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를 Feb 10. 2022

도저히 견디기 힘든 우울, 공허의 감각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러한 감각의 원인을 당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성인이 되면서부터 스스로 감정기복이 큰 사람이 아닌가 오래 의심해왔고 지금은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딱히 긍정하지도 않은 채로 생활하고 있다. 그런 성향에 신경을 쓴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나의 천성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취할 수 있는 현명한 행동은 지금의 나의 감정상태를 명확히 인지하고 자각해 그 감정의 늪에 더욱 빠지지 않도록 그 감정에 대한 부가적인 판단을 그만두는 것이다. 우울한 상태의 사람이 더욱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여 더욱 우울해지듯이 나의 경우도 나의 선택에 따라 내 부정적인 감정을 더욱 증폭시킬 우려가 있었고, 나는 상시 경각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판단을 통해 증폭시키지 않은 절대적인 우울, 공허의 감각이 참 견디기 힘든 감각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지금의 나는 시시각각 발생하는 이 괴로운 감각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천성의 영역, 유전의 영역이라 판단하여 더 이상 해결하기를 체념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어떤 방법을 실천해도 그 감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무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으며 설령 특정 활동을 통해 그 우울과 공허의 감각을 상쇄시키는 것이 가능해도 그 활동은 나 자신을 파멸시킬 정도로 쾌락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통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감각들 때문이다. 떼어지지 않는 것을 아무리 떼어내려 애를 써도 힘든 건 나일뿐이다. 그래서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는 하나
그것도 끝나는 일에 한해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내 삶에서 참 많이도 들어본 말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 말에 내가 반감을 느끼는 이유는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너무 투박한 표현으로 느껴진다는 것이고, 다른 이유는 이 표현부조리에 대한 합리화로 악용되는 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방식은 나름 힘든 위기나 문제를 현명하게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는 시기가 지나면 끝날 일에 한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스스로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 일은 말 그대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 반감이 드는 일, 도피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거부감을 외면하기 위해 애써 즐기는 척이라도 하는 편이 더 나은 것뿐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은 당사자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그건 피하고 싶은 일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피할 수 없는 일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이 특정 시기에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나 그 일에 대한 막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러지 않는가? 미래에 있을 긍정적인 변화나 나 막대한 보상을 위해 현재를 고통받으며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궁핍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하여 일하고,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가정을 꾸리거나 차를 사기 위해 조직의 말단부터 시작해 고난을 꿋꿋이 버텨내어 꾸준히 승진한다. 그리고는 정말로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차와 집을 사거나 윈하는 활동을 하고 원하는 물건을 산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모두 누리게 된 사람은 대체로 권태에 빠진다.) 그런데 만약 궁핍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시작했는데 그 일이 어떠한 보상도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즉, 무임금으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애초부터 일을 할 이유가 없다. 물론 열정을 발휘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영원히 궁핍과 가난에 시달리며 죽는 것이다. 일을 통해 돈을 버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는 일말의 부자가 되기 위한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는 가난에 대한 고통에 더해 언제 끝날지 모를,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에 시달리며 죽게 되는 것이다. 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함의 고통이 무엇보다 더욱 혼란스럽고 고통스럽다.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은 짧은 시간은 의지를 가지거나 낙관적으로 사고하며 생활할 수 있을 수도 있으나 언젠가는 무너지게 된다. 아무리 그렇게 노력한다 한들 그 고통이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의 나의 감정상태는 룰렛 돌리기와 같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 오늘은 날아갈 듯한 황홀감을 느끼며 미래에 대한 지대한 낙관과 희망을 품으며 하는 일에 몰두하고 높은 일률을 발휘했는데 바로 다음 날에는 모든 것이 무너지듯 무기력해지고 머리도 안개가 낀 것처럼 사고가 둔해지며 우울하고 공허해져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러한 경우를 자주 느꼈다. 난 이것을 두고 감정기복이 심한 것이 나의 천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현재도 그러한 의학적 진단을 받지 않아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런 감정기복을 호소하게 될 만한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튼 나는 이를 고치기 위한 노력을 체념했고 그냥 살기로 했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도 크고 작은 기복이 있을 텐데 나의 경우만 비춰보며 이상이 있지 않나 의심하는 것은 궤변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하루를 결정짓는 감정은 룰렛 돌리기와 같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룰렛에는 우울, 공허, 무기력, 들뜸, 활력, 고양 등의 감각이 나열되어 있다. 그날 하루의 전체적인 기분은 룰렛 돌리기처럼 랜덤으로 선택된다. 굳이 랜덤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분명 의학적인 패턴이나 인과관계가 존재하겠지만 나의 지식으로는 알아낼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의학계에서도 아직 밝혀내지 못한 증상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나의 증상의 원인을 연구하기 위한 노력은 무색해진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신체건강을 최선을 다하여 챙기는 것이며 그날의 감정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심지어는 들뜬 감정마저도 말이다. 그 이유는 오랜만에 찾아온 그런 기쁨의 감정이 추후에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경험상 그런 들뜬 감정이 생겨나면 그다음 날은 그렇게 들뜬 만큼 우울한 감정이 찾아온다. 그렇기에 계속 기쁜 감정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희망은 되려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다. 난 즐거운 감정을 느낄 때도 그걸 있는 그대로 즐기다가도 나름의 경각심을 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자세를 원한다.





난 혼자서 이런 우울한 감각을 느끼며 고통받는 것보다 비참한 것은 이상과 비전,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집단의 일부에 속해 스스로를 망각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내가 가진 목표를 실현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것인데 경험상 나 자신 다음으로 목표지향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회와 집단이기 때문이다. 난 나만의 특별한 뭔가를 성취하고픈데 집단과 사회는 일반적인 쪽으로 끌어내려고 한다. 난 그것이 때로는 정말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목표를 실천해나가는데 가장 방해되는 걸림돌, 장애물은 바로 나 자신이다. 목표라는 것은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목표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다섯 걸음 앞에 있는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마시겠다고 공책을 꺼내 들어 오렌지주스를 마시기 위한 목표와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하진 않을 것이다. 요컨대, 목표, 계획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고되고 힘들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 목표를 설계해도 그걸 실천하기 힘들거나 작심삼일로 끝나는 이유는 그 목표가 정말 쉽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들 못지않은 합리화의 귀재라서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어도 기가 막히게 합리화하며 게으르게 살아가고 있다. 늘 느끼는 불만족감, 자괴감은 그에 대한 보상이다. 내가 취하는 합리화 중에서 가장 으뜸인 합리화는 다음의 이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죽든, 어떤 것을 성취하거나 성취하지 못하고 죽든 이미 죽은 뒤에는 모든 것이 다 똑같을 뿐이다. 미래를 지향하며 살면 의욕을 발휘할 수 있다지만 나는 너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죽기 전의 감각이 아닌 죽은 뒤의 감각 즉, 태어나기 전과 같은 그 '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은 나에게 적잖은 공포를 안기기에 충분하다. 또한 '무'가 된 후로는 내가 지금 여기서 산전수전 겪으며 실천했던 모든 일이 아무짝에도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 그런 생각으로 인해 노력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지 의문하며 무기력에 빠진다. 도대체 노력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난 그저 나와 같은 실존적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싶을 뿐이다. 카프카, 카뮈, 니체나 쇼펜하우어처럼.

작가의 이전글 그 어떤 고통도 견뎌내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