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만약 묘비명의 문구를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고 했다.
마라톤 레이스를 하다 보면, 끝까지 수월하게 달릴 수 있는 날도 있겠지만, 도중에 갑작스러운 통증이나 기력 상실로 도무지 달릴 수 없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그럴 때 순위나 기록은 이미 망가져버려 어떻게 손 쓸 수 없지만, 최소한 완주할지 말지, 또 완주한다면 어떤 자세로 완주할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무라카미 하루키
내가 소통하는 몇 개의 단톡방 중 한 군데에 비 오는 토요일 아침, 비모닝을 알리는 인사를 했다. 토요일 오전에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다. 나는 병원에 간다고 답을 했고, 상대방이 묻지도 않았는데 토요일 오전마다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고 얘기를 했다. 내가 병원을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면 황금 같은 주말 오전마다 병원에 간다고 하면 안쓰러워 상대방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머뭇거릴 듯하다. 나의 일상 중 두 번째로 자주 가는 곳이 병원인데 이제는 예전보다 수월하게 병원에 다닌다고 얘기하는 편이다.
단톡방에 한 분은 주말에 마라톤에 나간다고 한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문구가 생각이 났다. 나는 달리기를 하지 못한다. 예전에는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하지 못한다. '도중에 갑작스러운 통증이나 기력 상실로 도무지 달릴 수 없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이 언제가 마지막였던가 떠오려 본다. 달리던 도중 도무지 달릴 수 없는 상황을 맞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 고통스럽다. 취미가 조깅이나 마라톤이 아닌 이상 달릴 일은 거의 없으나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지금의 나는 하지 못하는, 할 수 없는 것이 많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조금 더 많다.
지난주에는 예약된 대학병원에 다녀왔다. 새벽 4시에 일어나 05:23 첫 SRT기차를 탔고, 07:15에 동탄역에 도착했다. 출근시간에 도착했더니 열차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역사는 복잡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속도를 내지 못하는터라 사람들이 가고 한산해진 다음 움직였다. 검사를 하고 기다렸다 진료를 받았다. 지난번에 처방받은 약, 대학병원에서만 처방받을 수 있는 귀한 약이었는데 나는 멍함, 메스꺼움, 구토라는 부작용 때문에 열심히 복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별로 호전을 보지 못한 우울감을 담당교수님께 얘기하고야 말았다. 그러려고 힘들게 새벽부터 올라간 것이었다.
담당교수님은 처방대로 약을 먹지 않은 나를 다그치기보다는 그래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지방에서 혼자 이곳 대학병원까지 오지 않았느냐고, 그리고 아직 매일 스스로 출근하지 않느냐고 한다. 앞으로도 남은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체력과 강인함이 필요하니 약을 조금씩 더 챙겨 먹어보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났다. 금식하고 새벽부터 움직여 여기까지 온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자신감이 생겼다. 진료를 마치고 기차를 타기 전 내가 사는 곳과는 먼 다른 지역 동네의 조경을 보며 잠시 마음을 다독였고 도착해서는 혼자서 먼 길을 잘 다녀온 나를 칭찬해 주었다.
병원에 다닌다는 말을 하면 '빨리 완쾌하세요. 건강해지세요'라는 답을 주로 듣는다. 누구보다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나이지만 다시 예전처럼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돌아가기는 힘듦을 서서히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자세로 완주할지는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 자신에게 말한다. 매일 가장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