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별 유년 에세이1
47년생 아빠는 공부를 좋아했다. 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다. 차남이라서.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차남까지 대학에 보낼 수 없었다. 서울대라면 보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삼수까지 도전해 봤지만 떨어졌다. 그 뒤 생업에 뛰어들었고 공부와는 멀어졌다.
아이가 태어났고, 내 자식에게만은 그런 서러움 물려주고 싶지 않았나 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교육을 시켰다. 큰언니가 79년 2월 생인데 당시 삼천포에서 조기교육이란 찾아보기 어려웠다. 농사를 짓거나 생업을 하다 보면 아이들은 뒷전이었고 자녀 교육은 더욱 신경 쓰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빠는 달랐다. 영어 카세트테이프를 사고, 학습지를 구독했다. 큰언니를 시작으로 작은 언니와 나까지 아빠와 함께 주말이면 학습지를 했다.
학교도 입학하기 전 나이였다. 아빠가 10칸짜리 공책 맨 위 칸에 다양한 기호를 그려주고 따라 쓰라고 숙제를 내주셨다. 다이아몬드 모양, 백설 무늬, 하트 등으로 기억되는데 하루 종일 노느라 숙제를 안 했다. 저녁때 아빠가 안 했다고 혼을 냈는지 자는 시간 엎드려 울면서 그 칸을 채워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옆에서 안 자냐고 물었고, 이거 다 해야 잘 수 있다고 얘기했다. 종일 숙제를 까먹고 놀았다는 자책과 이걸 언제 다 하고 자나 하는 막막함에 울었나 보다. 아빠의 숙제는 그렇게 7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쏙쏙 영어> <튼튼 영어>는 방학이면 등장했다. 국어사전 두께의 테이프함을 열면 양쪽으로 4개씩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다. 매일 30분씩 들으면서 따라 말하게 했다. 다이얼로그가 나오고, 한 문장씩을 떼서 천천히 말해주는 형태였다. "Would you like some juice?"는 아직도 기억난다. 외국인 아저씨가 천천히 또박또박 발음했다. 어색하게 들렸던 그 발음을 따라 말했다. 플레이어의 되감기를 눌러 한 회를 몇 번씩 반복해서 들었다. 삼천포 깡촌에서 중학교 가야 ABCD를 배울 때, 초등학교 가자마자 영어 듣기를 방학마다 했었다.
TV도 아빠 몰래 봐야 했다. TV 보고 있으면 공부 안 한다고 혼내셨다. 아빠가 일하다가 들어오실 때가 되면 눈으로는 화면을 봤지만 귀로는 아빠가 오시는 기척을 들으려 예민해졌다. 멀리서 아빠 오는 소리가 들리면 서둘러 TV를 끄고 공부방으로 가서 공부하는 척을 했다. 언니들과 같이 지내던 그 방은 공부방으로 불렸다. 우리 자매 각각 책상 3개와 아빠 책꽂이와 책장까지 있는 방이었다. 거기서 잠도 자고 놀기도 했지만 공부방이었다. 2살 어린 남동생에겐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었다. 어린 남동생이 방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장난으로 시끄러워졌고 그럼 아빠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누나들 공부하는데 왜 방해하고 그라노. 빨리 나와!'
유년의 힘든 기억 중 하나는 방학 저녁 숙제검사 시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아빠는 방학이 되면 저녁마다 종일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일과를 묻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날 공부한 내용을 확인한 거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아빠는 우리 형제를 한 명씩 안방으로 불렀다. 중학생인 큰언니는 그때부터 모범생이었기에 큰 무리 없이 지나갔다. 문제는 둘째 언니였다. 언니는 공부보다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았다. 아빠에게 혼나면서도 그때뿐, 잘 바뀌지 않았다. 자주 숙제를 안 했고 아빠를 화나게 했다. 아빠의 목소리가 커졌다.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내 심장이 쿵쾅거린다. 내가 오늘 한 내용을 다시 본다. 노느라 공부를 적게 한 게 후회된다. 언니가 울면서 아빠 방을 나온다. 내 차례다. 들어가기 겁난다. 나도 혼날까 봐. 긴장되는 마음으로 아빠 방에 들어가고 떨면서 공부한 내용을 말한다. 별 탈 없이 아빠 방을 나올 때의 해방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 방학을 보내다 보니 해 지는 시간이 되면 기분이 우울해졌다.
성적표가 나온 날인지, 우리들 공부를 봐주다 화가 난 날인지 아빠와 엄마가 싸웠다.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 그래야 사람대접받을 수 있다.'라고 말하는 아빠와 '공부보다 사람이 되어야지'하고 맞서는 엄마였다. 일방적으로 아빠가 화를 쏟아내는 시간이고 엄마는 몇 마디 대응할 뿐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무시하는 말도 했다. "니는 공부를 안 해봐서 그런다. 무식한 니가 뭘 아노?" 우리 공부 때문에 두 분 싸우는 소리를 건넌방에서 들으며 세 자매는 울었다. 공부가 뭐라고. 다음날 아침 엄마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 밥을 차리는 모습에 마음 아팠다. 우리 집에서는 공부를 못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었다. 자주 죄를 지었기에 무거운 마음이었다.
그 시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있었다. 철 지난 비디오를 보면서 무척이나 공감했다. 성적에 모든 것을 거는 부모님의 압박, 공부를 못하면 존재 의미 없어지는 기분이 이해되었다. 아빠도 이 영화를 보고 달라졌으면 했다. 공부를 너무 강요하면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단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공부를 잘해야만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현실에선 겁 많고 착한 딸이었다. 아빠에게 혼나지 않으려 공부했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학교를 졸업하며 기뻤다. 공부를 안 해도 되어서. 더 공부하려고 대학원 가고 박사 하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웠다. 어떻게 공부를 더 하고 싶지? 공부가 재밌다고? 부럽다. 영어는 특히 더 싫었다. 그렇게 오래 했는데 여전히 못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빠를 원망했다. 억지로 시켜서 그런 거라고.
그런 내가 아이를 낳았다. 자녀교육 앞에서 고민이 많아진다.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놓자니 불안하다. 아들이 게임할 때마다 뭐라고 하는 나를 보며 아빠가 떠올랐다. TV 못 보게 하던 아빠랑 나는 얼마나 다른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란 말을 굳게 믿고 있는가? 아빠 덕분에 억지로라도 공부해서 취업했으니 이렇게 편하게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지금 충분히 행복한가? 아직도 아빠 때문에 시키는 일만 하며 산다고 한탄하고 있나? 공부한다고 했는데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다. 이런 건 왜 배우지 못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