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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Apr 02. 2022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안부가 있다

너무도 친절(?)한 한국인들을 위한 고언(苦言)

[일상(日常)의 인상(印象)]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생각할 거리가 있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들어와서 앉아있음'


  약속시간인 오전 11시 30분이 되자 카톡이 날아왔다. 이모티콘은커녕 그 흔한 물결 표시 하나 없는 효율적인 8글자. 원래 남자들의 대화는 격이 없을수록 더 간결해진다. 음식점을 불과 20미터쯤 남겨둔 상황이라 답장은 할 필요 없었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두리번거리자 왼쪽 구석 창가에서 누군가 손을 흔든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얼굴에 웃음이 다 드러난다.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S형은 나보다 한 살 많은 대학 동기다. 졸업하고 나서도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봤는데, 코로나가 터진 뒤에는 통 보질 못 했다. 그러다 한 달 전 뭘 물어보려고 연락했다가 밥을 먹기로 한 것이다. 보통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사람들끼리는 "다음에 밥 한 번 먹자"고 한다. 하지만 그건 '절대로 밥 먹지 말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우린 곧바로 날짜를 잡았다.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우리 언제 보고 못 본 거지?"

  S형) "2019년 말 K△△ 결혼식 이후 처음 아닌가?"


  어느덧 서로를 안 지 20년이다. 오래된 친구와의 만남이 좋은 이유는 잠시라도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보다는 조금 때가 덜 묻은 나 말이다.


"메딱이 걔 잘 나가잖아 성과급이 어마어마하더라고"
"또치는 요즘 힘든가 보더라"


  돈을 얼마나 벌든, 회사에서 어떤 위치든, 우리에겐 그냥 '메딱'이고 '또치'일 뿐이다. 다른 동기들의 안부를 묻는 사이 둘이 함께 주문한 버섯 카레 덮밥이 나왔다.



이제 '근황'을 확인할 시간


  예상대로 대화는 즐거웠다. 그런데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S형과 나, 둘의 근황을 본격적으로 확인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30~40대가 만나면 반드시 2가지 근황을 묻게 돼 있다. 바로 결혼아이(출산)다.


잘 지냈어? 결혼은? 아이는?


  이건 사실 안부를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왜냐하면 결혼이든 출산이든, 둘 다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행군이 끝난 뒤 막사에 들어가기 전 중대장이 "수통!"하고 외치면 탄띠에 수통이 붙어있는 걸 확인하고 "수통 이상무!"라고 답해야 하는 것처럼, 어릴 적 엄마가 외출하고 돌아와 "공문수학(눈X이 수학의 전신) 다 풀었어?"라고 하시면 "네, 다 풀었어요!"라고 대답해야 정상인 것처럼 말이다.


  우린 서로의 결혼에 대해서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S형이나 나나 서로의 청첩장 모임부터 예식 당일 사진 촬영까지 모두 참석했으니 말이다. 그다음 확인해야 할 근황은 바로 아이다.


  일단 S형과 나의 공통점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우리 대학 동기 카톡방에 '출산 소식'을 공지한 적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 카톡 프로필 사진이 아기(또는 어린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 가능성은 3가지다.

① 아이를 당장 가질 생각이 없다
② 아이를 아예 가질 생각이 없다(이른바 딩크)
③ 아이를 갖고 싶은데 안 생긴다


  ①이라면 사실 아이라는 대화 주제를 굳이 껄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이직이나 해외 근무, 시험 준비 등을 이유로 출산 시기를 '조금' 늦추는 건 지극히 상식적이다.


  ②에 해당하는 경우라면 이 주제가 썩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작년 우리나라 합계 출산율은 0.81로 또다시 역대 최저치이자 OECD 꼴찌를 기록했는데, 그 화살이 애먼 딩크(DINK)를 향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인생 가치관의 문제를 집단주의의 시각에서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아직 한국에는 많다.(합계 출산율은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다. 남성은 아이를 못 낳으니 합계 출산율이 2는 넘어야 현재 인구가 유지된다.) 


  하지만 의 상황에 처한 사람만큼 이 주제가 불편하지는 않다. '비자발적' 딩크 부부에게 "아이는?"이라는 질문은 기관총 난사와도 같다. 순간 가슴이 뻥하고 뚫려버린다.


  문제는 내가 바로 ③의 상황, 즉 난임 부부라는 것. 그런데 나와 S형이 서로의 '근황'을 물어야 할 타이밍이 마침내 오고야 만 것이다. 내가 불안해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우리 부부의 난임 이야기는 브런치 북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 참고)



계속되는 일촉즉발의 위기


  금세 위기가 찾아왔다. S형이 내 회사 후배이기도 한 E군의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때 내가 코로나 증세가 있어서 못 만났어.
걔는 집에 애도 있어서 걸리면 큰 일이잖아."


  이 말이 만약 수능시험 언어영역에 나온 지문이고, 문제가 '다음에 이어질 말로 가장 적당한 것은?'이라면 정답은 "아참 넌 애가 있나?"일 것이다. 나는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S형은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이후에도 위기는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 잘 넘어갔다.


  아내와 내가 번갈아 코로나에 걸려서 고생했다는 이야기에서도, S형이 얼마 전 집을 이사했다는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철저히 '부부 2명'만 가족 구성원으로 전제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자리를 근처 카페로 옮겨서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 1년에 한 번씩만 봐도 40번밖에 못 본다', '대학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며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덧 핸드폰에는 12:50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나) "난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오후에 제작이 하나 있어서"

  S형) "그래 이제 인원 제한도 풀려가니까 동기 모임에서 보자"



'그 안부' 없이도 대화가 가능했다니..


  그렇게 나와 S형은 서로의 목적지로 향했다. 끝내 80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아이가 있는지 묻지 않았다. 하다못해 나와 처음 만난 사람도 결혼반지를 본 다음에는 "애는 몇 살이에요?"라고 묻는 판국에, 20년 지기가 이 질문을 건너뛰었다니.

 

  나처럼 난임 부부인가?
아니면 딩크라서 설명하기가 입이 아팠나?

  머릿속에 몇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친한 대학 동기를 만나서 80분 동안 웃고 떠들며 추억에 잠기는 사이, 내가 그토록 불편해하는 '아이' 얘기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다들 못 물어서 안달인 그 질문("애는요?")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정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서 부력을 발견한 뒤 '유레카'를 외쳤을 때나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신 다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를 깨우쳤을 때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


  라디오든 TV든, 너튜브든, 공익 광고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광고 문구 예시)
"굳이 묻지 않아도 될 안부가 있습니다"
"그 안부 안 물어도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냥 안부 한 번 묻는 거잖아"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하루 기분을 잡치게 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니, 제발, 아무리 궁금해도,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결혼했어?" "아이는" 이 두 주제만큼은 피해 주는 것이 어떨까?


당신이 묻는 안부 한마디에 누군가는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


  당신이 "결혼은 안 해?"라고 물으려는 그 상대방은 애인과 바로 전날, 심지어 그날 새벽 눈물을 쏟으며 헤어졌을 수도, 아니면 파혼이나 이혼을 했을 수도 있다(이혼이 '흉'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이미 그런 시대는 지났다). 비혼주의자도 점점 늘고 있고 당연히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당신이 "애는?"이라고 질문하려는 상대는 3년째 난임의 고통을 견디고 있을 수도, 2차례나 유산을 했을 수도, 그 과정에서 한쪽 나팔관을 떼어냈을 수도 있다. 시험관 시술 때문에 매일 아내의 몸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어야 하는 사람일 수도, 또 그 주삿바늘을 견디며 호르몬의 노예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쏟는 사람일 수도 있다.


  바로 우리 부부처럼 말이다.




<일상의 인상> 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4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 읽기 https://brunch.co.kr/brunchbook/sadnee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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