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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Jul 01. 2022

11년째 연인의 생일을 축하하며,

yes, this is a love letter.

'아무개 형 대신 전해드립니다. 무슨무슨 공지를 전달드립니다. abc 드림'


아니 abc가 누구야?

대학교 신입생 시절, 기껏 선출된 반대표가 아니라 왠 모를 사람이 자꾸 공지문자를 보내왔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나중이 되니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군지, 왜 공지문자를 대신 보내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같은 과, 같은 반 신입생이었던 그는, 문자메세지 요금이 많이 남아 과대표 동기의 공지문자를 보내준다고 했다. 어차피 남는 거라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쓰면 좋지 않냐고.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뷔페에서 못 먹을 것 같아도, 음식을 접시에 가득 담아오는 것이 당연했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이해할 수 없었던 스무살의 그를 알게 된 이후로, 마흔 번이 넘는 계절을 함께 보내면서 알게 되었다.

그는 타인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는 호의를 베푸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비록 그는 싫어하지만, 자신처럼 푸릇푸릇한 잎이 돋아난 하지 무렵이, 그의 생일이다.

그의 생일을 미리 축하하기 위해 서울역에 도착하니,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늦을 것 같다고, 차가 너무 밀려 제시간에 서울역에 마중가기 어렵다고.

서울역에 내리니 이번엔 전화가 온다.

한 정거장 지나 내려서 지금 뛰어가고 있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그런 생각을 했다.

데리러 오는 건 당연한게 아닌데 어째서 미안해하는가?

서울역에 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생각해보면, 그는 매번 서울역 내가 타는 기차의 칸에 맞춰 앞에 서 있어주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무려 10년이나.

새삼 고맙고 그 호의가 당연해진 것 같아 미안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오는 p를 만나 물었다.

오늘 저녁으로 무엇이 먹고 싶은지.

p는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한다.

참새와 방앗간처럼, 그의 집 근처에 있는 김치찌개집으로 향했건만, 오늘도 그 집은 열려있지 않다.

다른 메뉴를 생각해보라고 하니, 곱창이 먹고 싶다고 한다.

이번 주말은 너의 시간이니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하라며, 예전에 봐둔 식당이 있다는 그를 따라 을지로의 어느 곱창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배가 어찌나 고팠는지 다 먹고 나가는 길, 식당주인은 우리보고 배가 많이 고팠냐며, 엄청 많이 시키셨다고 한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배가 부르구나?

이렇게 배가 부르면 안되는 거라고,

내년에 결혼식은 어떻게 올릴 거냐며 호들갑을 떨면서 다이어트를 핑계로 종로 주변을 내내 걸어다녔다.

그는 청계천이 있는 동네에 살면서도, 혼자 청계천을 잘 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밤의 종로와 을지로는 이렇게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데 왜 홀로 걷지 않느냐고 물었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만큼 밤이 아름답고, 밤에 부는 바람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퇴근을 하면 이미 너무 지치고, 집에 오면 또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청계천이나 을지로 주변을 걸어다니며 보낼 여유가 잘 없는 것 같다고 한다.

밤이 이렇게나 좋은데도 말이다.

거의 1시간을 넘게 걸으면서 청계천의 굽이치는 물살도 구경하고, 밤거리를 걸어다니며 어딘가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듣고 그랬다.

서울의 사이버펑크가 뭔지 제대로 알았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생각하게 된다.


그럼 나는?

나도 내가 사는 도시를 자주 산책하나?

사실 그렇지 않다. 집에 돌아오면 밥을 먹고 다시 회사에 가기 바쁘고, 칼퇴라도 하는 날이면 소파에 병든 닭처럼 누워 휴대폰을 하며 시간을 죽인다.

다시 또 깨닫는다.

p가 없는 도시, 나의 정신적 체력이 말라붙은 만큼이나 그에게도 서울에서의 시간이 그다지 낭만적이긴 어려울 것이다.


내가 없는 서울에서 왜 혼자 행복해하지 않냐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혼자 다니라고 하지 않고, 함께 다니기 위해 더 자주 올라오는 사람이 되어줄게.

p의 생일주간, 한달 전부터 예약해둔 식당을 찾았다.우리의 생일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다.

식당은 비생일자가 예약하고, 밥은 생일자가 산다는 것이다.

나와 만난 이후로, 파스타보다는 김치찌개를, 돈가스보다는 삼겹살을 더 많이 먹었을 그를 위해 생면파스타집을 예약했다.

파스타집을 들어갈때부터 걱정이 있었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예약한 식당의 음식 맛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이 아니다.


바로 우리가 밥을 너무 빨리 먹어 모처럼 예약한 곳인데 10분만에 다 먹고 나와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것이었다.


워낙에 밥을 빨리 먹는 나의 속도에 맞추느라 덩달아 빨리 밥을 먹게 된 그를 생각하니, 다시금 미안해지고 밥을 먹으며 되려 무슨 말이라도 더 하려고 애쓰게 됐다.


그것과는 별개로 음식은 너무나 맛있고,

긴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밖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쾌적한 실내가 마음에 찼다.

식당에서 나와 근처에 새로 생긴 스타벅스에 들려 더위를 달랜다.

요즘의 서울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사우나에 저절로 몸을 맡기는 기분이기에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고되고 또 고되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간 도이치 소파 역삼점은 바로 일주일 전 쇼룸을 닫았다고 한다.

가죽 소파를 보고 싶다며, 밥 먹고 없는 힘을 짜내 도착한 곳에서 목적지가 없다는 소식을 들으니 허탈하고 밀려오는 짜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또 생각했다.

오늘의 일정을 내가 아니라 p가 짠 것이었으면, 왜 미리 알아보지도 않았냐고 화를 냈겠지, 입장을 바꾸니 이렇게나 잘 알게 된다.

옆에서 p는 성난 기색 하나 없이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한다.

머쓱해진 나는 강남역이라도 걷자고 이야기를 건네고, 가는 길 더워하는 그를 위해 블루보틀에서 커피를 마시며 땀을 식혔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은 그의 날임에도 불구하고 가로수길에서 무언가를 산 사람은 정작 나라는 것이다.

아르켓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간 것인데, 그는 내가 사려는 바지를 찾아주겠다며 여념이 없다.

마침내 나조차 지쳐 더이상 그 바지를 찾고 싶지도 않다고 할 때까지 그는 가로수길을 다 뒤질 기세다.


결국 이렇게 하다가는 바지를 찾다가 주말을 보낼 것 같아 처음 봤던 걸 사서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 속으로 저녁이라도 맛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인생에는 정말로 중요한 것이 있다.

첫 번째로는 먹을 것, 두 번째로는 맛있는 것을 먹을 것, 세 번째로는 정말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가본 야키토리 집은, 인테리어도 예쁘고 맛도 있지만 음식이 나오는 속도가 느려 애가 탔다.

왜 꼬치가 제대로 안나오는 거지? 하면서 의아해 하는 사이, 셰프님은 빠트린 것이 있는 것 같다며 시키지도 않은 메뉴를 서비스로 주셨다.

단순하게도 마음이 다 풀어진 우리는, 마지막으로 나온 닭칼국수가 너무 맛있어 연신 감탄해하고, 금세 접시을 비우고서는 또 걸어야 한다며 재차 길을 나선다.

그야말로 뚜벅이커플인 우리는,

밥은 빨리 먹고 술은 적게 마시며 다 먹고 나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걷고 또 걷는 것이 일상인 사람들이다.

세상 밖 풍경이 이렇게나 재미있는데, 왜 앉아있기만 해야 하냐며.

그러면서도 집에 들어가면, 나오기 싫다는 나를 그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밖에만 나오면 이렇게나 행복해하면서 말이다.

비가 오는 일요일, 그는 이번에야말로 가구를 보러 가야 한다고 용산에 가보자고 한다.

이미 다 둘러본 백화점에 뭐가 더 있냐고, 아무것도 없는 백화점은 뭐하러 가냐고 입이 대빨 나온다.


그 와중에 내 캐리어를 서울역 라커룸에 맡겨두고 가야 한다며, 혼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더니 내게 너는 개찰구를 나오지 말고 서 있으라며 말하는 p를 봤다.

하필 예약한 보관함 위치는 또 개찰구에서 왜 이렇게나 먼지, p는 점이 되어 보일때까지 걸어가더니 내 짐을 맡기고는 돌아와 놀러가자고 한다.

가방을 벗은 그의 등에는 가방끈 모양으로 땀이 나 있고, 내 짐에 본인 가방까지 든 그는 더우면서도 힘든 내색 하나 하지 않는다.


잠시 내가 가방을 들고 가겠다고, 너 이러다가 죽을 것 같다며 가방을 건네받는 지금,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간지러워 입밖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인생의 묘미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 있다고, 별 생각 없이 무료하게 둘러본 가구코너에서 정말로 마음에 드는 소파를 찾게 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결제할게요'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오를 만큼 마음에 드는 소파를 만난 것도 신기하고, 그게 단 한번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브랜드 소파인 것도 신기했다.


혹시 너, 인터넷으로 미리 보고 온거야?

쉑쉑버거를 먹으며 다시금 생각한다.

아 저 소파 스툴만 있으면 바로 샀을텐데, 하고.

지쳐보이는 p에게 무슨 소파가 제일 좋냐고 물으니 p는 이제 아무래도 괜찮다고, 니가 원하는 것 중 고르라고 한다.

소파에 하루종일 누워있는건 니가 아니냐며.

그는 소파를 등받이처럼 사용하는 사람이기에, 효용성 측면에서는 아주 타당한 결론이다.


아, 사람들은 가구를 다 어떻게 어디서 사는지, 왜 난 이렇게 어려운건지 혼자 머리를 싸매고 앉아있느라 일요일 반나절을 보낸 기분이다.

그럼에도 일요일은 오고, 회사는 가야 하기에 다시금 서울역으로 향하는 길.


그에게 신신당부를 한다. 오늘은 열차가 떠날때까지 밖에 서서 지켜보지 말고 무조건 먼저 가라고.

매번 알겠다고 말하고는, 기차가 떠날때까지 손을 흔들다 집에 돌아가는 것을 알기에 이번만큼은 생일이니 먼저 가라고 으름장을 놨다.

멀어지는 p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생일은 내일인데, 내일은 쟤가 혼자 뭘 하며 지내나. 퇴근하고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실제로 넌 작년 내 생일에 그랬으니까.

땀만 겨우 닦고 온 회사.

일요일 밤부터 일을 하면 월요병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런 말을 지어낸 사람은 일요일 출근을 한번 정도만 해본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나처럼 매주 일요일마다 출근을 하게 되면, 월요병이 아니라 일요병이 올 뿐이라는 걸 알게 될테니.

하지만 너에게 파스타도 사고, 좋아하는 커피도 사고,

사고 싶다는 가구들을 사주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게.

그리고 다음 생일에는, 오늘보다 더 큰 행복을 주기 위해 노력할게. 약속해.


11년째 너의 생일을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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