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럽다는 건 뇌가 건강하다는 것
얼마 전까지 일 문제로 몇 주 동안 마음고생을 나름 심하게 했었다.
머릿속에 자꾸 문제 상황과 '잘 안 풀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끊임없이 맴도는 바람에
꽤 오랜만에 잠도 많이 설치고, 소화가 안 돼 한 달 사이에 4kg가량이 빠졌었다.
하루 종일 잔뜩 긴장된 표정으로 아내와 아이들의 말에 반응도 예전처럼 못해 주고,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신경 쓸 겨를도 없어 가족들에게까지 피해가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이 직장과 학교에 가 있는 시간에 잠깐 혼자 집에 들를 일이 있어 미뤘던 화장실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를 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시끄러운 고민들이 날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래서 음악을 크게 틀어 주의를 좀 분산시키기로 했다.
아내가 휴직하던 시절에 집에서 아기를 보고 집안일을 하느라 지칠 때면,
우리가 어렸을 때 들었던 댄스곡을 틀면 힘이 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90~00 댄스곡 모음'이라는 재생목록을 찾아 재생을 했다.
강렬한 비트와 함께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노랫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땐
산으로 올라가 소릴 한번 질러봐
나처럼 이렇게 가슴을 펴고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누구나 세상을 살다 보면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어
그럴 땐 나처럼 노래를 불러봐
쿵따리 샤바라 빠빠빠빠
가삿말이 귀에 와서 꽂히는 순간 몇 주간 코르셋으로 꽉 조여 있었던 것 같은 가슴이 뻥 뚫리고,
긴장돼 있던 얼굴근육이 풀어지며 나도 모르게 흥얼흥얼 같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잘 해결될 거야. 시간이 지나면 풀릴 문제야."라며 고맙게도 주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꽤 건네줬지만,
이 노래만큼 진짜 기분이 편안해지지는 못했었다.
또한, 더 신나고 세련된 최신곡들(난 할 수 있다, 힘을 내! 하는 내용)을 들었을 때에도
그렇게 와닿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수십 년 전에 저장된 기억주머니 속에 잠들어 있던 비트와 강원래 씨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나의 몸은 자동으로 반응하여 즐거운 감정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저녁에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여보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보네."라는 반응이었다.
어렸을 때 조용필과 심수봉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부모님을 보며
'어른들은 참 촌스럽다.'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나도 어느새 '촌스러운 어른'이 된 것이다.
일생동안 겪은 일들 중에 10대에서 30대 사이에 일어난 것들이
가장 오랫동안, 강력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이 시기를 '회상 절정 시기'라고 한다.
아주 최근에 있었던 일들은 당연히 기억이 더 잘 나고 조금씩 과거로 갈수록 희미해지는데,
이상하게 20대 때의 기억은 10년 전에 있었던 일들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나이대에는 졸업, 첫 연애, 취직, 결혼 등 태어나 처음 겪게 되는 일들도 많고,
그렇기에 더 강렬한 감정과 결합되어 기억되기 마련이다.
더불어 어린 뇌에서 열심히 새로운 회로를 만드는 시기라,
이때 만들어진 회로들이 주된 뼈대가 되어 나의 정체성으로서 자리를 잡기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2020년대 K-POP이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사춘기 시절 TV '가요톱텐'에서 흘러나온 '쿵따리 샤바라'를 들으며 느꼈던 신선한 충격과 희열만큼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뇌 속에 이런 단단하게 형성된 결합이 작동한다는 건, 나의 뇌가 건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다.
물론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들이 오랫동안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면, 그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는 뇌는 기존의 결합을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으니 실망할 필요는 없다.
다음에 만약 가요무대를 즐겁게 보는 동안 딸이 와서
"맨날 그런 촌스러운 거 말고 다른 거 보면 안 돼?"라고 한다면 이렇게 대답하자.
촌스러운 게 아니야, 엄마는 뇌가 건강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