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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주영
Mar 31. 2022
인형을 빨면 생기는 일
개인적으로 영민한 아이들보다 천진한 아이들이 더 예뻐 보일 때가 있다.
오늘도 재판을 앞둔 소년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년이라고 하기엔 이미 20살. 만으로는 18세이기에 감사히도 소년법 적용(처분 내용과 기록 여부 등 형법 적용보다 훨씬 낫다)을 받는 친구였다.
죄명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치상)과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위반이다. 즉, 무보험 오토바이로 사람을 치었고 합의가 되지 않은 것이다.
소년은 이전에도 무면허 운전, 절도 등 비행경력이 있었고 가정 내 보호력과 소년의 재비행 예측 등에 대해 진단이 필요했다.
소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재판 전에 OO군의 가정환경과 비행 동기, 피해회복 등에 대해서 사전에 조사를 하려 하니 상담받으러 오려므나"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정말 꽤 친절한 공무원이다)
소년은 아주 단박에
" 싫은데요."라고 굵고 짧게 말했다.
수백 건이 넘는 조사를 진행하면서 조사를 거부한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진술을 거부할 권리는 있으나 조사를 받는 것이 재판 결과에 더 도움 될 것임을 알고 있기에....
몹시 당황하며 왜냐고 물었다.
"비행경력이나 죄질로 보면 저는 아마 4호(보호관찰 1년) 아니면 5호(보호관찰 2년) 정도인데... 조사받아서 잘하면 4호. 아니면 5호 받겠죠."
나는 "그렇지만 1년 차이도 크잖아"라고 했다.
소년은
"저 다음 달에 군대 가요. 군대 가면 보호관찰 출석 안 해도 되고 제대할 때 되면 4호든 5호든 기간 종료로 끝나
있게 되
잖아요"
라고 했다.
'뜨헉!'
'똑똑한데!'
뭐지.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도 주변에 유경험자들이 말해 주었을 것이다. 할 말이 없었다. 군대에 가면 군법 피적용자로 분류되어 군대에 잘 있지 확인만 하는 것으로 기간이 종료되기 때문이다.
할 말은 없었지만 이 소년의 영민함에 화가 났다. 무지한 아이들의 비행이 더 무서울 때도 있으나 실질적으로 만나보면 무척 순수하고 순박하다. 그런 아이들의 상태는 백지상태와 가깝다.
무슨 그림이든 그릴 수 있다. 무슨 색깔이든 될 수 있다.
그런데 나쁜 쪽으로 영민한 아이들은 어느 정도 이미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품행이 불량한 주변 지인들로부터 때가 묻고 법을 알며 요령껏 피해 간다.
또박또박 반박하며 끝까지 안 오겠다고 한 친구는 결국 조사를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그런데 몹시 화가 났고 얄미웠다.
소년의 비행을 볼 때는 형법과 다르게 죄질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배경과 이면을 봐야 한다. 그동안 가정과 사회는 무얼 했는지. 아이를 방치했는지. 아이 정서는 어떤지. 혹여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위기 환경은 아닌지 찾아봐야 할 일이다.
그래서 조사를 똑똑하게(?) 거부한 소년이 미웠나 보다.
분을 삭이다가
문득
내 자리 위 창틀에 앉아 있는 세 마리의 양 인형을 보았다. 개청 때부터 있었는지 전임자가 두었는지 세 마리의 양이 있다.
상담실에 사는 양순이 삼 형제
이 양을 사다 놓은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세 마리의 양을 창틀에 두었을까
'양아치로 성장하지 말고 순한 양이 되어라'라는 주문을 걸었을까
세월의 흔적으로 먼지가 뽀얗게 얹혀 있다. 특히 하얀 양이 더욱 그렇다. 하얀 양은 처음부터 너무 하얘서 먼지랑 때가 더 잘 붙고 더 잘 보인다.
이 친구도 처음에는
원래
하얀
양이었겠지
생각하
다 하얀 양을 세탁하기로 했다.
뽀애진 양순이
양을 빨고 나니 마음도 양도 개운해졌다.
그러다
불현듯
양은 빨기 전에도
양이었고
빤 후에도 양은 양이라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먼지와 때가 묻었다고 해서 양이 양이 아닌 것이 아닌데...
좋은 주변인과 좋은 환경과 좋은 세상을 만나면 언젠가 예뻤던
뽀앴던
하얀 양이될 수 있겠지.
청소년을 상담하면서 또 때 묻은 아이를 만나면 한 마리씩 빨아 대며 스트레스를 날려야겠다.
다음은 분홍이
!
파랑이 다음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세탁할 양이 없으므로...
선한 양이되어랏 얍!
* 참고로 그 얄미운 똑똑이는 수강명령 의견을 냈다.(약한 처분이지만 기간이 없다) 군제대 후 교육 받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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