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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Dec 28. 2023

살아있음을 공유하기

16호_건축과 시간_일상잡담


1. 공유 트렌드

셰어하우스, 게스트하우스, 하숙, 공유오피스. 업무공간부터 가장 취약하고 사적인 거주공간까지를 ‘공유’한다는 개념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공간 공유는 이전에도 일반적으로 존재했던 주거 행태지만, 금융업계의 관심에 힘입어 발전한 근 몇 년간의 공유경제 기반 사업은 기존 그것의 규모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인식하는 시작 지점을 찾으라면 나는 도시의 거실 역할을 하던 카페의 기능·개념 확대와 공간대여 사업의 급속한 확장을 짚겠다. 대여 가능한 공간들은 스페이스클라우드(space cloud)에서 각종 조건을 기준으로 분류되고, 그중에는 본래 대여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뿐 아니라 낮 동안 비는 바를 파티 룸으로 대여해 주는 형태의 공간도 있다. 공간 혹은 시간의 일부를 나누어 가지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가 되면서 공유에 대한 심리적 장벽도 허물어진 것일까. 사람들이 타자와의 교집합으로 내어놓는 영역은 점차 인간의 중심에 가까워져 갔고, 그 결과가 현재의 ‘공유 주거’ 이슈라는 해석을 해 본다.


공유 주거의 존재의의는 비용 절감이다. 어딜 가서 무엇을 해도 사람은 맘 편히 발 뻗고 누울 자리 한 칸 없이는 안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중요한 내 집 마련은 해가 갈수록 멀어지다 못해 흰소리로 들릴 지경이고, 30대가 어쩌고 전세가 어쩌고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정주지를 구할 날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나마 다른 사람과 예산을 합치면 전세라도 끼고 살 만한 집을 넘볼 수도 있겠지만, (생활동반자법이 기적적으로 곧 통과되지 않는 한) 현재 경제적으로 타인과 묶이는 가장 쉬운 방법인 결혼이라는 선택지 자체를 배제한 사람의 수가 결코 적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1인 가구의 증가 추세는 점점 가팔라지는데 주거 공간은 그만큼 늘어나지 않고 땅값은 여전히 비싸다. 과거 4인 가구를 주로 수용했던 3-bay 아파트 평면은 아무리 사치를 부린다고 해도 혼자 쓰기에는 과하다. 그렇다고 기존의 아파트를 허물고 자취방을 지을 것인가? 여러모로 못 할 짓이다. 그렇다면 4평짜리 자취방에서 미래만을 기약할 것인가? 아니! 사람은 집다운 집에서 살 권리가 있다. 결국 답은 자명하다. 같은 처지의 동거인을 구하는 것.


주거를 공유하는 사례는 몇 개의 유형으로 추려볼 수 있다.1)


셰어하우스: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공간이나 시설 따위를 공동으로 사용하며 같이 사는 집. 각자 자신의 방은 따로 쓰며 거실이나 주방 따위를 함께 사용한다.’ 주로 공유 주거라 함은 이것을 가리킨다. 드라마 《청춘시대》의 영향으로 선망의 이미지가 많이 퍼져 있다는 듯하다.


기숙사: ‘학교나 회사 따위에 딸려 있어 학생이나 사원에게 싼값으로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 보통 식당이 들어서 있고 식권은 별도 구매다. 수도권 외 지역이 시·도 차원으로 서울에서 운영하는 장학숙도 비슷한 유형이다.


하숙: ‘일정한 방세와 식비를 내고 머물러서 숙식하는 남의 집.’ 공간에 대한 책임과 권리 측면에서 동등한 셰어하우스와 달리 ‘남의 집’에 얹혀사는 형태다. 식사가 제공되는 경우가 많으며 많은 지인은 이를 장점으로 꼽았다.



공유 오피스가 자리 잡은 것은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였다. 땅은 좁고 노트북과 머그컵 놓을 자리 한 칸을 구할래도 더럽게 비싸니 더치페이를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별 업무를 위한 공유공간은 2000년대에 들어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라는 이름을 얻어 하나의 개념이 되었다.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의견을 나누는 협업의 공간.’ 지금까지는 고정된 책상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업무를 보는 식의 근무환경이 통상적이었으나 근래 디지털 기기와 클라우드 서비스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근무 환경의 시·공간적 제약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휴식 공간과 작업 공간은 분리하는 것이 좋고, 카페를 전세 내지 않는 한 테이블에 온갖 도구를 꺼내놓고 일하는 것도 며칠이 한계이며, 개인 작업실을 얻는 것은 수지가 어긋나기 십상이라 결국 안정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적합하고 합리적인 정주지가 필요하다. 이렇듯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라 불리는 이들에게도 어쨌든 발 붙일 자리는 필요하므로, 소속이 다른 사람들을 한 데에 앉힐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가 함께 발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유 오피스는 그 형태도, 규모도, 공유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회사 하나만 한 건물을 통째로 점유하고 층별로 자리별로 잘게 쪼개어 나눠 갖는 곳도 있고 사무실 하나만 한 공간에서 ― 일반 회사였다면 사원 하나하나의 자리였을 만한 ― 책상을 분양하는 곳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유의 이점은 확실하다. 적어도 정수기와 커피포트는 공유하는 편이 백배 이득이기 때문이다. 



이전 <잡담>의 회의를 위해 공간을 흔쾌히 내어 주었던 에이라운지는 후자의 경우였다.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한 첫 공유 오피스라는 점에서 개인적인 식견 확장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이 지면을 빌어 감사를 표한다. 


에이라운지는 에이플래폼이 운영하는 ‘건축코워킹센터’로 가로수길에 위치한다. 층고 높은 1층이 대여용 공간이고, 복층 구조로 이어지는 2층에는 개인 작업공간 및 회의용 긴 책상이 마련되어 있다.


예술인으로 살아가기에 대한 낭만은 급식을 떼기도 전에 전부 집어 던졌지만, 그때에도 그 이후로도 고양이가 돌아다니고 소파가 있는 공유 오피스만큼은 막연한 환상으로 한편에 남아 있었다. 공유 오피스의 대표 격으로는 세계 각지에 건물을 두고 오피스·데스크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위워크(WEWORK)가 있다. 고양이 출입 가능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숙집, 여행지의 게스트하우스, 드라마의 셰어하우스 정도로나 접하고 생각할 기회가 있을 공간 공유에 대해 이렇게 구태여 말하는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건축학과에서 ‘공유’는 단골 주제다. 설계 스튜디오에서 한번, 강연에서 한번, 공모전에서 한번, 나의 경우에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본 무비나이뜨에서 또 한 번. 굵직한 주제로 다룬 것만 해도 이 정도다. 내게 처음 이 화두를 던져 주셨던 교수님은 이것이 지금 건축계의 핵심 키워드고 앞으로는 그 존재감이 갈수록 더 커질 거라고 말씀하셨다. 건축학과 내에선 확실히 가장 핫한 주제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로 이걸 좋아하나?


정말로? 




2. 타인은 고통인가

기숙사 형태의 공유 주거를 경험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나는 아니다. 서울에 올라온 첫 2년간 장학숙에 거주한 감상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좋은 것.

-한 공간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자체.

-타인의 존재감.

-커뮤니티와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지 않았다는 약간의 안정감.

-혼자 살 때보다 대체로 좋은 시설들.   

-남이 챙겨주는 삼시 세끼(설계실에 붙어있느라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별로인 것.

-한 공간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자체.

-완전히 고립된 공간을 필요할 때 확보하기 어려운 것. 

-각자 요구하는 청결도가 다른 데에서 비롯한 악인은 없으나 피해자는 있는 신경전.    

-생활 패턴의 차이로 인한 (이하 동일).

-공간 관리에 드는 둘의 수고가 균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의 스트레스.


총점은 별 5개 중 3.5개, 한 줄 후기는 ‘가능하다면 이용하지 않고 싶음’이다. 기숙사의 최대 이점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최대 단점도 사람이 있는 것이다. 생활 패턴도 요구하는 청결도도 아주 다른 것이 서로의 탓은 아니나 어쨌든 고통은 실존한다. 뽑기 운이 좋다면 좋은 경험을 할 수 있겠지만 두 요소가 전부 나의 허용범위 안에 들어가는 동거인과 짝지어질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이런저런 예시와 경험을 들추지 않더라도 인간과 인간이 함께 사는 것은 상당한 희생을 수반하는 일이다. 가족 혹은 비슷한 형태로 묶인 이들과는 어찌 됐든 함께 살아야 하니 대부분은 몇 년에 걸쳐 부딪쳐 가면서 모서리를 둥글게 만들게 된다. 하지만 타자는 그만큼 긴밀한 관계로 매인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다시 마주치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자연히 그들과 부대끼는 것은 훨씬 지난한 과정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에게 공유 주거가 정말로 인기 있을까? 1인 가구가 급증하고 스테이크도 혼밥하고 싶어 하는 시대에? 


구글 검색창에 ‘셰어하우스’를 적으면 바로 ‘셰어하우스 현실’이 딸려 나오는 것만 봐도 느낌이 오지 않나. 커뮤니티 몇 개를 돌아본바 공통적으로 나오는 푸념은 공유지의 비극에 관한 것이었다.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할 것을 강제 받는 자취방이 아니라 누구의 것도 아닌 책임이 하나 이상 발생하는 공간에 발을 들인 이상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직접적인 충돌 외에 완전히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 또한 상당한 고통이 된다. 가장 취약한 삶의 영역을 내어놓기를 기꺼워하는 사람이라도 어떤 순간에는 아무 시선도 닿지 않는 공간이 필요해진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침대에서 핸드폰 들고 정오가 다 되도록 뒹구는 꼴을 남이 보는 걸 아주 달가워할 리가 없다.


건축학과 혹은 건축계 내에서 공유 주거는 흥미로운 주제로 다뤄지고 있으나, 현실에서는 이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삶을 공유한다는 것이 애초에 가능한 개념인가? 타인이 고통이 아닐 수 있나? 아니라면, 그걸 감수할 만큼 접점 없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나?



3. 살아있음을 공유하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게는 고통임을 깨달았으므로 2019년, 나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자취방으로 들어갔다. 크게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4시쯤까지 설계실에서 뭉그적대다가 씻으러 들어갈 수 있는 거리의 자취방은 건축학도에게 무엇에도 비하기 어렵다. 기댈 곳 없이 혼자서 집 하나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때로 큰 부담이 되었지만, 책임을 나눠 질 사람이 없으니 원망할 사람도 없어서 괜찮았다.


그러나 거기서 1년간 얻은 건 역설적이게도, 내가 언제까지고 이런 배타적 주거공간에서만 살 수는 없겠다는 막연한 예측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며칠 동안 입을 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도시에서 동거인마저 없는 상태가 되니 길을 잃기가 너무도 쉬워졌다. 나를 끌어낼 나 아닌 사람이 필요했다. 눈치 볼 사람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니 작년(2018년을 말한다)의 이맘때에는 사이가 좋지 않은 동거인의 존재 때문에라도 침대에서 일어나 사람 꼴을 하고 현관문 밖으로 기어나갔었더라. ……같이 산다는 건 그런 걸까. 타자와 삶을 공유한다는 건 그런 걸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현관의 흰색 등을 바라보며 생각했었다.


뿌리 없는 인생이다. 각자의 이유로 타지에서 생활하는 동안은 더더욱 그렇다. 아무리 일터에서 지내는 시간이 집에서의 두 배에 육박하게 된대도 집의 의미는 퇴색할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현대 개인의 뿌리가 되어 줄 ‘집’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음을 공유하는 것에 관해서 끊임없이 고민해 봐야 한다. 어떻게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그나마 덜한 고통이 될 수 있을지를 알고 싶어 해야 한다.


건축 설계 주제로 ‘공유 주거’를 다룰 때 우리가 나누는 것도 그러한 맥락의 이야기들이다. 어디까지 이들이 타협할 수 있을 것이고 어느 영역까지를 교집합으로 내어줄 수 있을지, 서로의 온기를 공유하면서도 눈 없는 공간을 소유하게 하려면 벽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등. 사실 앞서 말한 고통의 큰 부분은 주방과 화장실 등을 공유하도록 하면서 문과 벽으로 구분된 각자의 생활공간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물론 그건 더이상 원룸이 아니고, 우리가 구하는 방의 예산 범위에서도 동떨어졌을 확률이 높지만 말이다. 지금껏 본 개인 공간 확보와 적당한 가격이라는 두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최고의 사례는 이화여대 기숙사의 1인실이었다.2)



다른 이야기


보통 인간의 본질까지는 모르겠고 일단 나는 아주 혼자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걸 알고부터는 언제나 세상에 발을 묶으려고 애썼다. 쉽게 도망갈 수 없도록 오만 책임을 만들고 이름표를 붙였다. 하지만 그런 누름돌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기야 하겠지만, 이름이고 책임이고 그 무엇도 상관없어지는 순간이 있지 않나. 그런 때에는 쉽게 끊을 수 없는 관계가 하나쯤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아주 질척하게 엮여서 보통 노력으로는 끊어내고 도망가버릴 수 없는 타자가 필요하다. 지금 내가 처한 환경에서 가장 용이한 방법은 결혼이다. 언젠가 만날 수도 있을 평생에 걸쳐 이해하려 노력할 만한 사람이 시스젠더 남성이라면 걸릴 것이 없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지독하게 얽히기의 난이도는 급격히 상승한다. 생활동반자법(’생활동반자관계에 대한 법률’) 제정을 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정된 관계에 국한하기에는 우리의 뿌리가 너무 다양한 곳에 박혀 있다. 정주지에 목마른 우리가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공유할 수 있는3) 사람을 기적적으로 만났는데, 껍데기를 가릴 처지인가? 



모 판타지 소설4)에서는 개인은 타인을 통해 변증되고, 외부와 맺은 무수한 관계의 이름으로 구성되므로 ‘나’는 단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다들 사람이 싫니 어쩌니 아무리 투덜거려도 인간이 보편적으로 얼마나 공동체와 연결에 목말라 있는지는 지난 2년을 통해 어느 정도 증명된 것 같다. 공존은 언제나 고통일 것이나 그럼에도 우리는 부대끼고 마모되면서도 꽁꽁 붙어 있는 수밖에 없으니 상당한 비극이 아닌가. 사회적 거리두기 전략 하에서 2인실을 독차지하고 있던 이도, 지방의 본가에 내려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이도 곧 다시 동거인이 있는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높은 확률로 또다시 지난한 과정을 견디게 될 것이며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비슷한 고통으로 인한 화병을 달고 살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피할 수 없다면 적당한 판타지―드라마에 나오는 셰어하우스 같은 것―를 가져 보는 것도 괜찮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당신이 너무 불행하지 않기만을 심심히 바랄 뿐이다.



1) 사전적 정의는 셋 모두 네이버 국어사전/어학사전에서 발췌.

2) 이화여대 기숙사는 1-3인실 몇 개, 총 6-10인을 한 유닛으로 묶고 그 안에서 공동공간을 공유하게 하는 구조이다. 묶일 곳도 있고 남의 시선 없이 뒹굴 수 있는 방도 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입장에서의 의견이지만 실제 이용자 또한 만족스러워했으므로 타당한 질투로 보인다.

3)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서문에서 발췌. 언제 읽어도 굉장한 로맨티스트다.

4)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서 발췌. “나는 단수가 아니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셰어하우스.

 정글생존기. (2020). 위워크(WeWork)의 현재와 미래.

네이버 지식백과: 기숙사.

네이버 지식백과: 하숙.

마이워크스페이스. (2018). 코워킹 스페이스가 필요한 단 한 가지 이유.


도판목록

에이라운지 사진 출처 | AtoZ LOUNGE

위워크 사진 출처 | wework

전주 풍남학사 사진 제공 | 김정인

일러스트 | 프로잡담러 P(PSJ)


  

  


게재 : Vol.16 건축과 시간, 2021년 가을

작성 : 프로잡담러 I |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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