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지나고 보니 가장 잘한 게 공부였다나고 보니 가장 잘한 게 공부였다
공부가 그렇게 하기 싫었는데
지나고 보니 가장 잘한 게 공부였다
공부로 승부를 봤으면
뭐라도 됐을 텐데
그것도 모르고 공부를 버렸다
눈물 꾹 참으며 하기 싫어도 공부했다
가난한 집 딸이 눈에 띄려면 뭐라도 잘 해야 했다
다행히 공부 머리가 있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공부 방법을 터득했다
시험 기간 이 주 전
앉은뱅이 밥상 앞에 앉은 새벽이 그렇게 고요했다
오십팔 명 중에 키 오십팔 번 꼴찌
작고 볼품없는 가난한 집 딸을 선생님은 본체만체했다
오십팔 명 중에 석차 오 등
선생님이 그래도 모범생이라고 눈길 한 번 줬다
소극적이고 인기 없는 이름 모를 학우에서
공부 잘하는 학우로 이름이 알려졌다
가난한 집 딸에게 중학교 삼 학년 담임 선생님은 관심이 없었다
여고 대신 여상에 입학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
그때 선생님께서 무지한 나와 부모님께 일깨워 주었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너는 공부를 잘하니 공부를 계속하라고 꿈을 꾸라고
선생님은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여상에 입학한 후 공부가 지루했다
윤리 선생님께서 말했다
이 학교는 우수생이 와서 바보가 되어 나가는 곳이다
선생님이 틀렸다
가난한 집 똑똑한 아이들은 졸업 후 취직했지만
결국 제 갈 길 찾아갔다
뒤늦게 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겉멋이 들어 시각디자인과에 진학했다
화구박스 들고 다니면서 부잣집 딸 놀이를 했다
현실은 참담했다 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졸업 후 취직한 회사보다 못한 직장을 전전했다
소설을 쓰겠다 영어를 익히겠다
꿈은 또 넘쳐났다
공부로 승부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러 직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은행에서 일하다가
목이 콱콱 막혀 회사를 때려치웠다
이번에는 여행에 미쳤다
돈이 바닥났을 때 영어 강사가 됐다
어쩔 수 없이 공부했다
토익 점수를 만들고 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잔꾀를 굴려 공부하는 시늉만 하면서 장학금을 받았다
졸업 후 교육대학원에 진학해서 교사가 될까 잠시 생각했지만
학비가 아까웠다
공부가 하기 싫었다
이걸로 됐다며 잘난 체했다
딸이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내 생애 처음으로 공부가 하고 싶었다
방송통신대학교 국어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다
예전처럼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나는 진심인데 내 머리는 녹슬어 기능이 마비됐다
딸은 그것도 모르고 유치원 학부모 날에 발표했다
우리 엄마는 공부를 가장 잘해요
밤을 꼬박 새우며 동영상 강의를 시청했다
1.5배 속으로 강의를 듣는 동안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초 집중했다
그러다가 이명이 찾아왔다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학업을 포기했다
공부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은 맞으면서 틀리다
나는 지금 공부를 한다고 할 수 있나
가끔 글을 쓰는 게 공부인가
영어 원서를 읽는 게 공부인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머리를 쓰는 게 분명하지만 소극적 두뇌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노트 펼치고 펜으로 메모하면서 암기하려 들지 않는다
독해지지 않는다
공부하느라 홀로 맞이하던 새벽, 그 고요한 정적이 그립다
미치도록 공부하고 싶지만 공부하는 게 두렵다
공부를 했으면 분명 내 삶이 지금과 달랐을 테다
이타심을 발휘하는 전문직 사회 구성원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중학교 삼 학년 내 인생 첫 갈래 길에서 내가 한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자만했다
그 선택 덕에 남편을 만났다며 위안했다
공부를 폄하했다.
공부를 버린 삶에 미련이 남는다
나의 어리석음이 이제야 보인다
공부만 그랬을까
잘난 게 없어도 당당하다면서
잘난 척하는 내가
미련한 내가
그간 놓친 게 얼마나 많을까
침침한 눈을 껌벅거리며
허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