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빛창가 Nov 14. 2022

경동교회와 남영동 대공분실

건축가 김수근을 통한 건축가와 직업윤리에 대한 생각

세계 근대 건축계의 3명의 거장은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거장은 누구일까? 건축가 김수근이라고 이야기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르네상스 호텔, 세운상가, 주한 미 대사관 같은 유명 건물을 설계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김수근 건축상' 이 있을 정도이니 건축가 김중업과 함께 한국 근대 건축에서의 그의 입지는 근접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건축에 대해 공부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바로 건축가의 직업윤리에 대한 문제이다. 건축가는 자신이 세운 건물의 용도에 대해 과연 책임이 있을까? 다시 말하면 자신이 세운 건물이 좋은 목적으로 쓰이지 않고 나쁜 목적으로 쓰일 때 도의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오늘 소개하는 건축가 김중업이 이 논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아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경동교회이다. 경동교회는 1980년 초반 작품이다. 외관은 마치 기도하는 두 손을 모은듯한 모습이며 붉은 벽돌로 되어있다. 교회의 출입구는 독특하게도 대로변이 아닌 건물의 뒤쪽에 있다. 이는 교회를 빙 둘러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속세에서 종교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염두에 둔 설계라고 하니 그의 인문학적인 고뇌에 다시 한번 경이로움을 느낀다.


경동교회

외부는 붉은 벽돌에 창이 없는 반면 내부는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있으며 중앙의 십자가 위로 난 유일한 천장을 통해 빛이 내려온다.(건축에선 역시 빛이 중요하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세상의 고뇌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도록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건축물들을 보다 보면 빛과 함께 벽돌, 콘크리트 등의 건축재료를 자유자재로 이용하여 이용객들에게 그 건물의 목적을 정확히 보여주고 이를 통해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한다는 느낌을 받고는 했는데 이 건축물 역시 교회라는 건물에 대한 건축가의 생각을 은연중에 알 수 있도록 의도한, 그 건축물 본연의 목적에 부합한 작품인 것 같다.


경동교회 내부 [출처: 공간]


다음에 소개할 건축물은 경동교회와는 어쩌면 정반대의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 한국 근대사의 뼈아픈 진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이유도 모른 채 고문을 당하고 죽어나갔던 공포의 장소이다. 1976년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가 대간첩 수사 명분으로 만들었다.


우선 그 당시 건축물에 흔히 쓰지 않았던 검은 계열의 벽돌을 사용한 것과 조사실이 지하가 아닌 5층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건물에서 또한 가지 눈에 띄는 특이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5층 창문의 폭이다. 조사실이었던 5층은 창문 폭이 20cm도 되지 않는다. 피의자들이 조사를 받다가 도망치거나 투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심리를 이용해 공포감을 조성하는 등 철저히 목적성을 가지고 설계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부분으로, 그의 천재성이 왜곡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무척 아쉬운 생각이 든다.

옛 남영동 대공분실 [출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폭이 20cm 정도로 좁은 창문 [출처: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또한 가지 독특한 부분은 아래의 나선형 계단이다. 1층에서 5층으로 바로 연결이 되어 있는데 피조사자들에게 두건을 씌운 뒤 이 계단을 이용해 바로 5층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 계단은 폭이 1m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이며 끌려간 사람들이 누구인지 노출되지 않고, 현재 몇 층에 있는지 알 수 없도록 창문이 없는 폐쇄된 구조로 피의자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줄 수 있는 구조이다. 또한, 5층에는 16개의 조사실이 있는데 초록색의 조사실 문이 서로 마주 보지 않고 어긋나게 함으로써 건너편 방에 있는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도 소름 끼치는 점이다. 이 5층은 철저히 고문과 취조에 최적화되어 있어 과연 건축가가 그 용도를 몰랐다고 할 수 있을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여러 논란을 뒤로하고 박종철 열사와 김근태 고문 등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끔찍한 장소인 것 같다. 그들이 그 안에서 느낀 공포는 어땠을까? )



건축가는 건축주의 의뢰를 받아 설계를 진행하며 최대한 건축주의 니즈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만약 건축주가 보편적 가치에 어긋나는 요청을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맞을까? 어떤 이들은 건축물의 용도에 대해 건축가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다른 이들은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축물은 비난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무리 실력 있는 건축가라도 비 윤리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건물을 짓는다면 그 사람은 그동안의 업적도 인정받지 못해야 할까?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솔직히 당연히 거절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건축가 역시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에서 대범하게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처절하게 고뇌하지 않았을까? 그 상황이 되어보지 않는 한 결코 그 누구도 당연히 공공의 선과 도덕적 행동을 택할 것이라는 단언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자유 민주주의 환경에서야 이런 딜레마에 빠질 일 없겠지만, 아직도 세계의 수많은 곳에서 건축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건축가들이 이러한 불필요한 고민 없이 세상에 도움을 주는 아름다운 건축물들만 지을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그 호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