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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Nov 17. 2022

반성하게 되는 유전

적록색맹과 반성유전

사무실 책상 옆 창밖으로 편의점이 보인다.

산책하며 지날 때도 교문 앞에서 이 편의점이 보인다.

<불편한 편의점>이 떠오르는 편의점인데 등교 하굣길에는 학생이 가득인 것을 보니 편리한 편의점인가 보다.

학교 바로 앞에 문구점 대신 편의점이 있다. 6년 전에도 있었는데 같은 편의점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편리하고 잘 운영되는 편의점인가 보다.

편의점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있다.

초록불이 켜진다. 편의점에 가서 오늘 2+1 음료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만 교문밖을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지는 못하고 신호등에 반짝이는 초록불을 쳐다본다. 신호등의 빨간색 불과 초록색 불을 보면 심장이 아려온다.


최근에 아이들과 공부한 부분이 유전이다.

유전은 쉽지도 않고 까다롭기도 하지만 또한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사람의 유전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의 아이들이라 본인이 물려받은 신체적 유전에 민감하다.

유전 단원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적록색맹이 나온다.


붉은색과 초록색을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눈의 이상을 적록 색맹이라고 한다.
적록 색맹은 유전자가 성염색체인 X염색체에 있다.
유전자가 성염색체에 있어 남녀에 따라 형질이 나타나는 비율이 다른 유전 현상을 반성유전
이라고 한다.


적록색맹은 붉은색과 초록색을 *적록색맹이 아닌 사람처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적록색맹인 사람은 횡단보도 건널 때 신호등 앞에서 힘들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책에는 적록색맹이 아닌 사람을 정상으로 표기했는데 그러면 적록색맹인 사람은 비정상인가? 그래서 나는 정상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별로 힘들지 않은데요."

한 학생이 대답을 한다.

공백은 길었으나 그동안 유전 파트를 같이 공부하며 가르쳤던 학생 중에 적록색맹이 한 명도 없었기에 나는 당연히 농담하는 줄 알았다. 어쩌면 이제까지는 한 번도 본인이 적록색맹이라고 스스로 얘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우리의 교과서는 적록 생맹이 정상이 아니라고 여기게끔 하니까 말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힘들지 않다고 얘기한 학생이 농담하는 줄 알았다. 그 학생이 다시 한번 얘기한다. 신호등 위쪽은 빨간색, 아래쪽은 초록색이라 켜지고 반짝이는 것을 보고 건너면 된다고 한다.

이 학생은 적록색맹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이제까지 지내오며 가장 불편했던 적은 언제였어?"

"학원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를 하고 빨간색으로 밑줄 친 부분을 적으라고 하는데 빨간색이 어느 부분인 줄 몰라 못 적었어요."

다시 당황했다. 다행히 나는 빨간색 분필을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내가 입고 있던 조끼가 빨강과 초록 무늬의 크리스마스 버전이었다. 어떻게 보이냐 조심스레 물었더니 빨간색 부분이 회색으로 보인다한다. 이 학생은 빨간색이 한 번도   리얼하고 강렬한 빨강으로 보인적이 없었겠구나. 피를 보아도 우리가 보는 그 피의 색처럼 안보이겠구나.

동정이 아닌 아련한 마음이 컸으나 나는 평상심을 유지하고 수업을 계속하여야 했다.

적록색맹은  X염색체 위에 있어 남자와 여자 사이에 형질이 나타나는 확률이 다르다. 적록색맹인 여자의 유전자형은 X'X'

적록색맹이 아닌 여자의 유전자형은 XX 또는 XX' 이다. XX' 는 색맹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나 표현형으로는 적록색맹이 아니다. 이런 경우를 '보인자'라고 한다. 이 '보인자'의 여자는 적록색맹이 아닌 남자와 결혼했을 경우 아들이 적록색맹일 확률이 50%이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불편하지 않았다는 이 학생의 경우는 아버지는 적록색맹이 아니고 어머니가 보인자였다. 어머니는 표현형으로는 색맹이 아니지만 아들에게 적록색맹 유전자를 물려준 것이었다. 이 학생은 자신의 상황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성격이 밝고 활달하며 반장이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적록색맹(적록색약이라도 한다)의 경우에는 대학에 지원하는 학과도 제한이 있다. 지금까지로는 공대에 진학할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적록색맹은 유전자가 성염색체에 있어 남녀에 따라 형질이 나타나는 비율이 다른 반성유전이다.

반성유전, 나를 반성하게 한다.

위 학생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직 살아온 인생의 경험이 많지 않은 나이라 그럴 수도 있겠으나 10대 아이의 밝음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이 학생보다 몇 배의 시간을 더 살았고 밥도 훨씬 더 많이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건강하지 않은 신체가 힘들 때면 잠시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했다. 아프신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있다. 경솔하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딸이었다.

다음 주 학생들이 시험에 들게 된다. 적록색맹(반성 유전)의 문제를 어렵게 내며 다시 반성해본다.

반성유전은 반성하게 되는 유전이다. 위 학생을 비롯해 유전으로 부족한 부분, 아픈 부분이 있는 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본다.



*저는 학생의 개인정보를 지키고 보호해 주어야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학생의 사례가 들어간 반성유전 이야기를 적게 되었습니다. 첫 문장만 적어놓고 조심스러워 쓰지 못하던 것을 용기를 내어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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