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우물쭈물 주변을 살피며 들어오던 한 중년 여자.
-아, 전에 약 먹고 두통 좋아졌었는데요, 최근에 그 옆에 다른 부위가 또 아파서 왔어요.
-네 그러시군요. (이것저것 문진 및 진찰 후) 이전에 드신 약이 효과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필요시 약을 드려보겠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가끔 잘 때 코를 곤대요. 무호흡도 조금 있다고 하는 거 같고요 관련이 있을까요?
-아 그러세요? 수면무호흡이 심한 경우에는 두통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에는 수면 다원 검사라고, 한 밤 자면서 하는 검사가 있어요. 해보시면 좋..
-(이야기 중간에 가로챈다) 아 혈관도 안 좋을까 봐 걱정도 되고.. 그러면 무호흡증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거라는 소리세요? (내 이야기 듣고 있긴 한 건가)
-아예 관련이 없다고 보긴 어렵지만, 이번 두통 양상은 긴장형 두통에 가깝고, 수면 무호흡도 두통과 관련은 있어요.
-혈관이랑은 상관없을까요? 그것도 걱정이 되네요. (계속 혈관 관련 이야기를 한다.)
-아 그게 걱정이셨군요, 그러시면 혈관 평가도 할 겸 MRI 예약 잡아드릴까요?
-MRI 말고 CT는 안 되나요?
-가능하십니다만, 혈관을 보시려면 CT는 조영제를 써야 하세요.
-MRI는 무서운데.. (엥?)
-아.. 어떤 점이 무서운 부분이실까요?
-그거..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연하죠!)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게 무섭다는 말씀이신가요?
-오래 걸리죠?
-30분 정도 소요되십니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으실 거야) 혹시 폐쇄 공포증이 있어 그러시나요? 그렇다면 시간이 조금 더 짧은 CT로 진행해볼까요?
-아.. 그런데 이거 꼭 찍어봐야 하나요? (애초에 내가 찍어 보자고 안 했다!!)
-반드시 찍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혈관이 걱정된다고 하시니 한번 검사를 해보실래요 말씀드린 거고요, 약을 드셔 보셔도 될 거 같아요. 증상 지속되면 다음 기회에 찍어보시죠.
(원점이다) 결국 전에 그대로 약 타감.
하아, 이것저것 궁금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나도 정제된 질문과 생각들을 듣고 싶다. 흘러가는 생각들을 혼잣말처럼 이야기하고 내가 끌어가지 않은 방향으로 나를 몰고 가다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은 상황이 너무 많다. 의사도 결국 서비스 직종에 속하고 감정 노동자인 것을.
나도 열심히 환자 보고, 나도 열심히 공감해주고 싶다. 하지만 되돌이표는 왜 이렇게 많은지. 감정적인 행동을 위장해야 할 때도 있고 어이없는 환자에게 화가 안 난 척 연기를 하기도 한다. 나 역시 전문적인 만족도를 위해 위장술을 펼치고 있는 감정 노동자인 셈이다.
물론, 오늘의 환자는 하고 많은 환자들 중 하나일 뿐이다. 진상력이라는 용어가 있다면 레벨은 아주 아주 낮은 수준, 아니 진상 축에도 못 끼는 수준이지. 진상의 수준이 만렙인 사람들은 들어오는 포스부터 남다르다. 들어오는 포스뿐이랴, 차트를 열자마자 우수수 쏟아지는 원무 메모만 봐도 두 눈은 각성되고 정신이 번쩍 든다. 보통이 아닌 사람이 들어올 것이니, 미소를 짓고 친절히 임해라. 다른 자아가 이야기한다. 아니 왜? 미운 놈한테 왜 떡 하나 더 주지? 또 다른 자아가 이야기한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안 좋은 상황은 일단 피하고 보자.
진상 (進上)
1. 진귀한 물품이나 지방의 토산물 따위를 임금이나 고관 따위에게 바침.
2. 겉보기에 허름하고 질이 나쁜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
나아갈 진, 위 상인데 왜 진상이 진상의 뜻을 가지게 되었을까. 5년 이상 전문의 및 10년 이상의 의사 짬밥이 쌓이다 보면 관상만 봐도 진상력을 알 수가 있다. (사실은 과장이 섞였고, 전화 태도, 하는 행동이나 말투와 표정, 걸음걸이 등 종합적으로 보면 촉이 온다.) 이 사람은 별 이유 없이 나를 힘들게 하겠구나, 혹은 이 보호자는 면담만 30분 이상씩 하면서 나의 기를 빨아먹겠구나, 하는 느낌과 촉이 대강 생긴다. 의외의 경우도 있긴 한데, 대부분은 맞추는 거 같다.
또라이 = 생각이 모자라고 행동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표준어가 아니라는 말이지. 맞춤법 검사를 해봐도 미친놈으로 자동 수정을 해버리는 단어다. (하지만 고치지 않겠어!)
세상엔 참으로 많은 또라이들이 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어느 날 내 주변에 또라이가 없다고 느낀다면, 내가 또라이가 아닌지를 의심하라고 할 만큼, 어딜 가나 또라이는 있는 법이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오늘 나 역시 어딘가에서는 영역 표시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