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달려 나가 문을 열어보니 웬 예쁘장한 아주머니가 서있었다. 뒤에는 아기가 있었다. 아빠랑 데이트하러 온 아주머니랜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또다시 아빠가 하나 남은 가족인 나를 무책임하게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꾸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 마디 언지도 없이 여자친구를 집으로 불러들인 아빠에게 화가 나서 울부짖으며 식탁에 있던 과일 바구니를 밀쳤다. 과일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나뒹굴었고, 아빠는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도무지 화가 멈춰지지 않았다. ‘또 버려졌어... 또 무책임하게 날 버렸어...’ 하며 엉엉 울다,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꿈이란 걸 인지하고도, 한번 시작된 울음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한동안 아기처럼 서럽게 울었다. 상처가 컸구나. 삼십 대나 됐는데 아직도 과거로부터 받은 상처가 크구나. 애착이 컸던 만큼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구나 하며 가엾은 나를 속으로 다독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부모님에게서 올바른 신뢰를 배워본 적이 없다. 약속은 늘 기분에 따라 바뀌었고, 싸우다 지치면 아빠는 집을 나가 연락이 두절되곤 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엄마와 함께 집 나간 아빠를 찾으러 다녔고, 받지 않는 전화번호를 누르다 지쳐 잠드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엄마는 아빠가 외도한다며 뒤를 캐기 시작했고, 외도가 뭔지도 모르는 나는 엄마와 함께 따라나섰다가... 술집에서 어떤 여자와 껴안고 나오는 아빠를 보게 되었다. 엄마는 여자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끌었고, 만취해 있던 여자는 인형처럼 질질 끌려다녔다. 차 뒷좌석에 마찬가지로 만취한 아빠를 짐짝 던지듯이 밀어던지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의 일을 아빠는 기억할지 모르지만 삼십 대가 된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땐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렇게 겹겹이 쌓인 기억들로 빚어진 게 지금의 나라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사랑을 함부로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아빤 이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엄마와 이혼 전 수년간 별거를 하면서 몇몇의 여자를 만났고, 누굴 만날 때마다 나에게 서슴없이 알려주었다. 아빠가 엄마와의 결혼생활을 힘들어했단 걸 알았고, 나 또한 엄마의 지독한 성격 때문에 힘들었던 건 마찬가지였기에, 아빠도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니며 남자친구를 사귄 것처럼 아빠도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쿨하게 그 사실을 인정하고 아빠의 연애상담도 해주었기에 아빤 더욱더 나를 친구처럼 생각하고 터놓았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와서야 이렇게 상처받아 울고 있는 내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땐 정말 나도 뭐가 뭔지를 몰랐던 걸까. 일찍 철이 들었다 생각했는데, 사춘기가 이제야 온 걸까. 제법 어른스러워질 나이인데 오히려 내 시간만 거꾸로 가는 것 같다.
대학생 때, 아빠의 외국인 여자친구가 나에게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했다. 나보다 어린 여자애였다. 아빠 또래도 아니고 딸보다도 어린 여자와 저런 사이로 지낸단 사실이 역겹고 싫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외면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곤 잊어버렸다. 감정을 직면하는 것보단 그러려니 하고 묻어버리고 잊는 편이 쉬웠으니깐. 그래서 몰랐나 보다. 아빠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기억들을 내게 심어줬는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지금의 내가 어떤 사고관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이제야 알게 됐다.
삼십 대인 나는, 전보다 쿨하지 못하게 되었고, 전보다 사랑을 못 믿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가지 못하게 더 꽉 부여잡게 되었다. 이렇게 가까이 달라붙어서 감정소모하는 게 스스로도 정말 힘들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 다른 데 눈을 돌리고 날 떠나가버릴까 봐 불안해서 그냥 두지 못한다. 갈수록 점점 더 가족이 그립고 사람이, 사랑이 그리운 나는 ‘내 사람’이라는 관계에 대한 강한 애착이 생겼고, 반대로 새로운 관계에선 쉽게 경계 안에 들어오지 않게 벽을 치게 되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에 과하게 매몰되지 않아야 하는 걸 알지만, 직면하지 않고 덮어만 둔다면 지금의 나의 근원을 알 수가 없다. 어딘가 아쉬웠던 나의 모습은 아주 어린 꼬마시절부터 겪었던 아빠의 외도로부터 온 불안 때문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 내겐 그 기억을 덮을 새로운 긍정적인 기억이 필요하다. 사람을 믿어도 된다는, 사랑을 믿어도 된다는,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하고 견고한 울타리가 필요하다. 내가 아닌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진 기억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앞으로 만들어질 부분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 내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사람은 아빠와 다른 사람이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믿어볼 용기가 필요하다. ‘믿어볼 용기’라니, 말이 참 우습지만 내겐 믿는 것도 용기가 많이 필요하다. 이제 지금의 나의 근원을 알았기에 과거는 저 멀리 두려 한다. 갑자기 흔한 노랫말이 생각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