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한 스푼_#2] 하이퍼픽션과 주동-반동인물의 전복
들어가며
이 리뷰는 이런 단순한 의문에서 출발했습니다. 왜 이런 집필 의도를 가졌을까하는 호기심이 들더니 심화리뷰까지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잠깐 소설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권겨울 작가의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1)의 도입부는 꿈도 희망도 없이 처참합니다. 역하렘 게임 속 악역 페넬로페에 빙의된 주인공은 공작가에서 생존하기 위해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감내하면서 각 서브 남자주인공들의 호감도까지 올려야 합니다. 호감도를 올리지 못하면 죽게되는 게임 속 세계에서 페넬로페는 사랑을 위한 로맨스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로맨스를 계획합니다.
그리고 호감도를 올리면서 그녀를 학대하고 방치하던 가족들은 페넬로페에게 마음을 열고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녀의 목 언저리에 칼 끝을 세웠던 황자는 페넬로페와 함께 로맨스 서사를 완성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보면 흔한 로맨스 판타지와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흐름이 전개될수록 곳곳에 서사를 돕는 재미있는 장치들이 보였습니다. 특히 선택지를 고르는 것은 하이퍼 픽션(hyper-fiction)과 연결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습니다. 하이퍼 픽션 요소가 엿보인다는 것은 진행될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리고 하이퍼 픽션처럼 소설/게임 속 엔딩이 불분명해지는 시발점은 바로 악역이자 반동인물인 페넬로페에 빙의된 독자/플레이어가 눈을 뜨기 시작할 때입니다.
하이퍼픽션 다음으로 빙의 장르를 보는 두 번째 시선은 인물들의 역할과 대결구도에 두었습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대결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서사에 긴장을 주면서 주제의 이해를 돕는 좋은 장치입니다. 리뷰하게 된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에서 플레이어는 공녀의 자리를 두고 주인공과 대적하게 되는 반동인물에 빙의하게 되었습니다. 보통 극 혹은 소설은 대결구도에서 밀려난 반동인물의 파멸로 서사가 마무리되지만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에서는 서사가 비틀려지면서 대결구도가 전복됩니다. 필자는 이것을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대결구도에서 분석해보았습니다.
선택지를 고르면서 이야기가 진행된 초반부는 하이퍼 픽션(hyper-fiction)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윤우2)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하이퍼 픽션(hyper-fiction)은 여러 개의 상황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독자는 마우스로 임의로 줄거리 전개를 선택해서 소설을 재창조할 수 있는데 이는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과 재창조의 권리를 존중하고 문학의 민주주의를 연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다3) 고 합니다. 독자/플레이어가 줄거리 전개를 선택해서 서사와 극 주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은 극 인물이 좀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가가 제시한 선택지를 능동적으로 고를수록 독자/플레이어는 서사에 종속되어버립니다. 아무리 고민하고 선택지를 누른다 해도 결국 작가가 설계한 결말에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하이퍼 픽션에서도 여전히 창작의 주체4)는 작가입니다.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의 도입부는 하이퍼픽션의 전개와 유사합니다. 역하렘 게임 플레이어였던 주인공이 눈을 뜨니 악역 페넬로페가 되었습니다. 모니터 밖에서 선택지를 고르던 외부인과 비교해보면 게임 속 페넬로페에 빙의되어서 선택지를 고르게 된 독자/플레이어는 서사와 좀 더 거리감을 좁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으면서 중요하게 넘어가야 할 클리셰가 있습니다. 빙의장르에서 흔한 클리셰 중 하나로 주인공은 빙의하는 책 혹은 게임 내용과 앞으로 전개될 서사를 숙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밀차의 『그녀가 공작가로 가야 했던 사정』이 모범답안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에서 주인공의 기억은 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왜냐면 주인공은 매번 플레이하던 노말모드 주동인물인 이반 에카르트가 아닌 노말모드에서 죽게되는 반동인물 페넬로페 에카르트에 빙의했기 때문입니다. 독자/플레이어가 빙의된 세계임을 인식하고 있지만 앞으로 전개될 서사를 모르는 형식은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빙의된 세계를 마주한 플레이어는 최대한 생존하기 위해서 페넬로페의 삶을 연기합니다.
그렇게 페넬로페의 삶을 연기하며 선택지를 고르던 페넬로페는 선택지를 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선택지를 끄게 되면서 독자/플레이어는 직접 서사와 접촉하게 됩니다. 제시되는 선택지를 거부하고 스스로 대사를 만들어서 진행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창작의 주체인 작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기존 서사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독자/플레이어의 행보는 알고리즘에 종속된 수동적 인간상이 아니라 창작의 주체가 된 작가상에 가까워짐을 보여줍니다. 하이퍼픽션과 달리 빙의 장르에서 빙의된 독자/플레이어가 제시된 선택지를 거부함으로써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과 재창조의 권리를 존중되고 문학의 민주주의가 열리게 됩니다.
하이퍼픽션과 빙의장르는 가까운 듯 먼 친척 관계입니다. 박윤우(2011, p331)는 종래의 문학관은 단일한 줄거리와 주제가 담긴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반대로 하이퍼픽션은 독자에게 선택지를 제시하고 줄거리를 완성하게 합니다. 종래의 문학관에서 독자와 작가의 소통구조가 일방향적 이었다면 하이퍼픽션은 작가와 독자가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소통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소설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주고 작가는 피드백을 받으면서 소설이 매번 재창작되는 것입니다.
하이퍼픽션에서 작자와 독자는 선택지라는 매개체를 거쳐 소통합니다. 매개체를 통한 소통구조를 채택함으로써 하이퍼픽션은 작가와 독자가 서로 공존하는 영역까지 끌어올리게 됩니다. 하이퍼 픽션은 작가가 줄거리를 제시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진행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독자가 줄거리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역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는 공존 관계를 보여주어 자칫 작가와 독자가 수평적 관계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매개체를 통한 소통구조는 창작의 주체인 작가와 그렇지 못한 독자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빙의 장르는 하이퍼픽션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빙의’라는 독특한 소설 기법으로 극복합니다. 기존 하이퍼픽션에서 서사는 작가가 설계한 단계를 거쳐 독자에게 유통됩니다. 하이퍼픽션은 서사와 독자 사이의 중간 단계를 ‘빙의’라는 설정을 도입하여 획기적으로 축소합니다. 그 결과 작가가 설계한 중간단계와 매개체가 생략된 빙의장르에서 서사와 독자 사이의 간격은 좁아지게 됩니다.
작가가 설계한 선택지(매개체)를 거치고서야 서사에 참여할 수 있었던 하이퍼픽션의 한계를 극복한 빙의 장르에서 독자는 서사와 직접 접촉하게 됩니다. 서사와 접촉하게 되어 주제에 개입할 수 있는 독자는 창작의 주체가 되어 극 주제를 중심으로 작가(기존 서사)와 대립하게 됩니다. 두 주체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극 주제는 뒤틀리게 되면서 서사 역시 재조립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이 바로 주동인물과 반동인물의 전복입니다.
1) 『악역의 엔딩의 죽음뿐』은 카카오페이지 기준으로 인용하였습니다.
2) 서경대 교수. 주요 저서로 《한국현대시와 비판정신》이 있고, 〈중등과정 시교육의 현황과 개선방향 연구〉등의 논문이 있다.
3) 박인기 외 14인, 『문학의 이해』, 삼지원, 2014, p.331
4) 창작의 주체는 서사에 개입할 수 있으면서 극/작품의 주제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서사에 개입하기에 앞서 먼저 세계관을 인식해야 한다. 세계가 책/소설/드라마/극/애니메이션 등 작품속 현실임을 이해한다면 서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서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창작의 주체는 서사에 개입해서 극 주제에 접근해 서사를 재구성할 것인지 기존 서사를 유지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서사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주제에 개입할 수 있는 작가와 달리 종래의 문학관과 하이퍼픽션에서 독자는 서사에 종속되고 극 주제에 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