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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케네(Mycanae)

by olive


스파르타에서 다시 나플리오로 돌아가는 길에 중간에 있는 미케네에 들렸다. 미케네는 이번이 세 번째다. 나는 이상하게도 같은 여행지를 또 가는 버릇이 있다. 가고 또 가고.. 마음 속에 뭔가 미진한 것이 남아 있으면 이제껏 가보지 않은 다른 국가나 도시로 가기보다는 계속 갔던 데로 다시 가곤 한다. 미케네도 그런 곳이었다. 내가 처음에 미케네 문명에 눈을 뜬 것은 처음으로 그리스 아테네에 갔을 때 오모니아에 있는 그리스 고고학박물관에 가서 미케네의 유물들을 보고 묵직한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듯 크나큰 충격을 받고부터이다. 내가 무얼 보고 경악하며 크게 놀란 것은 그때가 처음일 것이다. 물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겁쟁이에 울보였던 아이여서 셀 수도 없이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일이 많았지만 문화적 충격으로 몸이 쓰러질 듯 했던 것은 그때가 최초였다. 그때부터 나는 홀린 듯 미케네 문명을 쫓아다녔다. 언제 이런 광기에 가까운 홀릭이 끝날지 모르겠다. 내 의지가 아닌 어떤 이끌림에 의해 정신 못차리고 집착하는 것은 흡사 상사병에라도 걸린 듯한 모습이다. 상사병이라는 것이 나을 수 있는 병인가? 글쎄 아닌 것 같다. 나는 생이 계속되는 한 여기에서 놓여나지 못할 것 같다.

미케네 왕국은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와 다나에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처치한 후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에게 바치고 신탁에 의해 자기 외할아버지를 죽이게되고 상심한 나머지 티린스의왕 메가펜테스에게 왕위를 교환하자고 한 후 미케네 왕국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페르세우스는 이후 헤라와 아테나 여신을 도사의 수호신으로 정하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 땅에 번성했던 미케네문명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가운데 아르골리스 평원에서부터 그 근방의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기원전 16세기 ~ 12세기에 번성했던 해양문명을 말한다 미케네 문명보다 앞섰던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을 미케네인들이 멸망시켰다고 하며 그 문명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 정설이다. 미케네 문명에 속했던 지역으로는 미케네를 필두로 티린스, 메세니아의 필로스, 아티카의 아테네, 보이오티아의 테베와 오이코메노스, 코린토스, 마케도니아, 에게해의 섬들, 소아시아의 해안까지 아우른다. 호머의 <일리아드>에 의하면 아가멤논 왕 시기에 지금의 튀르키에 영토인 성벽도시 트로이와 두 차례의 전쟁을 했고 두번 다 승리했다 하지만 확실한 역사적 근거자료는 없다. 하인리히 쉴리만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트로이 유적도 확인할 역사적 자료가 없는, 아직까지는 주장에 불과할 뿐이다. 이 미케네 문명은 북쪽에서 쳐들어 온 철기문명을 가진 도리아스인에 의해 멸망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외의 다른 지리, 기후적 영향도 있었으리라는 가설도 있다.

스파르타를 떠나 2시간쯤인가 지나서 미케네에 가까워오자 내 가슴은 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산이 그산인 것 같은 산투성이 지형이었지만 멀리서 미케네인 듯 싶은 산등성이가 나타나자 나는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한, 두시쯤 되었을까 한낮이었음에도 미케네 유적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주차장에서 이쪽으로 돌아보고 저쪽으로 돌아보아도 차를 댈 수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시간을 끌게 되자 남편은 나더러 표를 끊어 먼저 들어가라고 말했다. 자기는 언덕을 내려가서 어떻게든 차를 주차시키고 올테니 먼저 유적지에 들어가서 관람을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나는 그말에 얼른 동의를 하고 맨먼저 아트리우스 창고(Treasury of Atreus)로 향했다. 아트리우스 창고는 B.C. 1250년경 미케네 문명의 청동기 시대에 미케네 왕궁에서 좀 떨어진 곳에 지어진 높은 원추형 아치형 창고 혹은 무덤을 말한다. 어떤 학자들은 곡물이나 보물을 보관했던 창고로 보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왕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천장이 궁륭의 돔형으로 되어있고 너비가 13.2m, 높이가 사람 키의 7~8배쯤 되어 보이는 14.5m나 되며 미케네 건축양식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건축물인데 입구에서부터 내부의 원추형 천장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의 세월 동안 전혀 손상되지 않은 모습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함과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밑에서부터 위로 차츰 좁아지면서 33단의 돌들을 쌓았고 천정에 이르러 빛조차 새어나오지 않게 빈틈없이 막아버린 솜씨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그 정교하고도 치밀한 기술은 그냥 압도적이다. 더우기 그것이 3500년 전의 작업이라니!!


미케네 유적지에서 건축물로서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은 이 창고가 유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건축술이 이미 현대의 그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만큼 완벽에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 원통형의 무덤(Tholoi)에는 왕들이 부장품들과 함께 수장되었는데 황금이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무구, 투구와 장식품들, 가면들이 함께 매장되었다. 잘 깎여서 다듬어진 돌을 쌓아 만든 입구로 들어가는 길도 인상적이었다. 폭 6m와 길이 30m의 양 옆의 길을 지나가게 돼있는데 그 길을 드로모스(Dromos)라고 부른다. 미케네 문명 당시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이러한 형식으로 멋지게 가꾸어 놓은 것으로 보아 그들에게 심대한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입구의 삼각형으로 뚫린 창 아래 문 위를 받치는 상인방은 무게 12톤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돌인데 그렇게 큰 돌을 어떻게 양 옆의 기둥 위에 얹을 수 있었는지 후세사람들에게 조차도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입구와 내부의 그 아름다운 비례와 형식적 미에 너무도 매료되었던 나는 아무 장식도 없이 텅 빈 채 돌로 만들어진 그 무덤을 보며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계속 보고 또 보고 싶었지만 남편이 나를 찾아 헤멜 것을 염려해서 아쉽게 떠나와야만 했다.

아트레우스 보고를 떠나 미케네 왕궁 입구 쯤에서 다시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미케네 왕궁은 산 중턱에서부터 꼭대기에 이르기까지 쓸만한 나무라고는 별로 없는 민둥산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의 여름의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감수해야만 했다. 나와 남편의 얼굴은 벌겧게 익어가고 있었다. 성벽 입구에서 100m 쯤 걸어가자 예의 그 유명한 ‘사자의 문’(Lion Gate)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보아도 등이 오싹할 만큼의 찬탄을 금할 수 없는 이 문은 미케네 문명을 세계의 문명사 안에 당당하게 자리하게 해 주는 여러 요소들의 한 부분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 옛날에 어떤 힘과 기술로 그 돌들을 들어올려 그렇게 아름답고 장중한 문을 만들고 문 위 양쪽에 두 마리의 사자를 부조로 새겨 문의 위용을 만들어냈는지 그저 놀라움과 경탄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다른 것들은 다 무너져 폐허와도 같은 이 현장에 그것만은 또 오롯하게 허물어지지 않고 제대로 서 있는 것에 감사하고 싶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여러가지 포즈로 사진을 찍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나도 간신히 그 틈에서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

사자의 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빙 돌면 원형의 Grave circle A 라는 왕들의 묘가 나타난다. 6개의 벌집분묘로 이루어져 있다.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쉴리만이 그 유명한 아가멤논의 황금 가면을 발굴한 것도 여기라고 한다.(쉴리만은 그 가면의 주인공이 아가멤논이라고 주장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여기서 쉴리만은 수없이 많은 엄청난 양의 황금으로 된 보물들을 발견하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그리스 국립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쉴리만이 발견한 남자의 시신은 얼굴에 황금가면을 썼고 허리에는 황금허리띠를 둘렀으며 가슴에 황금흉대를 대고 있었다고 한다. 여자의 시신은 황금과 각종 보석에 파묻혀 있다고 할 정도였다. 목걸이, 팔찌, 귀걸이 등이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고 머리에는 황금으로 된 관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호머가 말했듯이 미케네는 ‘황금으로 넘쳐나는‘ 나라가 확실했던 것 같다. 고고학 박물관 1층 전시실을 꽉 채운 그 방대한 유물들은 그 예술성과 정교함과 화려함은 물론 실용성에 이르기까지 실로 상상도 못했던 수준으로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도대체 그들은 누구였던가 하는 황당한 의문을 떠올리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리스에 대한 관심은 미케네의 유물을 본 것과 안 본 것으로도 크게 나뉘어지지 않을까 싶다.


신화에 따르면 미케네의 전설의 왕 아가멤논은 펠롭스의 아들인 미케네의 아트레우스 왕과 아에로페의 아들이고 메넬라오스와 형제이다. 그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남편이자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 크리소테미스, 오레스테스의 아버지이다.아가멤논의 가문에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저주는 아가멤논과 아이기스토스, 증손자 오레스테스까지 이어진다. 트로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 의한 헬레네의 납치사건으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고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와 함께 그가 트로이에 가 있는 10년 동안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간부 아이기스토스와 눈이 맞게 되고 아가멤논이 돌아온다는 전갈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가 돌아와서 욕실에 들어가자 도끼로 3번을 내리쳐서 죽인다.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허무하게 주검으로 변한 아버지 아가멤논을 보며 분노애 떨던 딸 엘렉트라는 저주를 피해 다른 나라애서 살던 남동생 오레스테스가 돌아오자 어머니와 그의 간부 아이기스토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결국 클리터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가 함께 남매의 손에 의해 무참히 죽게 되고 오레스테스는 그후 모친살해의 죄명으로 복수의 여신 에리니에스에게 쫓기며 아레오파고스에서 재판을 받지만 아폴론의 도움으로 무죄선고를 받는 것으로 이 가문의 저주와 복수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런 신화를 따라가다 보면 죽고 죽이면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이야기에 몸서리치게 된다. 현대의 인간들 머리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저주와 복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기 때문이다. 이 신화의 이야기들을 교훈삼아 인간사를 재해석하기도 마땅치 않다. 너무나 처절하고 참혹한 이야기만 난무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사적복수가 법률적으로 금지되므로 아예 상황 자체가 다른 것을 염두에 두면서 심한 잔혹극의 하나를 들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편이 나으리라 싶다. 한편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오레스테스가 처한 상황이 인간의 실존적 부조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해석하면서 직접 이 딜레마를 주제로 드라마 『파리 떼』를 썼다고 한다.

원형 묘를 지나 계속해서 올라가면 무너져서 벽들만 남은 왕궁터가 연이어 나온다. 사각의 벽들이 그나마 남아서 왕궁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니 세월의 무지막강한 흔적에 대해 또 한번 심사숙고해 볼 기회를 주는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3500년 전~4000 년 전의 유적들이라니!! 미케네의 궁정 양식은 그보다 앞선 문화인 크레타 문명과는 달리 방의 배치와 구조 면에서 다른 특색을 가지는데 그것이 바로 메가론(Megaron)양식이다. 메가론이란 ‘넓은 방'을 뜻하는 것으로서 현관을 지나면 전실이 있고 그 안쪽에 넓은 방을 배치하는 구조이다. 미케네 인들은 이 방을 쾌적하게 꾸미기 위해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었으며 방 중앙에는 난로까지 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돌로 쌓아서 만든 수많은 궁전 내부를 지나면 가장 위쪽 끝에서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길에 육중한 돌문(북문)이 나오고 그 문을 지나서 길 몇 개를 돌아가면 우물이 나온다. 우물(지하 저수조)은 계단을 통해 밑으로 내려가게 돼있는데 일고 여덟 계단만 내려가면 그때부터 오금이 저려서 더 내려가지 못하고 돌아서 나오게 된다. 어두워서 캄캄한데다가 어렴풋이 물의 표면과 찰랑이는 소리는 들리지만 삐끗 잘못해서 발을 헛디디면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둿목을 잡아 땡기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공포는 거의 백년을 앞서서 이곳을 방문했던 <북회귀선>의 작가 헨리 밀러도 똑같이 느꼈던 듯 <마루시의 초상>이라는 글에서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미끈거리는 공포의 우물 속으로 다시 내려갈 생각이 없다. 혹시 그 안에 금단지라도 숨겨져 있다면 모를까. 나는 하늘을 보고 싶다...”

어떻게 산 꼭대기에 우물이 있을까? 그것도 메마르고 건조해서 풀 한포기 없는 이곳에? 미케네에서는 모든 것이 수수께끼였다. 어떻게, 얼마나 깊이 우물을 파 내려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그곳에는 우물이 있었고 그것도 수량이 엄청 풍부해 보였다. 아마도 그 성채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였을 것이다. 후세의 그리스 사람들은 미케네와 티린스의 이 성채들을 보고 그것을 축조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아닌 외눈박이 거인들(키클롭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헀다.


크레타의 미노아 문명에서 건너와 발전된 미케네에서 사용되었던 선형문자B의 기록과 여러가지 설화나 신화 등에 의하면 그리스 신화의 태동연대와 미케네 문명의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일리아드> 에 의하면 <트로이전쟁>과 <아르고호 원정대>의 영웅들의 활약상이 미케네 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했던 시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에 이라클리오 고고학박물관의 크레타 유물과 아테네 고고학박물관의 미케네 유물들을 보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외계 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적이 있다. 그들이 남긴 유물들과 그들이 생각해낸 신화의 비범하고 천재적인 상상력과 스케일과 변화무쌍한 희로애락의 크기로 보았을 때 결코 지금의 그리스인들과 매치가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계 행성에서 날라와 기원전 2500년 경부터 1200년 경까지 이 지구 위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이 지구를 떠났을 것으로밖에 상상이 되지 않았다. 헨리 밀러도 이같은 나의 상상과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 미케네에서 한때 신들이 지상을 거닐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미케네에서 바로 그 신들의 자손이 뼛속까지 예술적인 동시에 괴물처럼 가공할 열정을 지닌 인간들을 만들어냈다. 이곳의 건축은 거인 키클롭스처럼 거대하고, 장식품들은 그 어느 시대의 예술과도 비견될 수 없는 섬세함과 우아함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는 황금이 풍부해서 사람들은 금을 무한정 사용했다... 중략....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모든 추측의 범위를 벗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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