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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eng Oct 17. 2022

완벽한 하루를 망치는 방법

3. 가을 바다




고작 여섯 시간에 불과했지만 확신할 수 있다. 나는 그토록 행복한 적 없었다. 행복을 한 차원 넘어서는 말이 필요했다. 그래, 행복보다는 황홀함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하루를 망치는 데에는 정말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이런 방식이라고는 백 번을 죽었다가 살아나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실소가 나왔다. 분명 미친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아무도 보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분명 나는 요 며칠 새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죽어있음에 틀림없다. 기억이 너무 흐리다. 계좌를 열어보니 이십만 불 가량이 사라져 있었다. 영문을 모른 채 내역을 보니 온전하지 못한 정신에 마구잡이로 선물거래를 한 기록들이 있었다. 평소였으면 속이 꽤나 쓰렸을 텐데 정말이지 하나도 쓰리지 않았다. 계좌를 당분간 잠가두기로 했다. 잔고 안의 숫자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돈을 써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로 돌려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일 주, 한 달, 일 년. 이기적 이게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태어나기 전으로 돌려야 하냐는 의미 없는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잔잔한 파도가 치는 바다 앞에서 글을 쓴다. 동화 속에서 나올 것만 같다던 곳에서. 그리움이, 감정이 증폭된다. 요즈음에는 날이 많이 추워져서 바다를 찾는 이가 많지 않은가 보다. 같은 공간이지만 오늘따라 쓸쓸해 보였다. 우리의 웃음소리가 아주 먼 과거같이 느껴진다. 시간이 기억으로 남겨지는 느낌이었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물이 나왔다. 눈에 모래가 들어갔나 보다. 거센 바닷바람에 이내 눈물이 마르겠지만 앞이 너무 뿌옇다. 선명하지 않아서 더 좋은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시간들을 선명히 바라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추억이 되살아났다. 추억은, 나도 모르는 새 여전히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애써 추억을 죽이려 했다. 살아 있어도 죽은 것처럼. 나와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추억이 나를 계속 쫓아오려고 해서 당신과 산 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자리를 떴다. 그런다고 해서 도망갈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색이 바래버린 털모자가 나를 지켜줄 것만 같았다.







우리가 소원권을 가지고 내기할 때는 마치 연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아, 나는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정말이지 내기에서 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당신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나의 소원이기에 당신이 소원권을 가짐으로써 행복해하는 것으로 나의 소원권은 채워졌다. 행복하던 당신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에 선하다. 당신의 그런 모습을 마음 깊이 사랑했다. 그날, 나의 소원은 이루어졌기에 언젠가 당신도 남은 소원권을 쓰기를 소망해본다.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지만 언제라도 좋다. 소원권의 유통기한은 만 년 후로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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