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시류와 통념에 근거하여 다이나믹하게 돌아간다. 기본적인 틀과 그 규칙과 룰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현대인들 또한 무의식적 시류행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대 모든 문명과 발전의 기준점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법'이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와 그 외 모든 국가는 대부분 <법치주의>에 근거한다. 이 규칙이 있기에 사회적 통념에 따르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소외된 법적 사각지대 부류가 존재한다. 이들은 언제나 사회에 불편과 불만, 심지어 증오와 혐오를 겸비하며 살아간다. 이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와 예술 문화적 기회를 제공해주나 불행스럽게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물질적 풍요로움과 정신적 가치관 그 간극 사이에서 언제나 갈등하게 된다. 즉, 이를 문화지체 현상이라 한다.
"문화적으로 언제나 잘 사는 그들이지만
현실적으로 내면은 불행해보인다."
- SNS 이면 공간에 대해서 문화 기획자 A씨의 심사숙고
평생 함께 동고동락하는 주위 지인들과 친구들, 심지어 가족까지 있는 최고급 복지 상단에 놓인 그들이지만 정신적 지능은 점차 하향화되어간다. 이는 A 씨를 빗대어 표현한 점이 아니다. 암묵적으로 우리 모두 그렇게 살아가는 소외된 문화사각지대자들이다. 어떤 문화를 볼 때 단순히 내 앞에 놓인 결과물에 집착을 할 것인지 아니면 그 과정에서 얻어가는 기쁨과 열망의 지조 섞인 관념으로 발전할 것인지 그 몫은 모두 A 씨 외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할 과업 과제일 것이다.
느닷없이 친구가 새로 뽑은 차량을 자랑한다. 허나 이따금 그의 멘트는 점차 자신이 행복하다는 형식적인 <감정>에 기반하여 그 내면에 섞인 <욕구>를 더욱 펼치기 시작한다. 돈에 빗대어 표현하면 월급 통장이 올라갈수록 점차 시류에 편승된 정신적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다. 정말 불쾌하지 않을 수 없다. 겉으로 행복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뭔가 돋보일 우월감을 욕망이란 부정 위에 덮어씌우려고 한다.
그래서 세상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문화 또한 상대주의와 사대주의가 있듯이 세상 현대인들 또한 이 시류라는 현실과 문화라는 이상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우리는 이 불편함을 무릅쓰고 어떻게든 오늘도 상대방보다 더 우월했다는 표면적 모습을 보여주려고 발악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다.서로 끌어당기는 중력의 법칙 중 하나이다. 문화 또한 그렇다. 어떤 문화가 나오면 정치와 연계되어 있다. 여당과 야당의 합작품이 문화일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49 : 51의 승리자가 될 수도 있고, 패배자가 될 수도 있다. 그 1프로라는 비중은 종이 한 장 차이이지만 문화 사각지대 앞에서는 누구도 평등과 공정을 외치되 절대 불가하다는 기로에 놓인다. 미는 힘과 잡아당기는 힘은 흔히 사람 관계뿐만 아니라 공간에도 부여된다. 같이 있다는 그 장소와 상황을 마주하는 모든 현대인들은 감히 내가 스스로 행복하거나 불행하다고 스스로 외치지 않는다.
[PART2] 문화 제공자 VS 문화 소비자
경제적 관점에 따른 유토피아적 예술 문화 수요와 공급 법칙
팝업스토어를 진행하는 후암동 어느 사장님의 말씀을 빗대어 표현해 본다.
제아무리 사람들에게 좋은 문화와 정신 함양 파급력을 선사해 준다 하여도 그 내면에는 스토어를 하루에 운영하며 얻는 수익과 지출로 빠져나가는 전기세와 한 달 월세 등을 몸에 인지할 수밖에 없다. 문화란 단지 좋은 영향을 발휘한다 해도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입장에서는 100프로 이상적인 정신 위로와 철학이 가미된 이야기를 숨긴 채 살아간다. 이는 문화 공간을 운영하는 어느 한 사람의 하소연이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문화 정책 이면에 사로잡힌 그만의 하소연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공간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적극적인 서비스 정신이 그러한 물질적 가치관에 방해받기 싫다고 하셨다. 이마에 돈이 붙은 형식적인 문화복합단지 몇 사장님과 달리 그의 말투와 어조 그리고 입가에는 침묵과 진심 어린 목소리를 겨우내 뱉고 있었다.
"문화적 소비와 공급 기준점은 5:5가 적당합니다."
- 후암동 팝업스토어 사장님 J 씨
문화는 결국 사람을 상대로 하는 정신적 투자 교류와 같다. 눈에 보이는 이벤트성 굿즈와 포스터, 리플릿 등이 존재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비가시적인 강연과 정서적 미팅을 통한 교훈과 문화 발전도를 제공해 줄 수도 있다. 이는 매우 상대적이라 정답의 기준점이 없다. 허나 우리는 모두 가시적인 결과물에 의존하며 살아갔다. 지금도 그렇지도 모른다. 아닌가.
팝업스토어 J 사장님은 굿즈를 제작함에 앞서서 사람들이 그 물품을 소지하면 추후 추억으로 남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 즉 기억 애장용 소장품을 간직하기에 객관적인 문화 지표물로 정확히 잡힐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욱 생산에 집중했다만 코로나 이후 공급 과잉으로 인한 지출 과다가 역효과를 남겼다 한다. 그래서 온라인적 비가시성 컨텐츠 제작에 몸소 뛰어들었다. 이는 사람들이 자주 애용하는 SNS의 파급력을 기준점에 두었다. 더 추가한다면 100프로 온라인 유통 채널 가동에 집중하면 그 공간이 마치 유토피아와 같은 세상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 프로모션 기획에 있어서 다소 아쉬운 점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유통 채널의 비중 또한 예산에 고려하여 진행해야 했으나 추가 디자이너와 마케터 섭외에 예산 과다 지출이 문제였다는 점이었다.
문화적 소비에 대해서 수요와 공급의 차이는 확연하다.
어느 한 행사를 진행함에 있어서 작은 복합문화단지 공간 대여부터 시작하여 더 넓게는 시민들이 애용하는 공원과 운동장까지 고려하게 된다. 반응 또한 남다르다. 문화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예산과 문화 효용성 그 관계>에 대해 더욱 심사숙고하며 결과적으로 지출비보다 문화적 가치관이 더 향상되었으면 문화적 정서함양이 잘 된 케이스일 것이다. 반대로 문화 제공자는 소비자에 대응하는 1:1 문화적 발전도에 더 주목할 것이다. 소비자 한 명의 입소문에 의해 2명, 3명 점차 상승되면 <문화적 경제성> 또한 더욱 상승될 것이다. 돈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 같은 경제적 소비자라 할지언정 문화 공간을 대여하는 공급자 입장에서 더 피부로 체감할 수밖에 없다.
[PART3] 문화 수요의 공공재 VS 사적재
도시재생센터의 이면적 사업 진행성... 누구를 위한 문화적 수혜인가?
최근 4월까지 진행했던 도시재생센터 부업을 끝마치고 현재 축제 행사 관련 일을 진행하고 있다. 공통점은 <문화발전에 이바지>한다는 점이다. 현대인들의 불편함을 억제하기 위해 필요한 공익적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연히 법 자체가 다르다. 도시재생센터 업무는 공공성에 기반하고, 기획사는 사적성에 중점을 둔다. 흔히 나는 문화 기획 보조 역할을 하다 아예 수익을 어떤 소비자로부터 제공받을 것이냐는 그 기로에 섰던 것이다.
"과연 이 정부 보조사업이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일은 문화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는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현재 주민들의 반발과 청년 예술가들 사이 접점이 제대로 잡히지도 않았으면서 센터에서는 사업 진행에 힘을 붙일까? 정녕 이 사업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건가?..."
명목은 공익사업이지만 뜯어보면 모든 니즈를 충당하기 위한 기준점이 없었다. 월 달 기획서 기준점에 기재된 예산란과 다소 상이했던 점이 의아했다. 물론 월 달 센터 평가 공유회 중간에 예산 변경이 가능하나 실질적으로 해당 마을 주민들과 예술가들은 모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동등한 조건이라면 나 또한 돈을 받고 일하는 근로자이지만 이 <알 권리>를 해당 수혜자에게만 적용된다는 점이 불편했다. 물론 센터 입장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코디네이터분과 분과장분이랑 이야기하며 돈과 밀접한 사항을 주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조율되었다만 사실상 그럴 시간이 남아돌지 않았다. 그게 따라 나 혼자라도 현장을 직접 임장하며 문화 사각지대 사람들과 소수 미팅하며 현실을 알리기에 바빴다. (임장은 당시 부동산 투자 지역 용어인데 해당 센터 내부에서도 은어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내가 부동산 투자를 위한 극소수 수혜자들을 위한 직원인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공익사업 안을 뜯어보니 결국 모든 동네 사람들이 <문화적 수혜>를 겪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대부분 그러했던 점이 아니다. 분명 명목과 의도가 탁월했던 계획이지만 막상 현장에 가면 모르는 게 대다수였다. 그러니 나 또한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그로 인한 지자체 예산 일부를 받는 나는 양심의 가책은 덤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기회였다. 오히려 기획사에 들어가 지역축제 담당을 하는게 좋다 판단했던 기점이었다. 지역 축제는 주민들의 문화 편의성 제고라는 공익적 사업이 결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회사 소속이라 사적인 돈은 받는 것이기에 그런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그로 인해 사실 내가 생각했던 벽화사업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다. 봉사 단체를 섭외하고 그 지역을 살리기 위해 2-3달 계획했지만 정말 이론과 현장은 다르다. 왜 벽화사업하냐고 나무라는 동네 어르신들과 그 약간의 수수료 수혜성이 예술가 집단에게 간다는 소식도 이미 알고 있었다. 예술가들은 오히려 이 벽화사업에 찬성했다. 재개발 지구로 확정된 그 마을 특성상 정부 사업에서는 그들에게 좋은 먹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정작 문화 사각지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도시재생의 환멸감을 느끼고 오히려 지역재생에만 중점으로 두는 협동조합과 소규모 단체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기로 했고 속이 탁 트인 느낌이었다.
도시재생, 탁상공론이란 말이 왜 있는지 알겠다. 내부를 까면 양파처럼 까이는 게 현실적인 공익사업이다.
"누구를 위한 문화적 수혜인가?"
- 해당 사업 B동네 주민 VS 예술가
[PART4] 불편한 편의점
재개발 공간과 문화 소외 지역 주민들
연극 내용 : 서울역에서 노숙 중인 사내 '독고'. 어느 날 70대 여사 '임영숙'의 지갑을 찾아준 인연으로 그녀가 운영하는 편의점 '올웨이즈'에서 야간 알바를 시작한다.
4월에 연극으로 제작되었던 <불편한 편의점>은 일반 소비자들보다 오히려 원작 덕후와 청파동 일대 주민들에게 중요한 문화 요소로 각광받고 있다.
나 또한 관람 후 판단한 건데 원작과 다소 상이했지만 나름 결과는 비슷했다. 중요한 점은 가상의 인물 독고와 임영숙 또한 주연이라 읽고 조연이라 불렀다. 살다 보면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문화 사각지대 주인공들이지만 말 그대로 현대 통념상 주인공이 아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재미있는 점은 청파동 배경 또한 서울역 인근에 있는 재개발 구역이다. 이미 획정된지 오래이다. 오세훈 시장은 역사적 거점 지역인 이 동네를 어떻게 개발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재개발이란 말 이면에는 또한 도시재생을 담고 있다. 그 옆 동네 만리동과 서계동 또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산가옥이 곳곳에 보였던 삼각지 열정도와 그 일대를 생각하면 이 연극의 배경이 되는 공간인 청파동 일대 또한 어쩌면 옛 건축물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러한 공간, 어쩌면 로컬이라 불리는 곳들은 점차 기억 속에 사라지고 있다. 작은 야채가게와 편의점 또한 그렇기에 이 공간을 기억하는 분들에게 좋은 연극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연극 파급효과로 오히려 봐야 할 당사자들 또한 문화적 혜택을 받길 기대한다. 정작 부동산 투기와 과열 지구로 개편된 이 상황에서 용산구 주민들의 불편한 심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PART5] 내셔널 트러스트
적산가옥 주인장 E 씨의 고민
우리가 인상 찌푸렸던 한국 근현대사의 중점에서 일제 주민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이 점차 문화재 요소로 잡히고 있다. 왜 그럴까? 정부 중심 주도 재개발은 현 대한민국의 숨겨진 문화 요소를 안일시 하고 있다. 즉 현재 남아있는 전통적 한옥 일대 또한 상업관광지구로 발전하니 그나마 남아 있던 적군의 가옥을 문화재로 넣으려고 한다. 중요한 점은 역사적 아픔이 깃든 곳이라고 우리가 마냥 비난/비판할 수 없다. 그 가옥이 어쩌면 그나마 남아있던 주민들의 마지막 생태 공간일지도 모른다. 정작 그 일대 가옥 주인은 정부를 더 비판하고 곱씹을지도 모른다.
"정부는 우리에게 문화적 수혜를 제공해 주었는가? 일제 가옥에 살았다고 본인을 문화적 피해자라 생각하는 그들. 무분별한 재개발로 인해 삶의 터전을 지켜주지 못한 불찰 아닌가?"
- 삼각지 적산가옥 일대에 사는 주인장 E 씨
PS.
문화는 곧 현시대 시류를 따라가고 트렌드에 맞춰서 변화한다.
하지만 이를 즉각 흡수하는 현대인들은 위험에 빠지고 있다.
SNS를 활용한 단순 세뇌적인 문화 흡수는 그들에게 욕망과 허울 가득한 문화 지체현상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