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플리오에 도착했다 아테네 호텔에서 일찍 나와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것이 8시 40분쯤. 거기에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가 아침 9시반에 인터씨티 버스를 타고 2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것이다. 사실 내가 나우플리오에 온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5년전에 지인들과 부부동반으로 미케네와 에피다우로스의 유적들을 방문하느라 이틀간 여기에 머물렀었다. 그때 호텔과 식사도 두루 좋았고 무엇보다 나플리오의 요새와 비치에 갔었다가 너무 좋은 인상을 받았었기 때문에 이번 그리스 여행은 나플리오를 중심으로 해서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좀 더 알아보고자 계획한 것이었다.
펠로폰네소스반도에 간다고? 거기에 뭐가 있다고? 기껏해야 스파르타밖에 없잖아? 라고 혹자들은 말할 지도 모른다. 10 몇년 전의 나라도 필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때에나 하는 소리다. 내게는 여기 나플리오를 포함해 미케네와 아르고스를 또 한번 가서 좀 더 자세히 보고 에인션트 올림피아와 스파르타, 미스트라 등등 을 한번 제대로 보아야만 나의 그리스 순례가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드디어 그 오랜 계획을 이번에 마침내 실행에 옮기게 된 것이다.
다시 본 나플리오는 어쩐지 더 생기가 도는 듯 했고 관광객도 많이 보였고 더 깔끔해지고 기념품 가게들이나 식당들도 더 많아진 듯 했다. 그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 나플리오가 핫한 곳이 되었단 말인가 나는 좀 신기하기도 하고 뜻밖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전에 왔을 때는 신시가지 쪽에 규모가 꽤 큰 럭셔리급 호텔에서 잤었으나 이번엔 올드타운의 규모는 작지만 알찬 펜션을 숙소로 정했다. 그런데 시간도 거의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날씨도 더운 데다가 아직 호텔 체크인 시간이 안 되었으므로 어렴풋이 호텔과 가까울 것이라 짐작되는 올드타운에서 식당을 찾으려 캐리어를 끌고 골목 골목을 기웃거렸다. 서 너 번 골목길을 꺽어 돌자 왠지 괜찮을 듯 싶어 보이는 식당이 눈에 띄었으므로 내가 여기가 어떻겠느냐 남편에게 의향을 물어보니 남편은 처음에는 별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는지 딴 데로 갈 것처럼 엉거주춤 마음을 못 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그 식당이 마음에 들어서 여기에서 먹자, 라며 남편을 강하게 끌어서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리스의 골목 식당들이 흔히 그렇듯 그 식당도 예외없이 사람들이 지나갈 통로를 빼고 골목에다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그 위에는 커다란 파라솔을 펴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 골목거리 식당들은 아마도 그리스 식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사람들은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 팡팡 돌아가는 실내를 놔두고 굳이 밖의 골목에 있는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또 그들에게 구경당하며 골목 자리를 선호한다. 우리도 입구 가까이에 있는 자리에 앉아 주문 받으러 종업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 갔다.. 일단 그리스에서 가장 일반적인 그릭샐러드를 시켰고 주메뉴로는 나는 포크 스테이크를, 남편은 생선요리인 대구 튀김을 주문했다.
우선 음료가 먼저 나오고 그릭샐러드가 나오는 것을 맛 본 남편과 나는 익히 알고 있는 그 맛에 흡족한 시선을 서로 나누었다. 그 다음에 나온 생선요리와 돼지고기 커틀렛은 특히나 맛있었기 때문에 "와, 그리 큰 기대는 안하고 들어왔는데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먹을 수 있다니,"하면서 운좋게 좋은 식당에 들어온 것에 대해 서로 축하를 나누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식당은 남편이 즐겨 참조하는 여행 책자인 <lonely planet>에서 추천해 놓은 <아올리오스> 라는 식당이어서 lucky하게 좋은 식당을 찾은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가 식당에 자리를 잡을 때만 해도 점심 먹기에 이른 시간이라서 손님이 우리 밖에 없었으나 우리가 식사를 끝낼 즈음이 되자 대 여섯 팀이 더 와서 식사를 즐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도 연신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며 열심히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확률적으로 7할 이상으로 왠만한 식당에서는 거의 흡족하게 음식을 즐길 수 있다. 식당에 들어가서 주문한 음식이 나와 테이블에 차려질 때부터 그리스 사람들은 음식에 진심이라는 것을 단박에 느끼게 된다. 음식 양은 항상 푸짐하고 맛은 기대했던 바로 그맛을 마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다른 나라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다. 다른 나라에서는 흔히 하는 '복불복'의 원칙이 통하는데 그리스 식당에서는 거의 언제나 그리스 사람들이 음식에 얼마나 진심인가를 느끼곤 했다. 첫째로 양은 항상 다 먹기 힘들 정도로 많다는 것. 우리는 일인분의 음식을 항상 남기곤 했다. 먹기 전엔 음식이 나오면 다 먹을 것처럼 배가 고팠다가도 먹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음식 양에 질려버릴 때도 있었다. 그건 우리가 아마도 대식가가 아니어서 그럴 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그리스 사람들의 한끼 식사양이 우리보다 훨씬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둘째로 그리스 사람들은 재료가 원하는 바로 그 요리법으로 매우 신선한 재료를 써서 요리하므로 재료 본연의 맛이 항상 제대로 살아 있게 요리한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손님에게 향하는 정성까지 담뿍 담아서 요리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맛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밥을 배불리 먹고 이제는 호텔을 찾으러 나섰다. 식당에서 뒤로 세 블럭 정도 떨어진 것으로 주소가 되있어서 그쪽으로 가니 그냥 평범한 세 블럭이 아니라 차례로 계단처럼 올라가는 언덕에 서 있는 세 블록을 올라가는 곳이라서 도착하고 보니 거의 언덕 끝에 있는 것이었다. 나는 더운데다가 짐의 무게도 만만치 않아서 헉헉거리며 가느라고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질 정도가 되었고 내심으로는 호텔을 이런 곳에 잡은 남편에게 은근히 부아가 차 오르고 있었다. 어쨋든 리셉션으로 들어가 방 번호를 받고 배정받은 방안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이번 호텔에서는 그냥 방이 아니고 아파트망이라고 말한대로 2층으로 된 구조로서 일층은 부억 겸 거실과 화장실로 되어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가운데가 두꺼운 아치벽으로 나뉘어진 방이 2개가있었다. 벽이 짙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따뜻한 느낌인데다가 바깥으로 난 발코니와 창문의 색은 또 초록색이고 꾸며진 가구와 소파 등 전체적으로 방 분위기가 동화적으로 느껴지면서 맘에 쏙 들었다. 나는 언덕 끝까지 올라 와야했던 호텔 위치로 마음이 상했다가 엔틱크한 분위기에다 귀엽고 포근한 방 모습에 기분이 반전되는 것을 느끼며 루프탑에서 먹을 내일 아침 조식에 대한 기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짐 정리를 대충 하고 나서 우리는 호텔 주변을 탐색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 펜션은 여러 채로 이루어진 독채 집들이었는데 계단을 올라가면 또 몇 채가 있고 또 계단을 올라가면 또 집들이 있는 구조였다. 가장 끝에 있는 계단까지 올라가면 마지막 꼭대기에 조식먹을 식당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올라가서 뒷문으로 나가니 바로 아크로나플리오 요새의 일부인 도시 성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우리 호텔의 위치가 보통 뛰어난 것이 아님을 느끼기 시작했다. 성벽은 반쯤은 허물어진 채 수백 년 세월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모습이었다. 그곳으로부터 올드타운까지, 또 그너머 푸른 바다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아까의 불만은 눈 녹듯 사라지고 이렇게 오래된 성벽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있는 호텔의 위치가 너무 귀하게 여겨졌다. 아마도 이 성벽이 먼저 지어진 것으로 보였고 건너편 산에 좀 더 나중에 지어진 요새가 견고하게 버티고 서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호텔 쪽에 붙어있는 성벽을 따라 1km 쯤 산책을 하다가 올드타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올드타운에는 기념품 상점들이 제일 많았고 식당들과 카페들이 연달아 붙어 있었다. 간혹 가다 조그만 성당들이 있었고 사이 사이에 또 게스트하우스들도 보였다. 크지 않은 올드타운 끝자락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나플리오는 동그란 만을 끼고 있는 도시라서 나플리오의 바다는 크고 막막한 바다가 아니라 커다란 호수같은 느낌을 주는 바다이다. 만 저쪽으로는 신시가지가 만의 경계를 따라 둥그렇게 형성되어 있다. 바닷가에는 산책로가 길게 뻗어있었고 그 산책로 옆으로는 그리스의 바닷가 주변이 항상 그렇듯 규모가 큰 카페들이 성업중이었다. 관광객들이 군데군데 앉아서 휴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올드타운을 벗어나서 신시가지로 향하는 길에는 큰 슈퍼마켓도 있었고 학교, 관공서, 병원 등 일상에 필요한 시설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고 분위기는 평범 그 자체, 살아가는 일에 골몰하는 모습이었다. 올드타운과 신시가지를 가르는 커다란 광장 옆에 우리가 타고 왔던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그 길 건너편에는 택시들이 줄 지어 서 있었는데 택시 기사들은 거의 하나같이 밖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전에도 느낀 바가 있었지만 이 나라에서는 흡연에 대해서 피차 매우 관대한 듯이 보였다.
그러다가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고.. 이럴 땐 역시 카페에 들어가는 게 최고다. 아까 보았던 바닷가 카페로 갈까 어쩔까 망설이다 다시 올드타운으로 가서 모퉁이에 사람들이 꽤 많은 카페로 들어가서 아이스커피를 시켜 마셨다. 예전엔 그리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가 힘들었지만 요즘엔 외국인이라면 으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신다고 느꼈는지 어렵지 않게 시킬 수가 있다. ’프레도 에스프레소‘ 하면 곧 알아듣고 우리가 원하는 아.아를 바로 가져다 준다. 얼음이 가득 띄워진 아.아는 역시 더울 땐 최고의 음료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는 에인션트 올림피아로 떠나기 전의 이틀을 여기서 묵기로 했으므로 마음엔 여유가 넘쳤다. 어느 정도 더위를 식히고 나자 이번엔 오던 길을 되돌아서 역방향으로 골목산책을 시작했다. 골목마다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나플리오가 인기여행지가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나플리오는 지금 보면 평화롭고 아름답고 특색있고 매력적인 도시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리스 전체의 역사가 그렇듯이 나플리오의 역사도 고난과 치욕과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플리오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확실치는 않지만 BC 7세기 경에 이웃나라인 아르고스에게 점령당했다는 기록으로부터 시작하여 계속 이민족에게 점령당한 기록만 나온다.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항구를 끼고 있는 전략적 이점 때문에 그당시 주변을 호령하고 있던 베네치아와 오스만투르크가 뺏고 뺏기는 공방전 끝에 1540년경에 오스만제국에 완전히 점령되지만 1686년에 다시 베네치아에 넘겨지고 베네치아는 나플리오를 철저하게 방어하기 위해 1711년부터 1714년까지 팔라미디 요새 건설에 온힘을 쏟는다. 그러나 3일만에 다시 오스만에게 이 도시를 넘겨주게 된다. 나플리오가 그리스의 깃발 아래 모이게 된 것은 1822년부터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그리스 독립전쟁 이후이며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중요성 때문에 1823년부터 1834년까지 그리스의 수도로 역할을 했다. 따지고 보면 나플리오는 동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 계속 이민족의 지배 아래 살았지만 실질적으로는 BC 431~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한 번도 주도권을 쥐고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계속 남들에게 끌려다닌 것이니 이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체성을 잃지 않고 언어와 종교, 문자를 그대로 유자하고 살아온 것만도 오히려 용하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