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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운 Nov 06. 2023

커 가는 우리의 나선처럼  

[영화 #12.]  <리틀 포레스트:사계절>

너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마음에 표정이 생긴다.

그것은 매우 벅차 뭐라 설명이 어려운 얼굴 같다.

영상을 따라 그곳의 냄새를 맡는다, 소리를 듣는다, 눈을 씻는다.  

영화의 배경인 코모리의 사계는 행복하게도 진솔하고 아름다웠다.

여기에 유우타가 고향에 돌아온 이유처럼 '내용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삶'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매일이 정직하고 성실해 마음이 깨끗해졌다.  

도시에게 받은 상처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엄마를 대신해 '수확과 사계, 음식의 추억'을 따라 채워가는 이치코.  

엄마는 집에 없지만 엄마가 남기고 간 추억은 유효하다.

내 손이 닿지 않으면 끼니가 해결되지 않는 능동적 오늘을 반복하며 엄마의 맛을 나의 레시피로 찾아가는 이치코의 과정은 엄마의 존재를 일깨워가며 성숙해져 가는 성공적 홀로서기와 같았다.


벼는 사람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춥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것도 있어 추위도 소중한 조미료 중 하나다
겨울이 끝나고 우선 할 일은 다음 겨울 식량을 준비하는 것. 코모리에 산다는 건 그런 일들의 반복이다


코모리의 삶을 몸으로 느끼며, 이치코는 엄마의 부지런한 시간을 깨닫는다.

엄마의 레시피 안에 숨어있던 정성 역시 해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런 이치코가 생각한다.

나는 엄마에게 있어 진정한 가족이었을까

이 울컥하는 자문은 내게 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 버린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에 대해서도.  


영화 틈틈이 이치코의 몸에서 잡초 싹이 자란다거나 고무장갑을 지느러미 삼아 마당으로 다이빙하는 판타지들도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취향저격의 위트를 덤으로 하나하나 직접 기른 재료에 손맛을 더한 제철음식과 유행으로 도는 밤조림을 각자의 레시피대로 만들어 나눠 먹는 이웃의 다정함도 감동스럽게 맛있었다.


겨울이 끝나면 다음 겨울의 식량을 준비하듯 몸을 쉬지 않고 살아가는 무해한 삶.

요행 없이 순리대로 살아가는 삶은 때로 지나온 날들에 물음을 남겨도 결코 헛되지 않은 법이다.

이치코가 받은 엄마의 편지처럼.  

뭔가에 실패해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지.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원'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그런 거면 조금 낫겠지. 아니, 그것보다도 인간은 '나선' 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면서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옆으로도…
내가 그리는 원도 점차 크게 부풀어 조금씩 나선은 커지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힘이 나더구나.”

                                                                                           - 엄마의 편지 중에서


우리는 각자의 매일에 원을 그리고 있다.

반복이 무료하고 당장은 이렇다 할 성취가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나선은 아직 자라고 있다.

지치기 쉬운 원의 삶에서 희망을 안는다. 마음을 씻는다.


그리고 때마침 "いただきます!(잘 먹겠습니다)"라는 이치코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린다.

곧 이렇게도 들린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잘 살았습니다.


오늘의 우리처럼.

그때의 그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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