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로그림 노운 Dec 01. 2022

인간 굴착기


주말 거제도. 물 때를 맞춰 조개 캐기를 신청하였다. 바지락을 캐기 위해 아이들과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장화와 삽과 양동이와 목장갑을 준비하고 들뜬 마음으로 뻘에 들어갔다. 주인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슬슬 땅을 파기 시작한다.


"자자, 한 10센티 정도 땅을 파다 보면 조개들이 나와요. 너무 작은 바지락은 더 크도록 살려두고 적당히 자란 애들만 담으시면 됩니다. 아주 큰 조개는 20센티쯤 땅을 파다 보면 나오는데, 나온 자리 부근으로 군락을 이루는 경우가 많아요. 하나를 발견했다면 주변을 노리세요."


세 가족이 함께 온 여행이었다. 우리 세 가족 외에도 한 가족이 더 있었는데 다들 열의가 대단했다. 큰 조개를 캐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모두가 땅을 파기 시작한다. 주인아저씨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동네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아세요? 왜 이걸 돈을 내고 하느냐 합디다. 하하"


그렇다. 우리들은 굳이 돈을 '주고' 조개를 캤다. 직접 노동을 하는데 비용을 지불한다. 그리고 심지어 매우 열심이다. 조개 캐는 사소한 일에 또 이리 최선을 다 하다니. 누군가 큰 조개를 발견해 내자,


유레카!

혹은,

심 봤다!


바지락, 그게 뭐라고

다들 이렇게 열심인지.

큰 조개의 등장에 아이들 모두 모여 우와 우와 하면서 서로 찾아보겠다고 난리가 났다.


둘째가 지겨워질 무렵, 남편과 둘째는 내게 삽 하나를 던져두고 먼저 퇴장하였다.

삽이 두 개 생긴 나는, 양손 캐기에 돌입한다. 두다다다 쉬지 않고 땅을 파고 있노라니,

 

"와와, 이거 좀 봐, 아니 뭐, 전생에 포클레인이셨어요? 뭐하시는 분이길래 이렇게 열심인 게야? 업을 접고 내려오셔야겠는데? 당장 일 때려치우고 내려와요. 대기업 임원까진 아니더라도 꽤 벌어, 여기. 나도 원래 대기업 다녔던 사람이야."


놀려 대는 친구들과 친구 아이들.

"이 사람, 신경과 의사예요. 인간 굴착기네, 아주."

"뭐야, 양손으로 하는데 심지어 쉬지도 않아. 조개 캐기 달인이 나타났다!"


우리 팀이 모은 큰 양동이 한가득 바지락은, 역대급이라 하였다. 어제 왔던 사람들은 대충 좀 캐다가 별 재미를 못 봤다고 한다. 지금까지 체험 한 팀 중 최고로 많이 캐냈다며 놀라워했다. 큰 조개도 제법 들어 있어 아이들도 즐거워했다. 죽은 조개를 간단히 솎아 내는 작업을 한 다음 다시 숙소로 향하는 길, 인간 굴착기 운운하며 모두들 깔깔댔다. 동영상을 찍어놨어야 했다며.



맛집 블로거는 텄다. 매번 다 먹고 나서야 찍는 이 버릇. 바지락 칼국수의 흔적과 바지락 해산물 스파게티. 사진의 5배 정도 캤다.




어쩌다 나는 조개 캐기에 이토록 최선을 다하게 되었을까. 의과 대학 시절 그저 대충 편하게 사는 사람으로 기억하던 동생도 놀라고 말았다. '아니, 언니가 이렇게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어?' 매사 좋은 게 좋은 거지, 평소 별 질문도 없고 그저 그런 가보다, 그럴 수 있지, 하던 사람인데 요즘에는 뭐 하나 시작하면 이렇게나 최선을 다 해버린다. 몸살이 날 지경이다.


내가 변할 걸까.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을까.

레지던트 시절 교수님에게 넌 왜 매사에 대충이니, 이야기 들었던 적도 있었는데.


사실 여전히 대충 하는 일은 많다. 적당히, 대충 해서 이모티콘도 6번이나 떨어졌다. 하지만 대충이라도 일단 시도하고, 그 대충이 모여 끈기 있게 지속되면, 조금이나마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닌가도 싶다. 완벽하게 너무 최선을 다해버리면 시도 자체가 힘들고 진입 자체를 못해버리니까. 시도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때도 있지 않을까.

대충, 조금씩, 끈기 있게, 종국에는.


대충 시작한 글쓰기가

조금씩

끈기 있게

지속되어

종국에는

이렇게 또 브런치 북 한 권을 낼 수 있게 되듯이.


대충 시작되었지만

종국에는 최선을 다해

<별별 신경전>을 발행해 본다.


신경과 의사로 살아가면서 겪은 각종 신경전(戰)을 엮는다면서 전혀 상관없는 에피소드로 프롤로그를 이어가다니 나도 참...

서론부터 '신경' 쓰이는구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