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영 Dec 04. 2023

김장김치 앞에 모두는 평등하다

"어머님, 저는 조선호텔김치 사먹어요."

추석명절. 이모님과 형제들이 모두 모인 자리. 매년 12월초 1년에 한번 꼭 치르는 행사지만 어머님은 마치 처음하는 행사를 선고 하는 사람처럼 사뭇 비장하게 말씀하셨다.


"올해 김장김치 합니다."


형제들과 이모님들 서로 '올거지?' 라는 암묵적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교환하는 동시에 태양열에 흔들리는 강아지 인형 목처럼 기계적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댔다.


그리고 모두들 12월 첫째주가 좋겠다며 날짜를 잡았다.


결혼 전과 결혼 후 달라지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가족이 모두 모여 김장김치 담그는 풍경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밤낮으로 일만 했던 우리 엄마는 김장을 하지 않는다. 필요할때 겉절이만 하거나 사먹었다.


결혼 전 자취하는 나에게 어머님이


 "김치는 엄마가 가져다 주나?"라고 물었다


"어머니, 저는 선호텔김치 사먹어요."


나는 제법 비싼편에 속하는 김치를 먹는다고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어머님은 사먹는다는 말에 놀라시는 눈치였지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김장김치 담그기 디데이 2주전이 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작은 이모, 이모부 못오신대' 동창회 모임이 잡혔다네."


"뭐. 어쩔 수 없지."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길 수도 있으니 그러려니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깊이 생각하는 편이 아닌 나는 짧게 대답했다.


김장 김치 디데이 1주전 남편이 말했다.


"성환이, 태환이 못온대. 한국어 능력 시험있는 걸 깜빡 잊었대"


"뭐? 어쩔 수 없지"


'취업 준비에 도움이 될 여러 자격증들이 있을 테고 시험이 대개 주말에 있으니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이번에도 짧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에도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김장김치 담그기 디데이 전날. 남편이 말했다


"누나네 못 온대. 아프대"


"뭐? 이럴 수가..."


사실 누나네 영향력은 크다. 식구가 5명. 일할 수 있는 성인은 3명이고 아직 어린 2명은 김장을 하는 동안 우리 딸과 놀 수 있기 때문에 여러모로 가장 쓸모가 좋은 가족이다.


결국 김장 디데이날. 6시간을 걸쳐 가야하는 시댁에는 나와 남편만 왔다.  


작년 5백포기를 했을 때는 그래도 일하는 장정이 11명이나 있어서 수월한 편이었지만 하필 너무 추운날이 었고 오랜시간 밖에서 쪼그려 앉아 작업을 하니 결국 몸살이 나고야 말았다.


작년의 수고와 휴유증을 생각하며 걱정과 두려움으로 어머님께 몇 포기나 되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얼마 안되"

라는 대답만 짧게 하셨다.


이윽고 남편과 아버님 손에 들려오는 양념 가득찬 대야를 보고 나의 나태는 멀찍이 도망가 버렸다.


'체념하고 빨리 끝내기나 하자'


다행히 작년에 비해서는 훨씬 적은 2백포기다.

남편과 나. 그리고 시어머니는 4시간에 걸쳐 김치 치대기를 끝냈다.


쉬엄쉬엄 대화하며 음악도 들으며 김치도 먹어가며 작업하니 생각보다는 수월했다. 무엇보다. 인원이 적어 마당이 아니라 집안에서 김장을 해서 춥지 않아 좋았다.


역시 좋을지 나쁠지 누가 아는가. 모든 일에는 다 일장일단이 있다는 말도 진리였다.

일손이 적은 대신 춥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8살 딸이 자기도 이번에는 엄마를 돕겠다며 장갑을 꺼내들고 양념을 치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사뭇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나, 이내 자신의 옷과 몸에 김치 양념을 잔뜩 묻혀 김치를 담근 것인지 김치가 된 것인지 알수 없었다.


딸을 샤워 시켜야 해서 품만 더 들었다.


어쨌든 김장김치 담그기 대장정의 끝은 마무리되었고, 쌓아 놓은 김치통을 보니 1년은 반찬 걱정없이 거뜬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부자가 된 느낌이다.


'나는 김치부자다'


저녁에 삼겹살을 굽고 생굴을 까 김장김치 한점 주욱~ 찢어 얹혀 먹으니 꿀맛이다.


노동해본 자만 아는 보상의 기쁨이다.


사실 서울-부산거리 톨게이트비, 기름값, 금요일 하루  연차로 포기한 연차보상비, 어머님 뵐때마다 드리는 용돈까지 하면 김장 김치 행사에 도합 40-50만원은 쓰게 된다 .


결혼 초에는 그냥 호텔김치 사먹는게  더 이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직접 기르신 채소에, 직접 우린 다시마 조기육수. 단맛을 위해 홍시와 배를 직접 갈아 넣은 양질의 좋은 양념들.


그리고 일을 마치고 즐기는 바베큐 가족파티까지.


나는 온 가족이 모여 김장김치 담그는 일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다만 다음해에는 온 가족이 모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


몇달 못본세 어머님 손등에는 깊게 박힌 굵은 주름이 하나 더 생겼다. 쇠약해져 가는 어머님의 작은 손등을 바라 보면서 몇 해나 더 어머님의 김장김치를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족 모두가 모이는 즐거운 김장의 추억. 부모님 생전에 더 많이 누려가시길.


어머님 말투를 흉내내며 속으로 외쳐본다.


'내년에는 다 빠짐없이 온나. 알았나.'       

 










 

매거진의 이전글 전장연과 이준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