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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션트 올림피아(Ancient Olympia)

by olive


에인션트 올림피아로 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전혀 몰랐던 일이었지만 펠로폰네소스반도는 산, 산, 산, 또 산... 그리고 산이었다. 내가 그동안 막연히 품고 있던 상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전에도 미케네와 에피다우로스. 나플리오 등을 간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산에 압도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우리가 직접 차를 운전해서 돌아다녀보니 이건 뭐 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산악지대라는 것을 몸소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이런 땅에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그렇게 빈번한 전쟁의 역사를 쓰고 그렇게 위대한 문명을 발전시켰던 것일까 놀라움과 찬탄으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나플리오에서 이틀간을 머물다가 드디어 저쪽 반도 서편의 올림피아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차를 렌트하기로 했다. 대중교통으로 움직이기에는 도시간 이동이 매우 불편할 것 같았고 시간적 로스가 많을 것 같아서 불가피하게 내린 선택이었다. 가는 길을 어떻게 잡을까 고민하다가펠로폰네소스반도 중부지방의 교통의 요지인 트리폴리(Tripoli)를 거쳐서 가면 무난할 것 같아서 그렇게 경로를 짰다.


나플리오에서 머물던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체크 아웃을 하고 렌트카업체에 들려 차를 픽업한 다음 이것저것 차에 대한 메뉴얼을 듣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이 차는 기아가 자동이라서 수동보다 훨씬 큰 돈을 지불했는데도(아직도 유럽에서 굴러다니는 차들 중에는 여전히 수동이 많다) 타고 보니 네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이거 참 낭패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에서는 아직도 네비게이션이 필수가 아닌 듯 싶었다. 계약 당시 여직원의 말로는 네비게이션이 있는 듯 했었는데 이게 왠일인가 싶었다. 네비게이션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자동 옵션인 줄 알고 미처 따져보지 않은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6일 동안, 그것도 마지막 날은 10시간밖에 안되는 기간 동안 자그마치 현금 480유로를 냈는데도 우째 이런일이? 어찌 보면 아테네 같은 큰 도시에서 차를 렌트하지 않고 소도시인 이곳에서 차를 렌트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패착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우리나라 기준에 맞추어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대도시던 소도시던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 생각하면 인터넷 사용을 우습게 생각하고 그까짓 것쯤 없어도 살아가는 데, 여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의 아날로그적 사고방식이 근원적 문제였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이상한 고집에 사로잡혔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이다. 아울러 우리는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진 사람들이며 어쩌면 천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쨋든 차를 이미 계약하고 싸인까지 하고 선불로 현금지급까지 했으니 되돌릴 수도 없고 마침 어제 만약을 위해서 지도를 사놓았던 터라 렌트업체에 항의하며 열불내기도 싫어서 운전시작하고 한 몇백 미터 쯤 가던 차를 그대로 운전하며 몰고 나갔다.


당연히, 물어보지 않아도 100%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네비게이션이 없다는 것은 그러므로 앞으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경우 아주 곤란해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황당했고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지만 이제와서 따진다고 해본들 그들이 순순히 자기네들 잘못으로 인정하지 않으리란 것이 자명했기에(사실 이건 누구의 잘못인지 알 수도 없다) 네비게이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보지 않았던 우리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하고 상황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2~3 분쯤 지나니 주유소가 보여서 기름을 넣으러 들어갔다. 일단 50유로치 기름을 넣고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싸이드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남편은 싸이드 브레이크를 앞뒤로 좌우로 만져보고 흔들어보고 쾅쾅 때려보기도 했으나 얘는 마이동풍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기름을 다 넣고 난 뒤에도 출발하지 않자 뭔가 이상함을 느낀 주유소 주인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럼에도 싸이드 브레이크가 젖혀지지 않는 것을 알아채곤 어떻게든 해보려 했으나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우린 할 수 없이 렌트카업체에 전화를 하여 주인아저씨를 바꿔주었다. 그들끼리 한참을 뭐라고 그리스어로 떠들더니 주인아저씨가 싸이드 브레이크를 올려서 당기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남편이 마음이 급했던지 싸이드 브레이크 작동법을 못 들었거나 아니면 듣고나서도 까먹은 모양이었다. 해프닝을 뒤로 하고 제1차로 트리폴리까지 가기 위해 차를 몰고 갔다.


지도를 보면서 한참을 달렸는데도 나와야할 트리폴리 시는 나오지 않고 계속 시골풍경만 이어져서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건 확실히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지도상 30분이면 충분한 거리인데 왜 도시 풍경이 아닌 시골 풍경인 것인가? 우리는 망설일 것도 없이 차를 돌렸다.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서 그만큼 가자 드디어 트리폴리 표지판이 보였다. (그리스는 길 표지판이 아주 인색하게 설치돼 있다. 우리나라처럼 미리미리 두 세번 표지판으로 안내를 해줘서 상황을 대처하게 해 준다는 것은 그리스에선 기대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한번 못 보면 그것으로 끝. 운전자가 어떤 고생을 하건 그리스 공무원들로선 내 알 바 아닌 일이다) 이런, 여기서 표지판을 못 보고 그대로 지나친 것이 분명했다. 12시도 안 되었는데 불운의 3연속이라니!!! 왠지 앞으로의 여정도 만만치 않을 것이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제대로 길을 들어섰으니 이젠 괜찮겠지 하던 기대와는 달리 문제는 첩첩산중이었다. 네비게이션 없이 다른 나라에서 지도에 의지해서 운전해 간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 가는 곳을 찾아갈 때 길에 표지판이 친절하게 잘 표시만 돼 있어도 힘은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는 표지판이 요소요소에 잘 배치돼 있지 않았다. 길이 갈라질 때 있어야 마땅한 표지판은 보이지 않았다. 그 표지판이라는 것도 글씨가 우리나라 것의 절반 크기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도 먼지가 잔뜩 묻어 있어서 판별하기가 어려운 것이 너무 많았다. 운전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배치돼 있어야 함에도 그런 고려는 안중에 없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문제인 것은 운전은 남편이 하는 대신 지도를 봐가며 표지판을 보아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남편은 그리스어 공부를 한 사람이라 그리스어로 된 책을 읽는 정도였지만 나는 이런 일을 예상해서 미리 그리스어 문자를 충분히 공부해 둔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마 예전에 그리스를 몇 번 왔을 때 재미삼아 그리스어 읽기공부를 했지만 그것마저도 4년 동안 그리스에 올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다 까먹고 아주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가 아테네에 있었던 이틀 동안 돌아다니면서 예전의 기억을 되찾아 떠듬떠듬 읽는 형편이었으니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찾기였을 것이다. 거기에 또 문제는 대부분의 대문자는 그나마 읽기 쉬웠지만 소문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완전히 수학 기호 읽는 생경한 느낌을 준다. 그래도 시간만 있고 안정적인 상황이라면 시간이 걸려서라도 어떻게든 읽었겠지만 흔들리는 차안에서 그 깨알같은 글자를 읽기란 내 나이에는 언감생심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길 안내 표지판에는 커다란 도시는 영어로 같이 병기되어 있었지만 우리나라 읍이나 면 소재지처럼 작은 마을은 영어 표기 없이 그리스어로만 씌여져 있었다) 나플리오 버스정류장에서 파는 지도는 그리스어로 된 것밖에 없었고 당연히 네비게이션으로 쉽게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 복잡하게 꼬여버린 이런 상황에서 더욱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그런 상황에서 어렵사리 트리폴리를 지나 얼마동안 달렸는데 시간을 절약해 보겠다고 지도상에 보이는 빠른 길로 접어든 것이 그렇게 끔찍한 상황으로 변할 줄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팰로폰네소스 반도는 엄청나게 험준한 산악지형이 많다. 그것도 몇 백 미터 수준이 아니라 천 미터 이상에서 이천 미터 이상의 산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리스는 인프라스트럭춰가 잘 갖춰진 나라가 아니다. 필요에 의해 산길을 뚫어놨지만 안전을 보장하는 그런 수준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겨우겨우 갈 수 있는 길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방향에서 차가 달려올 경우 우리는 멈춰서서 그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숨을 돌리고 나서 지나가곤 했다. 그런 산속에도 그런데 가끔씩 산속 마을이 나타났고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작은 표지판이 언뜻 나타날 때마다 그 표지판을 읽느라고 등에 땀을 흘리며 고생했다. 옛날에 강원도 속초나 강릉으로 가려면 한계령이나 미시령을 자동차로 넘어가야 했는데 그런 한계령 산길을 그것보다 훨씬 높은 높이에서 십 몇 배를 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산꼭대기를 향해 구불구불 수 킬로미터를 올라갔다가 또 수 킬로미터를 내려오고 그런 과정을 한 열번 쯤은 반복했던 것 같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길에서 느껴졌던 그 무력감이란!! 산속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되면 어쩌나 하는 가당치 않은 공포감도 밀려왔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쭈뼛쭈뼛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놀라운 것은 그렇게 높은 산속에도 군데군데 마을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 사람들한테 산속이란 아무 장애도 안 된다는 듯이 그렇게 높은 산속에도 마을이 매우 자주 보였다 . 우리가 보기엔 이렇게 엄청 높은 곳에서 불편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궁리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차분히 그리스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들이 산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하나 둘 이해가 되었다. 우선 너무나 자주 전쟁을 치르며 살았고 외적의 침입이 잦았기 때문에 방어가 손쉬운 높은 산이 더 유리했을 것이고 평야가 적은 지형상 올리브 농사라도 지으려면 산이건 언덕이건 가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도 가는 중간에 쉬기도 할 겸, 차라도 한 잔 마실 겸 해서 산속 마을 공터에 가까스로 비집고 들어가 주차해 놓고 카페에 들어갔는데 산속의 카페가 오래된 듯 세월이 느껴지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로 꾸며져 있어서 기분 좋게 차를 마시고 나올 수 있었다.


한 시간 반 이상을 산속에서 헤매다가 드디어 평평한 땅에 내려왔을 때의 느낌은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뿐이었다. 그후에도 작은 마을이름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읽으면서 고생고생하며 겨우 에인션트 올림피아에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올림피아는 아주 너른 평원에 위치한 한적한 시골도시의 느낌이었다.

도시는 매우 조용했고 평온했으며 다른 도시들이 메마르고 건조한 느낌을 주는 것과 달리 이곳은 나무도 많고 푸른 색의 그린이 많은, 한눈에도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풍요로운 도시라는 느낌을 주었다. 심지어 고고학 박물관 옆에는 다른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강도 조그맣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클라데오스라는 강이었고 강폭도 좁고 졸졸 흐르는 수준이었지만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 바로는 물이 거울같이 아주 맑아 보였다, 강이라니!! 이곳이 왜 고대 올림픽 제전의 탄생지가 되었을지 짐작이 갈만 했다. 그만큼 이 에인션트 올림피아는 여러가지 조건에서 풍요롭고 기름지고 넓은 평원에 있고 나무와 물이 많은 아름다운 곳이었던 것이다. 지리학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누구나 탐낼만한 비옥하고 편안하고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올림피아에서 우리가 예약해 놓은 호텔은 중심가 초입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다른 곳과 달리 여기서는 1박만 할 예정이어서 남편은 아주 평범한 호텔을 예약해 놓은 것 같았다. 특별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호텔이었지만 다행히 방은 넓었고 아주 깨끗했다. 침대 위에 단정하게 개어놓은 타올도 톡톡하고 두꺼워서 기분이 좋았다. 우리가 간단하게 체크인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나가려는데 우리의 계획을 훤히 꿰고 있다는 듯이 프론트의 직원이 친히 식당 두 곳을 추천해 주었다. 그 중 한 곳의 이름이 "암브로시아"였는데 남편은 이름이 마음에 든다며 거기로 가자고 했다. 암브로시아는 "신들의 음료"라는 뜻이란다. 직원 말로는 정원이 매우 예쁘게 가꿔져 있고 음식맛도 최고라고 하며 더군다나 그곳은 내일 오전에 갈 예정인 고고학 유적지 및 고고학 박물관 입구 바로 옆이었으니 길도 미리 알아둘 겸 괜찮은 선택이 될 것 같았다.


올림피아의 주요도로는 하나이다. 길게 뻗은 도로 양 옆으로는 빼곡하게 선물가게나 카페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대로변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식당과 호텔, 주택 등이 있었다. 호텔에서 한 15분쯤 걸어가서 길 끝에 다다라 길 안쪽 왼쪽으로 돌아가자 너른 잔디 위에 자리한 식당이 보였다. 그 직원 말처럼 나무도 많고 꽃들이 예쁜 곳이었다. 몇 백년은 됐음직한 아름드리 나무가 시원하게 그늘을 펼쳐주고 있었으며 그 그늘 아래에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점심 먹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손님은 한 팀, 네 명이 전부였지만 우리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에 앉아 주문을 했다. 음식은 직원 말대로 맛있었고 노심초사하며 마치도 죽음에서 살아온 듯한 기분이었던 나는 훌륭한 음식에 기분이 조금 살아났다,

점심을 먹고 나서 길 양옆 가게들의 기념품들에 눈길을 주면서 천천히 걸어와 작은 도시를 한 바퀴 돌고 호텔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나니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오늘 저녁 스케줄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은데다가 점심에 시킨 메뉴가 양갈비와 기로스였는데 그것말고 그릭샐러드에, 식전 빵(평소에는 좀처럼 먹지 않는 편인데 먹어보니 맛이 좋아서 많이 먹었다)에. 좀 많이 먹은 듯 해서 저녁을 또 먹는다면 탈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접시에 수북히 나왔던 감자 칩은 손을 안댔는데도 그랬다. 남편은 fishlover이고 나는 meatlover 여서 나는 고기종류를 주로 먹는 편이고 남편은 생선요리를 주로 먹는데 식사때마다 남편은 잔소리를 잊지 않는다. 고기를 멀리 하고 생선을 좀 더 먹으라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지만 생선비린내가 역겨운 나는 좀처럼 생선요리에 손이 가지 않는다. 익히지 않은 생참치통조림도 나는 비려서 못 먹는다. 단 참치회는 잘 먹는다. 비린내가 나지 않는 연어나 옥돔, 새우 등은 나도 좋아하지만 해외에 나와서 그런 것은 찾기가 쉽지도 않을 뿐더러 값도 훨씬 비싸서 만만하게 먹게 되지 않는다.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못 먹는 것과 동격인데 무조건 먹으라고 강요당한다는 것은 많이 억울한 일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배에 뭔가를 더 집어넣으면 필시 소화도 못 시키고 꺽꺽거릴 것이 분명하기에 저녁 먹지 말고 오늘은 그저 쉬기나 하자고 하니 남편도 오케이 동의를 해주었다.


나플리오에서 오면서 천신만고 끝에 고산준령을 넘고 넘어 운전을 한 탓인지 남편은 그대로 곯아 떨어졌고 나도 온몸이 피곤했지만 텔레비젼에서 음악프로를 보기도 하고 오랜만에 가능해진 인터넷으로 뉴스도 열심히 보면서 쉬다가 10시쯤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호텔 조식을 먹고 사람들 몰리기 전에 일찌감치 고고학 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9시쯤에 고고학 박물관에 도착했는데 숲속에 자리한 그곳의 공기는 아주 맑았고 새들의 지저귐도 시끄러울 정도였고 덥지도 않았다.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에선 끊임없이 꽃 향기가 풍겨왔다. 우리는 먼저 박물관 내로 들어갔는데 예상 외로 전시품이 많아서 놀랐다. 고대 올림픽 발상지라는 피상적인 상식만을 갖고 왔던 나는 이곳이 그 이상의 엄청난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놀라움이 점점 커져갔다.

이곳은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 신들의 왕인 제우스에 바치는 제전이 행해지던 곳이었다.


박물관에서도 제일 넓고 좋은 자리에 제우스 신상의 상상도가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 제우스 신상은 기원전 435년에 천재 조각가 페이디아스(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도 그가 건축한 것이며 그는 그 당시에 이미 천재조각가 및 건축가로 명성이 자자했다)가 8년에 걸쳐 제작한 것이었는데 394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져서 세워졌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전설처럼 전해 내려왔던 제우스신상의 존재는 1958년에 에이션트올림피아터 발굴 작업 중 제우스신전 유적터에서 제우스상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인정받기에 이른 것이다.


제우스 신상은 금과 상아가 덧붙여진 장식으로 그 화려함과 정교함과 우아함에서 다른 모든 것들을 제쳐놓을 만큼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호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신들의 왕, 제우스의 이미지를 가장 완벽하게 조각으로 재현해 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들 중 최고의 신으로서의 위엄과 권위, 인간들을 다스리고 가르치는 아버지로서의 자상함과 너그러움, 궁극의 판단과 처벌을 내리는 최종심판자의 엄중함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하는 제우스 신상은 고대의 모든 조각상 중에서도 최상, 최고의 조각상으로 평가받았으며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고대 올림픽에 참가한 모든 선수들은 경기에 앞서 제우스 신께 제사를 드리고 공명정대하게 경기를 치를 것을 맹세했다고 하며 최종우승자에게는 올리브가지로 만든 월계관을 씌어 주었다고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올림픽 정신은 물리적, 세속적인 의미보다는 인간존중의 숭고한 의미가 더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올림픽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그 의미가 잘 지켜지는 세계인의 축제로서 이 올림픽 유적지에 와서 그 유적들을 직접 만나보며 인류의 정신적 유산에 깊이 감명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에인션트 올림피아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의 숫자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다른 박물관의 유물들과 좀 달랐던 것은 유물 중의 대다수가 토기와 청동기 시대의 제기들, 또는 무기들(갑옷과 투구, 창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리석으로 된 조각상들도 많았지만 머리가 떨어져 나간 것이 대부분이었다. 올림피아의 최초 목적이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었던 만큼 특히 청동으로 된 세발짜리 제기가(Bronze tripod legs) 유달리 눈에 많이 띄였다. 그리고 가마솥(Cauldron)에 붙은 장식도 특이한 것이 많았는데 날개달린 새의 모양이라든가 동물모양(zoomorphic) 발의 그 여러가지 형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각상들 중 눈에 띄는 것은 중간쯤에 있었던 전시실에 니케 여신상(The Nike of Paeonios) 은 홀로그램으로 보는 복원도와 함께 전시되어 있었는데 “마치도 승리를 선포하기 위해 올림포스에서 날아와서 내려앉는 듯한 인상을 준다”라고 묘사되고 있다.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헤르메스 신도 아기를 님프에게 데려다 주라는 제우스의 심부름을 수행하던 중 잠시 쉬고 있는 모습으로 아기 디오니소스를 안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제우스 신전과 헤라 신전 등에서 떨어져나온 페디먼트 부조들은 따로 전시돼 있었고 이 박물관에서 특이했던 유물은 다수의 유리 그릇과 꽃병, 제기들이었는데 기원전 시대에 어떻게 그런 유리 제조기술까지 있었는지 놀라웠다. 21세기 현대인이 4천년~5천년 전의 고대인보다 잘났다고 으스댈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현명해진 것일까?

박물관 안의 유물들도 흥미를 끄는 것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발굴된 유적들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유적지로 발을 옮겼다. 입구를 들어서니 바로 오른쪽에서 천막을 치고 발굴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성역 경내인 '알티스' 즉 "신성한 제우스의 숲"에는 여러 신전 터들이 산재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헤라 신전과 제우스 신전이었고 또 펠롭스 신전과 경기장(stadium)은 지나치면 안되는 핵심적인 장소였다. 그밖에도 다른 신전과 보물고, 봉헌물, 관리실 등이 있었다. 이것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역 내에 있었고 밖에는 숙박시설과 체육시설, 목욕탕 등이 있었다고 한다. 올림피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제우스 신전은 도리아식 신전으로서 정면에 6개의 기둥과 양 옆에 13개의 기둥이 있는 웅장한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면 페디멘트에는 펠롭스와 오이노미오스가 전차경주를 준비하는 장면이, 뒷면 페디멘트에는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족이 싸우는 장면이 부조로 새겨져 있었는데 이것은 따로 떼어져서 박물관 안에 전시되어 있다.

해라 신전은 올림피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이고 좁고 긴 모양으로 가로 6개, 세로 16개의 기둥으로 받쳐져 있었고 소주랑이 없는 신전으로서 설립 시기는 기원전 6세기 혹은 그 이전인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제우스 신전과 헤라 신전 사이에는 영웅 펠롭스를 위한 성소도 있는데 나에게는 이 건물의 아름다움이 특히 마음을 끌었다. 그것은 반원형의 신전으로서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가 세웠다는 설도 있으나 펠롭스라는 이름은 탄탈로스의 아들이자 아트레우스의 아버지, 즉 아가멤논의 할아버지로 보는 것이 더 강력한 설로 여겨진다. 몇 개 남아있는 대리석 기둥들이 끈질기게 살아 남아서 올림피아에서 가장 원형에 가깝게 남은 건물로 내게는 그 고아한 아름다움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필리페움이라고도 불리며 펠로폰네소스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옛날에 이 신전들이 허물어지지 않은 완전체의 모습으로 서 있었을 때는 얼마나 지극하게 아름다웠을지를 상상해 보며 나는 이 특별한 장소에 서 있는 나에게 오길 참 잘했어, 라며 미소지었다.

B.C. 4 세기 중엽에 원래 있던 위치에서 북동쪽으로 옮겨진 경기장(stadium)은 입구의 둥근 아치가 옛모습 그대로 소박하게 서 있다. 생각보다는 크지도 않고 높이도 낮은 편인 아치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특별하고 귀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거기서부터 약간의 흥분된 감정으로 아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하며 경기장 안에 들어가면 직접 스타디움에서 뛰어 보겠다며 둘러멨던 가방과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기도 한다. 경기장 트랙은 그리 크지 않아서 보통 사람이라도 충분히 한 바퀴 돌만한 정도였다. 남편도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경기장을 한 바퀴 뛰었는데 뛰고난 후 눈을 크게 뜨면서 숨을 몰아 쉬면서도 어깨를 으쓱거리는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남편과 거의 동시에 뛰기 시작한 한 서양 할아버지도 헐떡거리며 완주하시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이 어떤 것일까 헤아려 보았는데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그 속마음이 알쏭달쏭했다. 아마도 수천 년전의 정기가 아직도 서려있는 그곳에서 선인들과 한마음이 돼서 오래된 역사를 내재화시키고 싶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에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서양 여자애들 셋도 뛰기에 합류했으니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다.

에인션트 올림피아는 신화와 현실이 만나는 곳으로 어디까지가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 중 하나의 전설에 의하면 제우스가 자신의 아버지 크로노스(Kronos)를 씨름 경기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올림픽 제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올림픽에는 남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었으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모든 경기를 치뤘다고 한다. 현재의 관점으로는 약간 이상하기까지한 이런 관습은 그리스의 나체 조각상들을 관련시켜 보면 하나의 연관성이 있다고 느껴진다. 그들에게는 나체가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 본연의 타고난 모습에 그저 충실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나의 뇌피셜이지만 그들은 신이었기 때문에 그런 온갖 격식이 불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실제의 올림픽 경기는 기원전 776년에 시작되어 현재처럼 4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며 처음의 경기종목은 달리기, 원반던지기, 창던지기, 넓이뛰기, 씨름 등이었다. 후에 전차경주와 경마도 추가되었다. 후기에는 그에 덧붙여 연설과 시짓기 대회도 개최되었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황제가 이교도들의 축제라며 금지시킬 때까지 기원후 393년까지 장장 1169년 동안 개최되었다. 근대올림픽은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피에르 드 쿠배르땡에 의해 재개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4천년 전에 모든 사람과 국가를 함께 모여들게 해서 서로의 차이점을 제쳐두고 우정이라는 이상을 위해 경쟁하게 만든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었는지를 생각하면 머리를 숙이고 한없는 경외심을 갖게 된다. 바로 여기서 4년에 한 번씩 올림픽 성화가 채화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오랜 역사성과 지속성에 또 한번 겸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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