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수학, 예체능은 어쩌라고
내 아이는 영어 유치원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코로나로 다른 모든 활동을 중단했던 것도 있었고, 내가 일하면서 이것저것 다 챙기려니 힘에 부쳤던 데다가, 아이는 아이답게 '노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라고 (아직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글도 전혀 가르치지 않아서 (스스로 깨치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학교 가기 바로 직전에 부랴부랴 EBS <한글이 야호>와, <기적의 한글 학습>으로 겨우 한글을 익혔다. 통상적으로는 초등 입학 전에 대부분 한글을 마스터하고 들어오고, 그 수단으로는 한글나라 같은 학습지를 이용하는 것 같다. 7세에 느지막이 한글을 가르치면, 늦게 시작한 만큼 굉장히 빠른 속도로 금방 배운다. 책을 볼 때도 글자에 시선이 가지 않기 때문에 책 속의 그림에 섬세하게 반응하며, 평소 주변 자연도 유심히 관찰하고 호기심을 가진다. 또한 듣는 것을 잘하고, 청각 기억력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자서 잘 놀고, 아무것도 없이도 지루하지 않게 놀 수 있다. (엥 그게 뭐야 싶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다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내 아이가 아주 잘 크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아니, 실은 더 많다. 한글을 빨리 떼지 않으면 다른 어떤 학습적인 활동에도 제한이 생긴다. (하지만 그 학습적인 부분은 초등 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므로, 부작용에 대한 개인적인 후회는 없다.) 영유 다니는 아이라면 거의 대부분 다니는 사고력 수학학원도, 한글 읽기가 되지 않으면 레벨 테스트 자체가 불가하다. 그래서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사고력 학원 같은 데는 데리고 가보지도 못했다. 라테는 말이야, 속셈 학원 하나면 이달 학습까지 모든 과목을 다 배울 수 있었지. 이런 거 이제 안 통한다. 수학만 해도 사고력, 연산, 교과로 나뉜다. 사고력 수학은 영재원이나 경시대회 용 사고력을 키우기 위한 선행 단계다. 연산은 말 그대로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 연습하는 것이고. 교과는 단원 평가 등을 위한 과정이랄까. 통상적으로 거쳐 오는 족보는, 집에서 한 장씩 연산을 풀게 하여 수 감각을 익히고, 사고력 수학 같은 데를 보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소마, 와이즈만, 씨매스, CMS, 필즈 등이 있다. 수학 학원 보냈으니 수학은 손 놔도 되겠지? 이거 아니란다. 사고력 수학을 재밌게 다닌다고 해서 연산과 교과까지 같이 잡아지는 건 아니다. 따로 집에서 잡아줘야 한다.
하아. 학원 하나 보내는 것도 힘든데, 집에서 다른 것까지 봐줘야 한다니. 선행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1학년에 3학년 교과를 다 하고 오는 아이들도 있고, 곱셈 구구 같은 건 6-7세에 기본으로 다 외고 있다. 한글과 마찬가지다. 5세면 본인의 이름뿐 아니라, 간단한 문장도 쓸 줄 아는 아이들이 존재하듯이 수학도 선행을 제법 많이 한다. 이게 맞다 저게 맞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저런 경로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은 하는 것, 그것에 대해 쓰고 있다. 나는 그 주류에 들어가지 않았고(못했고), 그렇다고 조바심을 내지는 않는다. 선행이 뭐야, 지금도 겨우 학교 진도만 따라가는데. 출처를 다 밝힐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육아서적에서도 일 년 이상 선행을 권장하는 것은 없었다. 지금 그 수준에서 제대로 된 개념 학습이 중요하다는 게 통설이다. 수학도 결국 목표가 중요한데, 수능 수학 1등급이 목표라면 그렇게 미리 달릴 필요가 없다. 그 단계에 맞는 제대로 된 개념만 잡히면 다음 단계에서 헤맬 일도 없다. 차근차근해나가면 된다. 사고력 학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경시대회를 휩쓸거나 영재원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학원의 상술에 놀아나지 말자. 다만, 즐겁고 재밌게 수학을 접근해보려는 시도에서 보내 보는 것이라면 각종 테스트나 분반에 연연하지 않고 그 목표에 맞게 보내면 될 것 같다.
조금이라도 교육열이 있는 엄마라면, 미취학부터 보낸 소마를 다니다가 수학에 조금 재능이 보이면 적절한 아웃풋을 위해 필즈로 옮기고, 3년 정도 선행을 하고 나면 3학년 즈음부터는 황소에 보낸다. 그곳에는 문제를 스스로 다 풀 때까지 집에 가지도 못하는 시스템이 있다고 들었다. 아이가 어렵더라도 문제 해결 능력이 있어 끝까지 끈기 있게 해내는데 희열을 느끼는 아이라면 보낼만하겠지만, 애초에 들어가기조차 힘든 곳이라 재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마치 희소성을 둬서 더 사고 싶게 만드는 명품 가방을 떠올리게 했달까.
예체능의 경우에는 나 역시 초등 저학년까지 심도 있게 배워 보는 것에 적극 찬성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둘째는 뭐라도 해보려고 마음먹고 있는 분야이다. 어느 한 분야에 끝장을 본 아이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끈기와 인내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것 같다. 노력한 만큼 어느 정도 결과물이 되어 나오는 게 피아노나 수영, 미술 등의 예체능이니, 본인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조금씩 하나하나 해내는 기쁨을 경험하고 상장도 타고 하면 그만큼 긍정적인 에너지가 쌓일 것이다.
시간 자원은 유한하다. 미취학 아이의 24시간을 분배할 때, 모든 것을 다 집어넣을 수는 없다. 아이와 부모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우선 가치 순으로 분배를 해야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1. 영어에 친숙해지기 2. 독서 습관, 3. 아이만의 자유시간 4. 수 감각이었으므로, 내 아이는 그렇게 6-7세를 보냈다. 영어 유치원에 갔고, 한 장의 소마 셈(연산 문제집)을 풀고 나서, 나머지는 충분한 자유시간을 가졌다. 자기 전엔 언제나 한두 권의 책을 가능한 한 매일 읽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