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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트서퍼 May 30. 2022

나는 보았어요. 당신의 그림자에 걸린 미소를.

가벼운 것들은 지나가요. 그대도 외워두세요.

'오늘은 새로운 구성원들과 직급별 식사를 해야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롭게 점심을 먹어봐야지.'


는 개뿔.

망했다.

p가 해외로 웨딩스냅을 찍으러 갈거면 이제는 비행기표를 사야한다길래 그러라 하고 말았던 찰나,

깨달아버린 것이다.

나의 여권이 만료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왜 언젠가 여권도 만료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렇게 펑펑 여권의 기한을 써버렸을까.


오늘의 직급별 식사는 포기다.

여권사진이나 찍으러 가야지.


그렇게 여권사진을 찍고, b와 먹은 점심,

아직까지 나에게 직급별 식사는 b와 먹는 점심인가보다.  

먹는 내내 기분이 몹시도 몽글했던 것을 보면.

저녁엔 직전부서로 입사한 후배들과 밥을 먹었다.

회사의 새로운 노예들은 모두 어떤 면면을 가지고 있나 궁금해서 미어캣마냥 고개만 뻐끔거리고 있었기에,

기회를 만들어 어떤 사람들인지 얼굴이라도 익히고자 마련한 자리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다들 그 눈에 생기가 있고, 파릇파릇한 열정이 나까지 물들이는 기분이었다.


나의 열정은 저 멀리 한강 어드메로 잘 접어서 띄워보낸지가 한참인데.

그럴 때마다 귓가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삐, 삐, 삐

위험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반복합니다.

위험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그 언젠가 내 마음에서도 아지랑이마냥 피워올랐던 열정이 어디로 사라졌든 간에 상관없이,

오늘도 월급값을 하기 위한 야근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부서에서의 업무가 어떤지, 사람들이 어떤지보다는,

사실 요즘의 나를 가장 크게 괴롭히는 사실은 내게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시시각각으로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하기 어려우니,

그걸 소화해서 답까지 내리는 과정은 더욱 험난하게만 느껴진다.

솔직히 내가 얼마나 월급값을 못하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아서, 성실하게라도 일하자 싶어 이번주도 해가 뜰 때즈음 출근해 가로등 불빛에 의존해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을 지속하고 있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도 만나야 하니까,

어느 날 저녁은 예전 부서에서 상사로 만났지만 지금은 친구가 된 j와 b까지 함께 와인을 곁들인 저녁을 먹었다.

사람은 알 수 없고,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누구보다 느끼게 되는 일을 하면서도

사람을 믿고 싶고, 사람을 알고 싶어지게 만드는 이들을 곁에 둔 것은 행운이다.

얼굴이 새빨게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그 얼굴이 다시 원래의 색을 찾을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돌아오는 길, 비록 너무 내 이야기만 한 것 같아 그 허한 마음은 둘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하늘을 바라보고, 또 야근을 반복하면서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다 어떤 기시감을 느끼곤 하는데,

이런 기분이 수능을 공부하던 시절, 시간별로 계획을 세워둔 것들이 틀어질 때마다 느꼈던 분노와 비슷하기 때문이리라.

잘하고 싶고, 잘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지배할수록

더욱 무리하게 되고, 곳곳에 허점을 남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이번주 나는 행복할 수 있었다.

바로, o를 만났기 때문에.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9년을 같은 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면서도,

한번도 친해진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대학교 졸업반 즈음, 고향도 아닌 서울에서, 그것도 내가 살던 동네의 자취방 앞 카페에서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어, 너 누구 아니야?"

"와, 야 미쳤다. 너 뭐야? 너무 오랜만이다!"


로 지금이 찾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척에 살 때에는 한 번도 내 세계에 들어온 적이 없던 그녀는,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서는 그 오랜 시간을, 그 힘든 시간을 누구보다 살뜰하게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나 지났나.

오랜공부 끝, 이제서야 돈도 벌고 어른도 되어보나 하는데 그녀가 결혼을 한다고 한다.

그것도 그 시절, 나를 만났을 때 만나고 있던 바로 그 사람과.

o야 너는 분명히 행복할거야. 너 덕분에 나도 행복해졌는데, 니 인생인들 안행복하겠니?

그렇게 수다를 떨고 또 떨고.

이야기를 또 하다가 생각한다.


일정한 고통 없이 과거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나 역시 고통의 역사가 곧 과거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임에도,

단박에 단 하나 고를 수 있는 고통의 밤이 있다.


o는 그 밤, 내게 김치전을 구워 과일소주를 들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니가 너무 걱정되서 오지 않을 수 없었다면서, 괜찮은 척 할 필요 없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에게조차 감정의 변화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된 내가, 타인에게 그렇게 크게 우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그 때가 마지막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그런 나를 웃으며 다독인 그녀는 벌써 경력직이 되었고, 나도 직업을 가졌으며, 각자 자신의 짝을 찾아 결혼도 한다.

역시 새로운 고통의 역사가 계속되는 만큼이나,

새로운 행복의 역사도 함께 오는 것이다.


재잘거리는 o를 옆에 두고 말하고 싶었다.

o야 나는 보았어.

너의 그림자에 걸린 미소를.

가벼운 것들은 지나갈거야. 넌 잘 해낼거야.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 허투루 보낼 수 없으니,

토요일은 p와 함께 성수동을 찾았다.


서울숲 근처는 처음이라며, 서울에 몇 년을 살았는데 구두공방이 모인 동네라고만 생각했냐며

우리는 생각보다 맛있는 밥집에 놀랬고, 생각보다 멋진 카페들에 행복해했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

열심히 가판대에 놓인 빈티지도 구경하고 말이다.

요즘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며,

나는 사진을 찍다 'dead man walking'이라는 말을 보며 킬킬거렸다.

p는 옆에 있던 '두리 인력'과 내가 퍽 잘 어울린다고 한다.

나야말로 XX인력이라고 하나 만들고 싶었다.

제 대신 일 해줄 사람 구해요. 근데 저보다 100배 잘했으면 싶어요.

헛된 말이다.

내가 노력해서 잘해야지 뭐.

p는 홀로 퇴근하고 놀러갔던 가로수길에서 발견한 편집샵에 같이 가보자고 한다.

그 때에도 좋았지만 나와 함께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좋은 곳에서 나를 떠올렸다는 그 말이, 나는 못내 기껍다.


가로수길에는 사람이 노상에 불법주차된 자동차만큼이나 많지만,

우리는 그들 중 하나가 되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온 세상을 구경했다.

늘 가던 그 자리에서,

그 때와 똑같은 맛으로 영업하는 중국집으로 가

그 때와 같은 메뉴를 시켜먹으면서 행복했고 말이다.

이번주 나의 서울 방문에 큰 이유가 된 s의 결혼식 날이 밝았다.

사실 그녀의 결혼식을 앞두고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고민하다가,

좋은 모습으로 참석하고 싶어 새로 옷을 한 벌 샀었다.

그러나 웬걸,

정신없이 퇴근하자마자 서울에 올라오다 보니,

전혀 다른 옷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것이 이틀 전이다.


이틀동안 뭐 하나라도 입고 갈 만한 것을 살게 있나 두리번거리다 끝내 사지 못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한 결혼식에 너무 터무니 없는 복장으로 참석하면 어쩌나 싶어 가는 길 내내 p에게 엄살을 피웠다.


그렇게 참석한 결혼식장,

내부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던지 얘는 도대체 언제 이렇게 다 준비를 했나 싶을 정도로 보기가 좋았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원 동기들과,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까지.


식 내내, 누구보다 결혼식에 집중하면서 그녀를 눈으로 쫓았는데,

그렇게나 행복한 모습은 처음이라 못내 놀라고 말았다.

사랑이 그런거야?

몰라. 난 너만 행복하면 돼.

그 김에 p네 회사 전경도 구경했고 말이다.

그녀의 결혼식이 끝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는 나에게 p는 영화를 보자고 한다.

그동안 팝콘 팝콘 노래를 불렀으니, 팝콘을 먹으며 마블 영화나 보자고.


그러나 내 변덕은 끊임이 없고,

나는 영화표에 팝콘까지 사 두고서도 삼겹살이 먹고 싶다며 다른 동네로 나가자고 한다.

그는 그러자면서,

팝콘을 먹었으니 영화는 나중에 보면 된다고 한다.

미안했지만, 난 영화보면서 남은 이 시간들을 보내고 싶지 않아.

너랑 수다나 떨래.

그렇게 나온 밖, 상냥한 날씨가 우릴 맞아주는 것 같다.

캬 역시 변덕 최고야.

삼겹살도 먹고, 된장찌개도 먹고.

냉면도 먹고, 계란후라이도 먹고.

거기에 바로 옆 카페에서 커피까지 먹으니 이것이야말로 행복이 아니겠어?

행복은 이런거지 암.

우리는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이라며,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빛이 만드는 공간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잘 있어라 한양아.

곧 돌아올게.

아직은 월요일마다 돌아오는 직급별 식사와,

친구들과 함께 먹는 그릭요거트와

회사에서 보내주는 문화생활 같은 것을 잘 즐길 시간이니까.

오늘 밤하늘은 유독 밝고, 큰 달이 떴다.

큰 달이 뜨면 소원을 빌어야만 할 것 같아, 용기내 말해본다.


다음주는,

제 무능함은 반만 깨닫고

얼마 없는 유능함은 두 배로 깨달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세요.

가벼운 것들은 지나갈거에요. 외워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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