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플리오에서의 둘째 날은 나플리오 구도심을 둘러싼 성곽(아크로 나플리아 요새, 베네치아 인들에 의해 13세기경에 축조됨) 바로 옆에서 성곽을 바라보며 호텔 제일 꼭대기에 있는 루프탑에서 조식을 먹는 것으로 시작했다. 수백 년이 넘어 세월의 더께가 묻어있는 성곽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감회가 묻어나는 것 같았다. 수백 년이 넘었다는 것, 세월의 손때가 덕지덕지 묻었다는 것은 수천, 수만 명의 인간의 숨결이 그곳을 거쳐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그만큼의 무게가 더해진다. 그래서 과거의 문화유산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든 다가와서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마다 느끼는 소회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옛날 것들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곤 한다. 성곽이라는 것은 결국 옛날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의미하겠기에 그것에 대한 겸허한 자세는 당연한 것이다.
나는 상쾌한 공기 속에서 뒤에 있는 성벽은 물론 앞의 올드타운과 그 너머 항구와 바다까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이 허락하는 좋은 경치를 즐기며 맛있는 아침을 먹고 간단한 외출 준비를 마치고 조심조심 성곽 옆의 길을 따라 성곽 뒤쪽의 아르바니티아 해변가로 향했다. 그곳은 몇 년 전에 왔을 때도 특이한 풍경으로 내 기억 속에 깊게 각인됐던 곳이다. 그 해변은 사실 도시 앞쪽의 너른 항구 쪽 해변과 달리 매우 좁았다. 좁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경치는 너무도 특별해서 쉬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해변 뒤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로 팔라미디 요새가 둘러쳐져 있고 아래쪽에는 작은 해변이 있지만 그곳은 다른 해변들처럼 특별히 요란한 해변시설이 없어서 사람들은 그곳에서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바다를 만나게 된다. 양쪽에 높이 서 있는 절벽들 아래 오목하게 들어간 곳에 눈이 시리도록 파란 물이 찰랑거리는 광경은 우리 마음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하다. 그리스의 거의 모든 바다가 그렇지만 물도 너무나도 투명하고 맑다. 그러니 그 해변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남의 나라 해변인지라 우리로선 일회성, 이회성의 방문이 될 수밖에 없으니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곳에 가니 이미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혼자서 혹은 두셋이 와서 수영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있어서 해수욕이란 아침밥 먹기 전, 혹은 아침 식사 후에 하는 매일매일의 운동(엑서사이즈)일 뿐이다. 그들은 간단하게 짐을 꾸려 와서 한 20~30분 조용히 물속에서 움직이다가 미련 없이 떠나가곤 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아침 수영을 즐기는 듯했다. 아침 물이 차가우니까 낮동안의 미지근한 물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작은 비치타월을 펴고 그들 틈에 끼어 앉아 남편 혼자 수영을 하고 나는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가 파란 바닷물이 주는 상쾌함과 시원함을 즐기고 돌아왔다. 그런 다음 다시 호텔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드타운으로 내려갔다.
나플리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의 항구를 끼고 있는 유서 깊은 도시로서 오스만튀르크에 대항한 독립전쟁 후 1823년부터 1834년까지 근대 그리스의 첫 수도였다. 아르골리다만 북쪽 끝에 위치하며 항구와 팔라미디 요새, 아브라니티아 해변, 부르치 성(Bourtzi) 등이 유명해서 아테네 사람들의 주말 피크닉 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다. 아테네에서는 서쪽방향에 있고 코린토스 지협을 지나서 펠레폰네소스 반도로 들어오게 되고 보통 버스나 차를 이용해 2시간에서 2시간 반이 걸리니까 아주 안성맞춤의 휴양지라고 할 수 있다.
나플리오(Naufplio)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온 것으로, ‘항해자’라는 뜻을 가진 나우플리오스(Nauplios)는 크레타의 공주인 클리메네 사이에서 팔라메데스라는 아들을 낳는다. 그 팔라메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큰 활약을 했음에도 오디세우스의 계략으로 억울하게 죽게 되자 남은 생애를 아들의 복수에 바치게 된다. 그리스 왕들과 장수들의 아내를 유혹하여 불륜을 하게 만들고, 가짜 등대를 만들어 그리스 함대가 암초에 부딪치게 해서 그로 인해 침몰하게 하였다. 그가 바로 아가멤논의 부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간부 아이기스토스와 결탁하여 남편을 살해하는 결말에 이르게 하는 인물이다. 나플리오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팔라미디 요새(Palamidi Fortress)는 그의 아들 이름에서 따온 것이니 이 도시는 신화의 주인공들의 수호를 받고 있는 도시라 할 수 있다.
나플리오 올드타운 중심에 있는 신타그마 광장 주변에는 오른쪽 옆으로 나플리오 고고학 박물관이 있고 앞쪽에는 1550년에 투르크 인들이 세운 블레프티코 회교사원(Vouleftiko) 이 있다. 이 회교사원은 그리스 국회건물로 바뀌어서 1825년 그리스 최초의 의회가 개원했다고 하며 그리스 헌법이 여기서 선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광장의 이름이 ‘헌법’이라는 뜻의 신타그마 광장이 된 것이며 아테네에도 의회 앞에 똑같이 신타그마 광장이 있다. 고고학 박물관에는 주로 미케네와 티린스 성채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는데 전투에 사용됐던 투구, 갑옷 등의 무구가 많이 전시되어 있다. 고고학 박물관은 베네치아 인들이 1713년에 만든 병영건물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다. 신타그마 광장에는 수많은 노천카페들이 서로 경쟁하듯 영업하고 있고 올드타운을 돌아다니다가 지친 여행자들을 강한 손짓으로 유혹하고 있다. 우리 또한 아픈 다리를 쉬러 들어가 앉아서 시원한 음료를 시켜 마신 적이 있는데 나플리오에 왔다가 이곳에 앉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우리는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성 스피리돈(Agios Spyridon) 교회를 찾아 나섰다. 교회는 너무 작아서 못 보고 지나치기 딱 알맞을 정도로 눈에 잘 뜨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곳은 그리스 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가 예배를 드리러 들어가던 중 암살되었던 그리스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그리스는 400년간의 오스만튀르크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에는 해외동포들(디아스포라)이 주축이 되었고 나중에는 국내 토호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던 독립전쟁에서 마침내 승리하여 공화국 헌법을 선포하고 독립국가가 된다. 바로 그 공화국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카포디스트리아스는 친러시아 외교 기조 속에서 중앙정부 기구를 조직하고 지방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쓰면서 자유주의를 억압하고 농민을 소외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다가 마니 출신의 토호세력들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나플리오는 그리스의 수도였다. 그리스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않으며 아테네 대학교와 코르푸 공항에 그의 이름을 붙여 기념하고 있다. 6개월이 지난 후 그리스는 독일 바이에른의 왕자를 맞아 오톤 1세로 칭하고 어렵게 찾아온 민주정치의 기회를 날려버리고 왕정으로 바뀌었다. 오 톤 1세의 동상은 같은 도시인 나플리오의 올드타운 입구에 있는 세 제독 광장(Three admiral's square)에 서 있고 그에 의해 수도는 다시 아테네로 옮겨지게 된다. 한 도시에서 한 나라의 리더가 바뀌고 수도가 바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정변이 일어났던 것이니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안으로 들어가 본 교회는 그리스 정교회의 다른 교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벽에 이오아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의 사진이 걸려있다. 교회 입구의 촛불단에서는 무심한 촛불들만 열심히 타오르고 있었다.
아테네에서 오는 버스가 정차하는 버스터미널 옆 피렐리논 광장에는 또 하나 볼만한 기념탑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프랑스 우호기념탑이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모양을 축소한 듯한 탑모양을 회색빛 대리석 기단이 떠받치고 있는데 나는 그 모양에 마음이 끌려서 그 앞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꼼꼼히 살펴봤다. 터키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이 그리스를 도와준 것을 기념해서 세워진 것인데 탑 하단에 그리스--프랑스 군인의 얼굴이 나란히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이곳 나플리오에 유독 1821년부터 시작된 그리스 독립전쟁과 관련된 인물의 동상이나 기념관이 많은 것은 역시 이곳이 그리스의 독립과 최초정부 수립의 역사적 현장이었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1시가 넘으니 배가 고파 와서 우리는 어제 갔던 식당으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한 식당을 또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드타운은 격자형의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그 골목이 그 골목인 것 같고 비슷비슷한 가게들과 카페, 집들과 식당들이 모여 있어서 우리가 가려는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찌어찌 찾아낸 <아이올로스> 식당이 왜 그리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젠 길 찾기라면 신물이 날 지경이 되었으니 이 또한 큰일이다. 식당에 가니 어제 서빙을 해주었던 여자 종업원이 아는 체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뭘 시킬까 하다가 해물 스파게티와 통오징어 튀김을 주메뉴로 시켰는데 맛도 맛이지만 스파게티 양이 우리나라에서 보통 나오는 양의 2배는 될 만큼 많아서 또 남길 수밖에 없었다. 손님들에게 이런 감동을 선사하는 식당이 우리나라에도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올드타운 끝까지 걸어갔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면 카페가 죽 늘어선 항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쪽도 바다를 옆으로 보며 산책하기에 꽤 좋은 장소다. 거기서 보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에는 부르치 성채가 있다. 이것도 역시 베네치아 인들이 1473년에 지은 요새인데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원래는 암초였던 섬을 평평하게 만들고 그 위에 성채를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런데 그 성의 모양이 아주 예뻐서 나플리오 항구의 정취에 단단히 한몫을 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성 주위를 밝히는 조명이 에워싸는데 그 풍경 또한 관광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따지고 보면 나플리오의 랜드마크가 되는 팔라미디 요새, 아크로나플리오 요새, 부르치 성들이 모두 베네치아 인들에 의해 건설된 것이니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그들이 이렇게 견고하고 튼튼한 요새들을 이중 삼중으로 건설해 놓을 만큼 나플리오가 무척이나 중요한 요충지였음이 틀림없었을 텐데 결국은 이 도시를 차지하는데 실패하고 물러갔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짐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