로 읽기 시작하였다. 여담으로 우리 집 앞의 로스터스 카페의 카페 라떼는 정말 맛있다. 한 모금 마시면 머리에서 상투스 울린다. 기분 좋게 댕그랑 거리는 머릿속을 잠시 즐기고 파운드케이크를 여덟 조각으로 잘라 맛에만 집중하며 오롯이 케이크를 즐긴다. 주말 오전의 이 식단은 단백질 하나 없는 탄수, 지방, 당만으로 구성된 정신건강을 위한 식단이다. 그리고 드디어 남은 라떼 홀짝거리며 책을 읽기 시작한다.


 최근 좋은 기회가 닿아 상담사님과 스트레스 상황 극복을 위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언제든 훌쩍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피처를 머리 한구석에 마련해두라 하셔 해 잘 드는 카페의 야외 테라스 혹은 통창 테이블에 앉아 고소한 라떼 마시고 책 읽는 장면을 그려보았다. 상상만으로 기분이 나아짐을 수시로 느꼈고 더 나아가 머릿속 장면을 실제 장면으로 전환시켜 그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여 마음을 환기시켰다. 성공적인 경험을 떠올릴 수 있는 내용을 활자로 읽으니 더 잘 읽혔다.


 한창 흘러넘치는 시간 속 생각 덩어리들을 주채하지 못해 허우적거릴 때 친구가 조언을 해 준 적이 있다. 감각에 집중해 주위를 둘러보라 했다. '나뭇잎의 색은 초록색이고, 냄새는 풀 냄새이고 맛은 그냥 상상해 보고 소리는 대충 살랑살랑일 테고 만지면 잎맥이 느껴지겠지?' 등의 이야기를 하며 현재 눈앞의 것에 집중하여 머릿속 생각의 안개를 걷어낼 수 있음을 설명해 주었는데 잘 공감 가지 않아 가만히 듣다가 집에 왔다. 그런데 이 내용이 책에 있었고 글을 따라 찬찬히 생각을 흐름을 쫓아가 보니 습하던 머릿속이 폭닥해졌다. 친구에게 얼른 책을 찍어보내고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다. 잔잔하고 평온한 주말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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