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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를 Feb 11. 2022

우리는 모두 쾌락주의자다.

얻기 쉬운 쾌락은 파멸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항상 크건 작건 무언가로 인한 쾌락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너무 또렷해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쾌락도 있는 반면 지나치게 미미해서 자각하지 못할 정도의 쾌락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런 쾌락의 정도에 따라서 즐거움, 기쁨, 황홀함, 경이로움 등의 표현으로 분리하여 사용하는가 하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따라 행복과 쾌락이라는 표현으로 나눠 쓴다. 쾌락은 대체로 부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쾌락'이라는 표현만큼 감정이나 주관적 평가가 배제된 절대적인 표현은 없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내가 느끼는 모든 기쁜 감각, 즐거운 느낌, 재미, 행복감을 '쾌락적이다.'라고 표현을 한다. (여담으로 나를 힘들게 한 일에 관해서는 대체로 '자극적이다.'라고 표현을 한다.)


 내가 이 모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한 일에 관해서 모두 '쾌락'으로 통일하여 표현하는 이유는 그 감정의 강도만 다를 뿐 메커니즘이나 느껴지는 감각이 대체로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게임의 랜덤상자에서 희귀한 아이템이 뽑혔을 때의 쾌락과 지원한 대학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의 쾌락은 유사하다. 또, 광활한 자연을 봤을 때 느끼는 황홀감과 인기 있는 영화를 볼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의 감각도 유사하다. 굶주렸다가 정크푸드를 먹는 것의 즐거움과 한 달 동안 금연 후 취하는 흡연의 도취감은 유사하다. 난 글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가 느끼는 모든 즐거운 감각을 모두 쾌락이라 전제를 하고 시작하도록 한다.




우리는 늘 고통을 느끼고 그를
상쇄시키기 위해 쾌락을 필요로 한다.

의학계에서는 강한 고통에 대한 진통제로 아편계 약물을 사용한다는 것이 딱히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고단함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을 상쇄시키기 위해 술과 담배를 즐긴다.(나의 경우에는 둘 다 나에게 해당하지 않는다.) 이를 즐기는 것이 딱히 나쁘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 같다. 물론 과다하면 문제를 야기하겠지만 그건 딱히 술, 담배에 국한된 것이 아닌 모든 것이 그럴 것이며, 솔직히 말해서 술, 담배를 하지 않는 나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는 평소에 스스로가 느끼는 우울함과 공허감, 무기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커피와 단 음식을 즐긴다. 없으면 삶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점, 지나치면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점, 쾌락을 위해 섭취한다는 점에서는 술, 담배나 커피, 당이나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이론적으로 봤을 때 두 부류가 있을 거라 여겨지는데 한 부류는 모든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의 쾌락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그런 쾌락에 도취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얻기 쉬운 쾌락은
파멸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수컷 쥐의 쾌락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 전극을 연결하여 그 전극을 활성화하는 버튼을 쥐 옆에 두었더니 그것만 미친 듯이 눌러댔다는 실험 결과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데이비드 J. 린든의 '고삐 풀린 뇌'에서 발췌된 내용을 읽었다.) 심지어는 먹이나 발정기인 암컷 쥐를 옆에 두고도 버튼만 눌러댔으며, 암컷 쥐의 경우에는 갓 태어난 젖먹이 새끼들도 내팽개치고 버튼을 눌러댔다고 한다. 솔직히 자신의 뇌에 큰 자극을 주는 섭취, 주입형 마약을 넘어 이렇게 쾌락을 담당하는 뇌 부위를 전극으로 직접 자극하여 쾌락을 얻는 방식은 가히 사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간편해 보인다. 그리고 난 쾌락을 이렇게 손쉽게 얻을 수 있을수록 생물의 행동력과 의욕은 감퇴되고 무력해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쾌락을 얻기 쉬울수록 우리가 무력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 그대로 쾌락을 위해 생물이 행동하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있는 내가 부엌까지 애써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걸음을 재촉한 이유는 굶주림에 고통을 느꼈고 섭식으로 인한 쾌락을 느끼고자 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충분히 포만감을 느끼고 있거나 굶주림 자체가 고통스러운 감각이 아니었다면 부엌까지 가서 음식을 섭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굶주림 자체가 고통스러운 감각이 아니거나, 혹은 눈을 오래 뜨는 일, 성적 욕망, 피로감, 외상 등이 우리에게 전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면 이는 종의 종속을 위협할 정도의 치명적인 문제를 낳게 된다. 즉,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필연적이어야만 하며, 이 덕분에 우리는 행동을 하기 위한 연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고통은 행동을 위한 연료이다.

 허나 몸을 움직일 필요도 없이 섭취하거나 피우거나 주삿바늘만 찌르면 되는 술, 담배, 마약, 버튼을 누르거나 레버만 당기면 가끔 일확천금이 나오는 도박, 마우스만 누르면 눈앞에 펼쳐지는 음란물 세계 등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다. 쾌락을 느꼈다가도 다시 고통이 몰려오면 다시 피고, 먹고, 당기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전혀 어려울 것이 없다. 몸을 열정적으로 움직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쾌락은 뭔가를 지속해서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가진 사람이라면 배척해야 할 대상이다.




목표, 비전, 가치 설정이
쾌락을 위해 중요한 이유


나는 무일푼으로 일하는 자원봉사자마저도 쾌락을 위한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그들을 비하하고 모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대단한 일을 헌신하여 해내는 훌륭한 사람들이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당사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자원봉사자들에게 그런 일을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다른 이들을 돕는 것이 즐겁고 뿌듯한 느낌이 든다.'거나 '내가 도와줬던 사람들이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남들을 도왔을 때 느끼는 뿌듯함과 행복감이라는 쾌락을 위해 그렇게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헌신하여 돕고, 그 도움 덕분에 그 사람의 잘 지내는 모습과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받게 되면 적잖이 뿌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존재가 사회의 어느 면에서 적지 않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는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이보다 경사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스스로가 그러한 행복감과 뿌듯함을 얻지 않는다면 꾸준하게 헌신해가며 남에게 봉사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남을 도우면서 얻는 쾌락이 없다면 지속해서 남에게 도움을 기부해줄 수 있을까? 난 그럴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쾌락은 섭취로만 얻을 수 있는 감각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우리는 남에게 인정받음으로써, 원하는 것을 성취함으로써, 혹은 원하는 미래에 대해 상상하고 확신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쾌락을 느낀다. 난 이런 생각과 상상으로 얻는 쾌락만으로 건강하고 활력 있는 삶을 살 수는 없는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과거에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기 위해, 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특정 일에 미친 듯이 매진했던 자신을 떠올리고는 딱히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러한 과거의 사건이 단순히 감정 기복에 의거한 증상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섭취형 쾌락보다는 그러한 공상형 쾌락이 신체적으로든 성취적으로든 더 낫다고 본다. 모두 똑같이 고통을 상쇄시켜줄 수 있다면 그중에 더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선택하고 싶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단순히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 아니, 생각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원하는 것에 대한 기대와 흥미, 미래에 느낄 수 있을 성취감에 대한 과대평가와 기대감(이것들이 지나치면 성취 후에 상실감에 빠지기는 한다.)들은 나를 충분히 열정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눈앞에 존재하는 술, 담배, 정크푸드, 당, 주말에 대한 기대나 게임 등으로 현재의 자신을 위로한다.(커피는 제외한다. 카페인을 섭취하며 과도하게 일하다가 죽은 사람은 봤어도 나태와 태만에 빠진 사람은 못 봤다.) 이런 것에서 얻는 쾌락은 즉흥적이면서도 마치 휴지조각에 붙인 불과도 같다. 그 반면에 목표에 대한 기대, 그로부터 얻게 될 성취감에 대한 기대, 남들, 혹은 사회에 영향을 끼치거나 인정을 받을 것에 대한 기대감 등으로 얻게 될 쾌락의 추구는 얻기 어려운 만큼 우리를 더욱 움직이게 만들어 줄 것이며 우리는 이를 열정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노력하던 사람이 목표를 성취해도 기대했던 만큼의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거나 원하는 인정이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등 궁극적으로 만족할 만큼의 쾌락을 얻지 못하면 쉽고 간편한 쾌락을 탐닉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의 경우에는 늘 그랬다. 주로 그림을 그리거나 영상을 만드는 일을 했었던 나는 상당히 괜찮은 작품을 만들고자 했고 그로부터 성취감이나 타인의 인정으로 쾌락을 얻고자 했지만 정작 결과물은 항상 만족스럽지 못했고, 남들의 인정을 받기도 했으나 이는 나를 허영심에 도취되도록 만들어 석연치 않았다. 늘 결과물을 만든 뒤에는 성취감보다는 큰 공허감과 허무감이 뒤따랐다. 그러자 작품 활동을 하던 도중에는 절제했던 식습관과 활동들이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거나 심지어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격변시키는 깨달음을 얻어도 항상 여기에는 전혀 변함없는 나 자신이 있었다. 전과 같이 고통스럽고 전과 같이 무기력하다. 변한 것이라고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그 생각에 대한 나의 판단과 평가이고 그로 인한 나의 행동뿐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삶을 염세적으로 여겨왔고 솔직히 지금도 그렇다. 그때와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은 그때의 나는 세상을 염세적이라 생각하여 뭔가를 해도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해서 아무것도 안 했다면, 지금의 나는 세상을 염세적이라 생각하며 뭔가를 해도 아무짝에도 의미는 없을 것이지만 나의 결과물로 인해 세상이나 사람들이 좋게든 나쁘게든 영향을 받게 되면 나름 흥미롭겠다는 호기심으로 뭔가를 해보고 있는 중이다. 평소에는 노트나 한글 프로그램으로 작성하여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나의 내면 일기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작성하는 것도 그의 일환일 것이다.(사실 주된 이유는 내 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이 궁금하거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쾌락에 대해 길게도 논하기는 했지만 난 심리학자도 아니고 정신의학과 의사도 아니며 그에 대해 공부를 한 것도 아니기에 나의 논리는 단순한 궤변일 여지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경험과 직관을 통해서만 작성된 이 글이 얼마나 모순적이며 오류투성이 일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다만 글쓰기 능력도 글쓰기 능력이 형편없는 지금의 내가 글을 써야만 능력이 향상되지 않겠는가. 세상에 대한 아직 알지 못한 메커니즘이나 법칙도 이런저런 오류된 추측이나 상상, 가정을 거듭해야 더욱 진실에 다다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내 멋대로의 망상을 이어나가려고 한다.(그렇다고 그에 관한 공부를 안하겠다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누가 피아노를 지식도 없이 마음대로 쳐서 터키행진곡을 완주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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