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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Feb 15. 2022

체스판과 같은 인간관계

내가 둔 말과 행동이라는 수에 상대는 반응한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정말 골치 아픈 문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은 '자율성의 억압'과 '눈치를 통한 거짓 행세'때문이다. 물론 이기적이게도 이는 나 자신만 고려한 문제 제기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그 문제에 대해 석연치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솔직히 밝힌다. 주위의 분위기나 암묵적인 규율로 인해 내가 할 일을 억압받는다는 것은 불행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내가 말한 모든 사실이 그저 나의 과대한 피해망상이며, 내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실행할 수 있는 것을 못하는 걸 두고 그저 주변 환경 탓으로 돌려버리는 방어기제를 사용한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 일부는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자유롭게 실행한 일이 어떤 유형이나 성향인지에 따라 어쩌면 팬티만 입고 번화가를 뛰어다니는 꼴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한다.




비건 채식을 시도하면서
관측된 주변의 반응


한 3년쯤 되었을까. 지금은 안 그렇지만 당시에 내가 좋아하는 자기 계발 코치의 유튜브 영상을 보고는 비건 채식의 이로움을 알게 되어 거의 반 년동안 실천한 적이 있다. 솔직히 나는 비건 식이요법이 나쁘지 않았다. 굳이 고기가 없어도 먹을만한 맛있는 음식은 넘쳐났고, 대체하여 맛볼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는지에 대해 탐구심과 모험심까지 불러일으킬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비건 채식을 시작하면서 견뎌내야 했던 가장 큰 고통은 식이요법 그 자체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그 반응에 대한 대처의 혼란였다.


(여담으로 비건의 건강성에 대한 논란이 많지만 짧은 경험으로 판단하길, 고기를 안 먹어서 건강한 게 아니라 야채와 함께 균형 있는 식단을 유지했기에 건강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시 나는 요거트를 제외한 설탕, 유제품, 밀가루도 일절 먹지 않았었다.)


우선적으로 나의 행동을 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혼란'과 '이해 불가'였다. 물론 나의 피해망상적인 판단이 가미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가족의 경우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내가 일반적인 섭식을 하도록, 지금의 내 식이요법이 실패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아빠가 하는 말에는 비건 식이요법의 신빙성에 대한 회의감이 눈에 띄지 않게 녹아 있었고 또한, 그런 나의 행태에서 약점을 잡아내기 위해 눈여겨봤다. 실제로 내가 비건 채식을 그만둔 뒤에는 뭔갈 먹을 때 이젠 이런 걸 먹느냐느니 이 몸에 안 좋은 걸 먹느냐느니 하는 개인적으로 약간 조롱이 섞인 듯한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엄마의 경우에는 내가 비건 식이요법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것저것 내가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 식품(육류, 밀가루, 설탕, 유제품)들을 먹으라고 건넸다. 한 번쯤은 먹어도 되지 않겠느냐라는 논리였는데 개인적으로 완벽을 추구했던 나에게 있어 표현에 과장을 보태면 모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아무튼 난 비건 식이요법에 대한 여러 책들을 읽고 숙지하며 나름 만족스러운 식생활을 취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내 도전적인 식이요법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고, 그것에 대한 나의 대처였다. 사람들끼리는 생각보다 간식거리를 나누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달달한 간식거리는 웬만해서는 내가 먹지 않으려 하는 음식이다. 그런데 상대가 호의를 위해 건네는 간식을 거절하는 것은 생각보다 나에 대한 상대의 호감에 적잖은 영향을 준다. 이는 애초에 건네는 간식을 거절할 사람이 없다는 전제에서 건넨 호의였는데 그걸 거부당했으니 스스로가 무시당했다는 생각을 받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내 행동과 판단은 주변과 비교해 비일반적이었고 그로 하여금 내 의도와 달리 주목받기에는 충분했다. 주변은 나를 일반적인 것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내가 스스로 정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항적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배려라는 단어는 개인적으로 그저 잘 꾸며진 단어에 불과했다. 나의 선택은 상시 주변에게 배려를 요구했다. 그 배려라는 것은 선택지의 제약이며 표현과 요구의 억제다. 주변 환경이 무의식적으로 나를 일반적인 것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상대가 수를 던지면
나는 내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
가장 적절한 수로 받아친다.


상대가 수를 두면 내가 그에 반응하여 수로 받아치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먼저 수를 놓기도 한다. 이는 인간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난 스스로가 우울과 공허에 시달리기도 하며, 주변 환경에 의해 나 자신이 통제받는 경우가 많기도 한 탓에 요즘은 인간관계에 감정을 크게 가미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사실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사람들의 고민이나 불평은 너무 사소하고, 관심사는 내게 흥미 없으며, 연애담은 나의 이해 범주를 넘어선 영역이다. 난 그런 것들에 대한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정보를 공유하는 것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해 자동적으로 반감 이외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은 흥미로운 척, 관심 있는 척하며 적절히 받아쳐주는 것뿐이었다.(무시할 순 없는 것이 군 복무 중인 나에게 이기를 하는 사람은 간부나 선임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그 사람은 적어도 내가 눈에 띄지 않는 일반적인 인간이라 생각하고 기억과 주목도에도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이다.


 이는 마치 체스나 바둑을 두는 느낌이었다. 상대가 요구나 부탁이라는 수를 두면 난 그나마 손해를 덜 수 있는 최선의 수로 대응한다. 혹은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내가 먼저 수를 두기도 한다. 여기서 '수'라는 것은 행동 그 자체를 표명한다. 즉 내가 취하는 행동, 심지어 무반응이나 무시조차도 하나의 수에 해당한다. 내가 상대가 한 말을 실수로 못 듣고 무반응을 했다면 상대는 무시받았다는 생각에 감정이 상할 것이고, 친하게 지낼 필요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잘못된 수, 거리를 두고 싶거나 성가신 사람이었다면 좋은 수를 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한 일말의 시간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나는 수를 잘못 둠으로써,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말이나 요구, 요구에 대한 승낙으로 나의 모든 시간을 빼앗길 수도 있다. 별로 흥미 없는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 영화를 볼 수 있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곳까지 애써 가야 할 수 있다. 관심 없는 행사에 참가하게 될 수도 있고,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과 만날 수 있다. 누구는 이러한 상황에서 삶의 전환점이 될 사람이나 사건을 만날 수가 있지 않냐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러한 것에 대한 어떤 적극성도 기대감도 없이 그런 걸 어떻게 느끼겠는가. 그 이전에 나는 하고 싶은 것이 정말로 많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기는데 주변 사람이 요구하는 것들 중에는 내게 부합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도 골치 아픈 일이다.


내가 양해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만약 하게 된다면 민폐가 될 정도의 양해를 요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난 생일이라는 것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왜 태어난 것을 축하할 일로 여기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부터 시작해 많은 사람들이 그저 생일이라는 추상적인 기념일을 명분으로 나에게 주목하는 등의 문제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생일날에 나에게 주목하거나 일종의 잔치를 하는 것을 그만두라고 요구한다면 과연 그걸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되리라 생각하는가? 한 번쯤이야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속되면 관계는 곧 파탄이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을 바치기엔 내 반항적인 선택에 대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일반적인 것에 적당히 발을 담그는 수를 두고 있다. 가끔은 고든 램지, 스탠리 큐브릭 같은 독선적인 성향의 사람이 경외스럽기도 하다.






내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못한다거나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애초부터 인간관계에 대해 이러한 고집스럽고 독선적이며 이기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흥미나 관심이 없는 것, 스스로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열정이나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은 내 성향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좋아하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이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나름 잘 맞는 방법, 혹은 유용한 여러 방식 중의 하나라고는 여기고 있다. 언젠가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적극적이거나 감성적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때 생각해보기로 하고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내가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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