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트라스에 하루 더 머물기로 했으므로 스파르타에 다녀왔다. 스파르타는 미스트라스에서 7km 만큼만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미스트라스에서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이틀만 묵고 떠나기가 아쉬웠다. 여기서 하는 일 없이 보름살기, 한달살기를 한다면 몇 년 동안 묵은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은 넓은 방이 그랬고 창문도 여러 개가 세로로 좁고 길게 나 있어서 통풍과 채광도 완벽했다. 테라스로 이어진 문을 나가면 푸른 잔디가 깔린 얕은 경사의 마당이 연이어 있고 그 밑으로는 저 멀리 스파르타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그 이상 뭘 더 바랄 수 있으랴 싶게 내 마음을 충족시켰다. 산으로 올라오는 것이 싫어서 남편에게 마음 속으로 짜증낸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산 위에 위치한 집은 시야가 넓고 시원하고 발아래 풍경을 눈속에 품으면서 마음까지 넓어지는 듯한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한다. 산 위 집의 재발견이었다. 그리스 사람이라면 여름 별장으로 충분히 욕심내고 싶은 그런 집이었다. 내가 만일 단독주택을 갖게 된다면 이렇게 구조를 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침 조식은 그 전날 도착하자마자 조식 리스트에 원하는 것들을 체크해서 전달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빵, 커피, 치즈, 요구르트, 계란, 샐러드, 오렌지쥬스 등등을 체크해서 보냈는데 그 음식들을 커다란 바구니에 담아 하얀 보자기를 덮어서 가져다 주었다. 그것도 또한 매우 색다른 방법이라 생각하면서 오붓하게 방에 앉아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먹을 수 있어서 시골 별장의 느낌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스파르타에 도착해 보니 의외로 작은 시가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특색 없는 건물들의 모습이 그냥 어느 한적한 시골 도시의 느낌이어서 약간의 실망감이 들었다. 시내 몇 곳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 몇 개 있었지만 그리 크게 도시의 느낌을 좌우하진 못했다. 과거의 도시유적은 몇 군데만 도시 외곽에 버려진 듯 볼품없이 남아 있고 도시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수천 년 전의 영광스러운 전설적 국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메인 도로라 할 수 있는 큰 거리의 끝자락, 국립경기장 정문 조그만 광장 앞에 전설적인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동상이 서 있었고 몇 몇 관광객들이 그 앞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유일하게 이곳이 관광지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그래도 스파르타를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유적지(Archaeological site )와 아크로폴리스에 찾아가기 위해 더위를 무릅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레오니다스 동상에서 한 골목을 꺾어들며 700m쯤 걸어가니 스파르타의 유적지가 나왔는데 입구를 지나 가고 오는 동안 우리가 만난 관광객들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을 만큼 스파르타는 잊혀져 가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래도 나는 수천 년전의 역사의 흔적을 만나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사방을 돌았다. 입구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서는 뭔가 유물들을 발굴하는 모양인 듯 흰 천막 속에서 대 여섯 명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는데 더위 탓인지 그닥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주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그곳은 보수나 복원의 노력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그대로 그냥 놔둔 채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정부로부터, 시로부터, 또 시민들로부터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려는 듯이 보였다. 나는 왠지 안타깝고 허무한 느낌이 들어서 거의 폐허인 채로 나뒹굴고 있는 신전기둥의 잔해들, 군데군데 뻥 뚫려 있는 벽들, 허물어진 계단이나 울타리, 방치된 건물 잔해와 부스러기 등에 안타까운 눈길을 보내면서 삥 둘러보고 난 뒤 힘없는 발걸음으로 돌아나왔다. 아크로폴리스 쪽에 가 보니 원형 무대가 그런대로 옛 모습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고대 스파르타 국가 시대의 것이 아니고 로마제국 시대에 건설된 것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벌어졌던 전쟁과 지진, 약탈 탓으로 스파르타의 원형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수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버려지고 무관심한 채 잊혀진 유적의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우울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스파르타는 익히 알다시피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에 위치한 과거 도시국가로서 아테네와 나란히 고대세계에서 그리스의 강력한 패권국가였다. 현재 라코니아현의 현청소재지이며 기차로는 연결이 안 되고 인근의 큰도시 칼라마타와 트리폴리를 거쳐서 닿을 수 있다. 높이 2000m 이상의 산들이 즐비한 타이게토스 산의 동쪽기슭에 위치하며 왼쪽으로는 유로타스 강이 흐르고 있다. ‘스파르타’라는 이름은 건국왕 라케다이몬의 부인인 스파르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공식명칭은 ‘라케다이몬’이었다. 스파르타 병사들의 방패에는 라케다이몬의 첫 글자 ‘엘’이커다랗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1834년에 그리스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한 후 오톤 1세에 의해 미스트라스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옛 스파르타 왕국 터에 만든 도시로서 고대 도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기원전 4~5세기 한창 명성을 날리던 때의 스파르타는 군사강국으로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군사 300명으로 전투를 치른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해서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을 정도이다. 그 후 아테네와의 패권 다툼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승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독재적이고 강압적인 정치로 실질적인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소수정예 부대만 고집하면서 군대를 확충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동맹국이나 페르시아를 상대로 전투를 치르면서 국력은 오히려 쇠약해져 갔던 스파르타는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왕에게 정복되었다가 다시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396년, 4세기 말에 서고트족의 대왕으로서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를 점령한 게르만 군주인 알라리크에게 약탈당하며 영영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후 1430년에 비잔틴제국의 모레아 전제군주국에 속해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1460년에 오스만제국에 정복당했고 1832년에 그리스왕국에 속하게 됐다.
스파르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이유는 화려하고 장엄한 유적이나 유물, 관광할 만한 것이 없어서인데 그 까닭은 첫째로, 고대국가 당시 스파르타의 사회체제가 워낙 금욕적일 만큼 검소하고 소탈했고 무예와 전쟁대비에만 치중했던 탓과 둘째로, 집단생활과 혹독한 고강도 훈련으로 특징지워지는,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 이라고 일컬어지는 교육과 사회•문화체계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한 스파르타의 독특한 사회체계를 만든 것은 리쿠르고스가 확립한 <리쿠르고스 개혁>이 사회 전체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결과인데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이 체제가 스파르타라는 국가를 오랫동안 공고하게 지켜나간 근본토대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마치도 오늘날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 다를 바 없는 이 개혁의 주요내용은 ‘모든 스파르타인이 동일한 주거수준을 갖게하고 비슷한 종류의 생필품을 쓰게하며 모든 시민은 군사훈련의 의무를 지며 모든 시민에게 자녀부양의무와 교육의무를 부여하며 구역단위마다 공동식당을 설치하여 공동식사를 하게 하며 남성과 여성 간에 재산상의 차별이 없는..‘ 등으로 요약된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사치와 낭비를 배제하고 시민들간의 불평등을 없애고 시민 개인의 이기적이고 향락적인 생활을 억제한 결과로 장엄하고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외의 이유로는 잦은 외침과 전쟁, 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상당부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신전 건축 같은 것도 여기에선 찾기 힘들다. 무에 집중된 사회체제와 그것에만 힘쓴 나머지 다른 것엔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고 웅장하고 장엄한 기념물 따위는 불필요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관심있게 찾아볼 만한 구경거리가 없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과거에 아테네와 쌍벽을 이루던 국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스파르타의 유적은 그래서 오히려 하나의 수수께끼처럼 다가온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제일 높은 2407m 높이의 타이게토스 산맥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예외적일 정도로 넓게 자리한 평원에서 한때 번창했고 왕성하게 세력을 펼쳤던 한 나라가 그처럼 힘없이 무너져내린 사실이 경직되고 고집스런 사회체제에 기인한 것인지 시간과 세월의 무자비함이랄까 무상함 때문인지 알 수없는 것이었지만 아무리 크고 강성했던 국가라도 흥망성쇠의 법칙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았다.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몰락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에 허무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스파르타의 유적을 다 둘러보는 데 약 두 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고 시간이 딱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시내를 천천히 돌아보며 식당을 찾아 보았으나 유적지를 둘러 보며 실망한 마음 때문인지 그 어느 곳도 별로 마음에 차지 않아 그냥 다시 미스트라스로 돌아가 어제 갔던 식당에 다시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스파르타에서 미스트라스로 통하는 7km의 거리는 시원하게 일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길 양옆으로는 가로수가 멋지게 자라 있어 답답했던 마음이 다소 풀어지는 듯 했다. 고대 스파르타 당시에도 이 길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멋대로 이 멋진 길을 스파르타의 병사들과 장군들이 말을 타고 힘차게 내달렸을 것을 상상하면서 스파르타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 달래볼 수 있었다. 미스트라스 시내는 시내랄 것도 없이 조그만 마을이어서 우린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생수 한 병과 마침 갑자기 먹고싶은 마음이 생긴 복숭아와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아주 작은 잡화점에 들렀다. 가게 내부는 좁고 어두웠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해준 매부리코를 한 아주머니마저 약간 불친절했기 때문에 살짝 마음이 상했다.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관념을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였다.
가게 밖으로 나와 사정없이 내려쬐는 햇빛 속에서 조금 걷다 보니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상이 보였다. 참으로 잘 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얼굴은 제국의 최후와 함께 한 그의 운명 때문이었는지 어딘가 침울한 빛을 감출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진 표정으로 보였다. 그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조차도 비운의 황제 얼굴을 새기면서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그는 미스트라스에서 대관식을(1449년) 거친 후 성실하게 황제직을 수행했으나( 그는 재위 기간 동안에도 그 이전에도 체통에 거슬리는 짓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동로마제국의 고토 회복에 힘을 기울여 옛날에 잃었던 많은 영토를 수복해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거의 전 지역이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튀르크의 메흐메트 2세의 끈질긴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폴로스의 방어가 위험해지자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싸웠다고 한다. 이윽고 그 튼튼했던 3중 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함락되자 그도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황제의 지위를 나타내는 모든 표식을 몸에서 떼어낸 후의 일이어서 그의 시체는 결국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과 함께 역사상 가장 길게 1100년 이상 존속했던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재위 1449~1453년) 동상은 그가 ‘모레아’의통치자로서 사랑해 마지 않았던 이곳에 세워지게 된 것 같다.
스파르타도 미스트라스도 이제는 모두 아득한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과거의 영광과 찬란함도 많은 부분이 흙속에 묻혀 잠들어 있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잊혀진다. 원래 모든 것이 그런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그래도 또 아쉽고 슬프고 미련이 남고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