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평범하지 않은 곳에 평범하지 않은 호텔을 찾아내는 특이한 재주가 있다. 나라면 거의 선택의 범위에 들어오지 않을 호텔을 찾아내서 나를 항상 놀라게 한다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 그런 의외성이 좋아서 (실제로는 머리 썩이며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호텔 선택을 그에게 일임하곤 한다. 이번 미스트라스(Mystras) 에서의 호텔도 그랬다. 호텔을 찾기 위해 미스트라스 시내에 들어섰는데 남편은 차를 자꾸만 산쪽으로만 몰고가서 내가 왜 이상한 방향으로 가느냐고 하자 호텔주인이 이메일에 쓰기를 미스트라스 성 근처 산의 슬로프에 위치해 있어 경치가 좋다고 했으니 우선 산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번에도 엉뚱한 데다가 호텔을 잡아놨구나 하며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호텔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과연 호텔은 요새가 있는 산의 성채들과(620m)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주차를 시킨다음 돌아보니 저 아래에 7km나 떨어진 스파르타가 발밑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보일 정도로 높이 올라와 있었다. 나플리오에서도 위치 때문에 화가 났었으나 동화같은 분위기의 방 모습때문에 마음을 누그려뜨렸던 나는 이번엔 또 어떤 방이 나오려나 약간의 기대마저 하게됐다. 리셉션에 있는 직원이 아직 방이 정리가 안됐으니 한 시간쯤 후에 와 달라는 말에 따라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동네산책겸 길을 따라 내려갔다. 리메니 호텔에서 10시쯤 체크아웃을 하고 일찍 떠나온 관계로 12시쯤이었으니 체크인 시간으로는 너무 일렀던 까닭이다. 주위의 평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치고는 교회와 버스정류장, 작은 읍사무소 비슷한 것도 있었고 식당과 호텔도 각각 서 너개쯤이나 있는 듯 했다. 우리는 뭐 멀리 갈 것도 없이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갔는데 이번에도 운이 좋았는지 음식 맛이 썩 좋았고 나중에 보니 Tripadvisor에도 추천된 식당이었다. 남편은 램찹(양갈비 스테이크)을, 나는 포크수블라키를 시켜서 그릭샐러드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끝냈다.
식사 후에 다시 리셉션에 가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방을 함께 열어본 나는 와우!! 하는 감탄사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방은 널찍했고 소파와 테이블, 탁자, 책상과 의자, 벽난로, 작은 부엌까지 딱 제자리에 맞춤으로 배치되었고 이번에는 또 전체적인 분위기가 따뜻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는 주황색이었다. 스위트룸이고 이 호텔에서 제일 위치도 좋고 넓은 방이라는 직원의 설명이 전혀 과장으로 들리지 않을 만큼 방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 정도 방이라면 오케이, 산으로 좀 올라왔기로소니 그쯤이야 뭐 대수겠냐는 마음으로 확 풀리는, 아니 그 이상이었다. 발코니로 향하는 문을 열면 푸른 잔디밭과 듬성듬성 서 있는 키 큰 나무들도 볼 수 있으니 그것 또한 금상첨화였다. 방은 보면 볼수록 괜찮아서 이틀만 묵기가 아쉬운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미스트라스 성채와 요새를 보러 갈 차례였다. 메인 게이트로 들어가니 매표소 직원이 표를 잘 간수하라고 당부했다. 그 표는 메인게이트(Main gate)와 요새게이트(Fortress gate) 둘 다 입장이 가능하니 여기로 들어갔다가 힘들면 나가서 다시 차를 타고 요새게이트로 올라가서 입장할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을 곁들였다. 아마도 이런 설명은 입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 주었을테니 쉽지 않은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말고도 많은 관광객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앞에 가고 있었다.
미스트라스는 "모레아의 경이"라고 일컬어지며 중세 비잔틴제국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이 아름다운 중세도시의 역사도 그리스 전체의 역사 못지않게 신산하고 험난하고 가슴 아프다. 미스트라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고대 도시 스파르타와는 7km 정도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도시이다. 인구가 천 명이 채 못 되는 작은 도시이니 과거의 영광이었던 미스트라스의 성채와 요새가 없었다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스파르타에 더 관심이 많아서 그쪽을 좀 찾아보다가 미스트라스가 더 매력적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쪽을 향해 왔으니 말이다.
미스트라스의 역사는 13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던 4차 십자군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이 더 좋은 목표(먹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베네치안 공국과 힘을 합쳐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한다. 1204년 5월 4차 십자군 원정대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라틴제국이 건설된 뒤 십자군의 각 세력들은 동로마제국을 4개로 분할하여 통치하게 된다. 그때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차지한 세력이 프랑스계인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 1세였고 팰로폰네소스의 너른 땅에 아카이아 공국을 건설한다. 그후 조프루아2세에 의해 안정기를 보내고 다음 자리를 넘겨받은 4대 공작인 기욤 2세는 1249년에 수도를 안드라바다에서 미스트라스로 옮겼다. 1248년부터 요새 건설을 시작하여 1249년까지 2000m이상의 무시무시한 산들이 즐비한 타이게토스 산맥의 한 지맥인 높이 620m 의 산 꼭대기에 요새가 완성된 후 그 아래 중턱까지 궁전과 교회, 수도원들을 건설하면서 미스트라스는 본격적인 라틴계 도시로서 발돋음해 나갔다. 그러나 1262년 비잔틴제국을 탈환한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미하엘 8세에게 팰라고니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왕국의 일부를 빼앗기고 비잔틴 제국에 복속하게 된다. 그때부터 여러 왕조와 여러 왕들을 거치면서 정치적 불안정을 겪다가 1308년부터는 비잔틴제국에서 파견한 총독들에 의해서 통치됐다.
1349년에 모레아(,펠레폰네소스의 옛이름) 군주국이 되어 동로마제국의 한 제후국이 되며 미스트라스는 그 수도로서 제2의 번영기를 맞는다. 그후 1460년 5월 30일에 오스만튀르크의 무하마드 2세에 의해 멸망당하기까지 약 100년간 미스트라스는 비잔틴제국 안에서 콘스탄티노플 다음 가는 지위와 명성을 누리며 예술과 학문, 문학, 종교적 분야에서 전성기를 맞는다. 그 시기애 이름을 떨쳤던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라톤은 학문적 깊이가 매우 심오해서 많은 학자들을 미스트라스로 끌어모아 학문의 중심지로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그리스 전체를 끌고가다시피 하며 지중해문화권에서 매우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미스트라스는 다른 도시들이 그저 그렇게 명맥을 이어가는 동안 그리스의 문화부흥기를 이끈 중요한 장소였다.
16세기에는 다시 베네치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기도 했다가 18세기 알바니아인들의 침입과 약탈, 그들에 의한 화재로 도시의 상당부분이 파괴되며 위기를 맞는다. 결국 1832년에 그리스에 왕정이 이루어지며 재위하게된 오톤1세는 미스트라스의 주민들과 도시 주요기능을 7km 떨어진 스파르타로 옮기게 하면서 미스트라스는 완전히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미스트라스의 유적들은 대부분 비잔틴 양식의 궁전이나 성당 등의 건축물들과 미술품들이다.성 데메트리오스에게 봉헌된 매트로폴리스성당(Metropolis)과 페리블렙토스성당, 판타나싸(Pantanassa)수도원, 아야 소피아(Hagia Sophia)성당 들은 많은 부분들이 다시 복원되어 기념관이나 박물관 등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성당의 프레스코화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매우 아름답고 독특해서 비잔틴 문화와 예술의 정수를 구현하고 있다.
윌리엄 2세 궁전은 지금도 복원작업이 한창이고 성곽 안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수녀님들이 살고 있는 판타나싸 수도원에는 고양이들도 같이 살고 있고 꽃들이 예쁘게 핀 정갈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1264년에 세워진, 성 데메트리오스에게 봉헌된 메트로폴리스는 비잔틴제국의 비극적 운명과 마지막을 같이 한 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미스트라스 성채 아래 동네 중요 지점에 그의 동상이 서 있다) 약식 황제 대관식(정식 대관식에서는 정교회 세계총대주교가 주관해야 하나 미스트라스에는 그가 없었음) 을 통해 황제로 즉위한 곳으로서 교회 한 가운데에 목조로 된 화려하고 위엄이 있는 옥좌가 있고 바닥에는 대리석 석판에 비잔틴제국을 상징하는 머리 두 개 달린 독수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런 여러가지 역사성과 제국의 상징성, 건물들과 작품들의 예술성 등을 인정받아 미스트라스는 1989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람에 의해 버려졌고 식물들이 성벽을 쪼개고 언덕 기슭을 뒤덮으며 잠식하여 역사의 연약한 흔적들을 여기 저기 파괴하고 있지만...“ 으로 시작하는 유네스코 등재 기록은 읽는 것만으로도 콧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나는 미스트라스 성채에 들어가기 전 아래 동네에서나 내가 묵었던호텔에서 멀리 미스트라스 성채를 조망할 때마다 예쁘고 멋있는 것은 그렇다치고 왜. 저렇게 높은 산비탈에 도시를 건설했을까가 몹시 궁금했다. 미케네 왕국의 궁전도 산중턱부터 꼭대기에 지어진 바 있고 펠로폰네소스반도 전역에 수없이 많은 높은 산들에도 여기저기 산속 마을이 무수했으니 그리스에서 도시가 산에 지어진 것이 아주 별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왜 그렇게 꼭 산비탈에 위험하게 걸쳐져 있는지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물론 그 첫번 째 이유는 방위와 안전이 최우선적 목적이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사도 45도 이상의 가파른 산 언덕에 지어진 성채는 그래서 더욱 위험스레 아름답고 그 폐허의 잔해들은 더 안타깝고 처연하게 가슴에 울림을 가져오는지도 모른다.
성채 도시는 몇 몇 중요성이 있거나 복원된 건물들 말고는 대부분 허물어지고 파괴된 채 버려진 모습들이었다. 중간중간 걷기 편하게 정비된 길도 나오지만 거의가 험한 길들이어서 자칫 방심하면 꼬꾸라져 넘어질까 무서울 정도로 반들반들하고 미끄러웠다. 그리스의 길들에는 대부분 돌들이 깔려있지만 어떤 길들은 좋은 대리석으로, 어떤 길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싼 대리석으로, 또 어떤 길들은 그냥 주위 산에서 집어 왔을 듯 싶은 평범한 돌로 깔려 있다, 이 성채의 길들은 마지막 후자에 속한다. 근데 이런 길들의 공통점은 모두 미치도록 미끄럽다는 것이다. 비탈진 곳에서는 방심은 금물, 미끄러지기 십상이라 항상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래된 건축물이 주는 느낌은 참으로 이상하다. 건물이 아주 화려하거나 정교하거나 보존이 잘 되어 있거나, 않거나에 상관 없이 그저 가슴 서늘하게 아름답다. 성곽이나 돌담들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채 허물어진 모습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것들은 또 너무 쓸쓸해 보여서 가슴을 찌르르 자극했다. 건축물도, 동물들도 식물들도 인간들도 언젠가는 이지러진 모습으로 쇠퇴하고 죽는다. 그래도 가장 오래 모습을 유지하며 살아남는 것이 돌로 된 건축물이다. 그러나 <생자필멸> 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너진 폐허들이 쓸쓸한 까닭은 그것들이 언젠가는 다가올 우리의 운명을 예고하고 있어서 그리도 처연한 것일까? 이 마음을 단순히 동병상련으로 치부하고 말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폐허는 폐허대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학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퇴색되고 변형되고 무너진 채로. 이곳의 비잔틴 건물들은 대개 둥그런 돔 모습의 지붕이 많고 그것은 붉은 벽돌색이었으며 기둥과 벽의 누런 황토색들과 잘 어울렸다. 안으로 들어가면 돔의 둥그스런 지붕 안쪽에 예수님 상이 프레스코화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고 그 그림들은 대부분 잘 복원되어 선명한 색으로 눈길을 끈다. 그 중심의 회랑을 좌우 앞뒤, 십자형의 회랑들이 아치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벽마다 코너마다 정성스레 그려진 이콘(성화)들이 장식되어 있다. 천장에서 길게 늘어뜨린 줄에 달려있는 샹들리에는 또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리스 정교회의 건물들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경건함은 카톨릭 교회의 그것과는 또 다르다. 훨씬 화려한 모습이어서 어리둥절 하게 만드는 한편으로 또 거기에 담긴 정성과 신심에 깊이 감동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다. 그리스 사람들의 마음에 아직도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타오르는 경건한 신앙심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성채 중간쯤에 위치한 판타나싸 수도뤈에는 아직도 수녀님들이 살고 계신다고 해서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기대를 했는데 마침 아치형 수도원 문을 들어서자 까만 수녀복을 입고 계신 아주 나이 드신 수녀님을 한 분 뵐 수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체면 불구하고 사진을 한 장 찍어도 되겠느냐고 여쭸더니 수녀님은 망설임 없이 그러라고 하셨다. 사진 속에 찍힌 수녀님의 얼굴은 어린애처럼 천진하고 인자하고 평온해 보였다. 수녀원 내부는 볼 수 없었고 마당만 둘러 보았는데 작은 담 옆에는 산에서 내려온 시원한 물을 맛볼 수 있는 수도꼭지가 있어서 틀어 보았더니 과연 찬 물이 콸콸 쏟아져 내렸다.
더 올라가니 이 요새를 처음 축조하기 시작한 기욤 2세의 궁전이 보였는데 그 규모가 엄청 커서 놀라웠다. 궁전은 지금 한창 보수중이어서 출입이 안 되었지만 규모와 아름다움이 다른 건물을 압도하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올라가고 일단 내려갔다가 다시 차를 타고 올라가서 요새 게이트(Fortress Gate)로 들어가 요새를 자세히 보기로 했다.
요새는 정문을 지나고도 한참 더 올라가야 해서 더운 날씨에 꼭대기까지 가려면 상당한 각오가 필요해 보였다. 그래도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는 일, 젖먹던 힘까지 내기로 했다. 꼬불꼬불한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가니 드디어 요새의 끝이 보였다. 다 올라가서 내려다 보니 저 아래까지 성채의 건물들이 보였고 더 아래에는 저 멀리 스파르타 도시의 모습도 보일 정도로 높은 지점이었다. 나는 비로소 미스트라스까지 온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상쾌해졌다. 그러나 몸은 지칠대로 지쳐서 다시 또 내려가야 하는 길을 보며 긴장이 느껴졌다. 요새 위는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그 옛날의 병사들이 순찰을 돌며 쉬고 활동하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군데군데 병사들이 몸을 뉘였을 사각형의 공간이 천장은 떨어져 나간 채 앙상한 벽들만이 남아서 시간의 흔적을 느끼게 해주었다.
거기서 허물어진 벽들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 이제는 내려가야 할 시간이었다. 내려가는 계단은 잠시도 한눈을 팔아서도 안되고 발을 삐끗해도 안되는 미끌미끌한 돌길의 연속이었다. 내려가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서부터 타들어가기 시작한 목은 점점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 되면서 나를 압박해 왔으나 참을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물을 더 많이 가져올걸 하는 후회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중에 호텔에 가서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는데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고 몸이 계속 물을 요구하는 것 같아서 무슨 큰탈이 나는 건 아닌가 심히 걱정되었다.
미스트라스 순례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 가파르게 경사진 산속에 나무들과 건물들과 무너진 잔해들과 성벽들이 말없이 서 있던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 잔상 속에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떠났고 성채의 반 이상은 파괴되고 폐허가 된 채 바람 속에 쓸쓸히 서 있던 모습들이 멸망해버린 비잔틴 제국만큼이나 허허롭다. 혼령처럼 떠도는 무언가가 그 도시를 아름답고도 슬프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