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영채와 경주 여행을 다녀온 뒤, 석가탑이 참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불국사는 평생 3번 정도 방문 했는데 내가 온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에 안 남았다. 사람도 바글거리고 불국사가 부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너무 세속적으로 변했다는 느낌만 받았다. 이번 방문엔 영채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석가탑과 다보탑을 또렷하게 보게 되었는데, 참 볼수록 묘했다. 그렇다고 <금각사> 미조구치처럼 탐미주의에 미친 건 아니지만, 석가탑에 담긴 내용들이 흥미로웠다.
석가탑은 또 다른 말로 무영탑(無影塔)이라고 불린다. 그림자가 없는 탑이라는 뜻이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에서 비롯되었는데 유능한 석공 아사달은 석가탑을 만들 동안 사랑하는 여자 아사녀와 만날 수가 없었다. 탑이 완공되기 전까지 금녀의 구역이었기에 서로 깊게 사랑한 연인은 생이별을 하고 있었다. 아사녀는 탑이 완공되면 연못에 그림자가 비출거라 생각하며 수없이 기도하며 아사달을 기다렸다. 몇 년이 흘러도 못에 그림자가 떠오르지 않자 그리움에 낙심한 아사녀는 연못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 설화에서 왜 석가탑은 그림자 없는 탑으로 묘사될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공(空)이기 때문이다. 텅 비어서 휑한 공(空)이 아니라 만물이 창조되는 바탕이 되는 비어있음이다. 공(空)과 무(無)는 다르다. 공은 무에도 유에도 치우쳐있지 않다. 노자의 <도덕경>을 보면 지知를 멈추고 명明을 보라고 한다. 지는 한쪽으로 치우친 지식을 뜻하고 명은 해와 달이 묶인 한 단어로 만물의 운행 원리인 도(道)를 뜻한다. 우리가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들은 한쪽으로 표현됐을 뿐이지 그 안에는 다른 면이 동시 존재한다.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뜨는 것은 하나이지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석가탑 옆에는 석가탑에 비해 화려한 다보탑이 존재한다. 석가탑이 공(空)이라면 다보탑은 색(色)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물질 현상인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의미다. 석가탑(空)과 다보탑(色), 그 둘을 함께 보는 마음 안에 불성이 있다.
1966년 도굴꾼들에 의해서 석가탑이 부서진 적이 있었다. 탑 안에 있을 사리와 사리함을 훔치기 위해 석가탑을 헤집어 놓은 것이다. 가장 땅 밑 1층에 보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들쑤신 도굴꾼들은 허탕을 쳤다. 대범하게도 며칠 뒤에 다시와 꼭대기인 3층을 털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도굴꾼에 의해 망가진 석가탑을 보고 망연자실했는데, 불행 중 다행인 게 석가탑을 보수하는 도중 2층에서 여러 가지 유물들과 함께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나왔다. 도굴꾼을 뒤쫓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는데, 도굴을 사주한 사람은 삼성의 초대 회장인 이병철의 형 이병각이었다. 욕에 눈이 먼 자들은 만물의 창조인 공(空) 앞에서 아무것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