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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제 Oct 15. 2024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 숲해설 봉명산 다솔사를 다녀와서 -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게 하는 비극적인 이 말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가막살나무의 꽃말이다. 야생의 꽃나무에게는 너무 강열한 꽃말이라 무척 인상적이다. 성경에도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질투는 스올(Sheol)보다 잔인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왜~~ 가막살나무에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꽃말을 붙였을까?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감정 중의 하나로 죽음과 같은 두려움도 사랑이 있다면 이겨낼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가막살나무의 슬픈 전설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브런치가 나에게 준 삶의 변화는 생각보다 크다. 먼저 관찰과 기록이다. 사람과 자연에 대하여 더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다. 오늘도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리고 브런치 스토리로 세상과 소통하고 서로 위안을 받는다. 가장 큰 장점은 불면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잠들지 않거나 잠을 깨면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쓸 수 있다.      

< 다솔사 둘레길에서 만났던 나무, 대팻집나무, 덜꿩나무, 정금나무 등이다.>

다솔사(多率寺)는 내가 사는 곳과 가까이 있는 봉명산아래 자리 잡은 작은 오래된 절이다. 천년 고찰(古刹)이란 말은 이 절에 어울리는 1500년 된 절이다.

다솔사(多率寺)란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풍수지리학적으로 대장군이 나오는 터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다솔사를 승병기지로 삼아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봉명산 다솔사를 가면 꼭 봐야 할 5가지를 정리해 보았다.


1. 소나무 숲길을 걸으면서 ‘어금혈 봉표(御禁穴封表)’ 바위를 찾아보자.

2. 안심료(安心寮) 마루에 앉아 명상에 잠겨보자.

3. 만해 한용운 스님이 회갑에 심은 황금공작편백나무를 안아보자.

4.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열반에 드는 와불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

5. 죽로지실(竹爐之室) 현판과 적멸보궁 뒤 차 밭에서 바라보는 다솔사풍경을 느껴보자.      

체력이 된다면 약 7Km의 물고뱅이마을 둘레길도 추천한다.

< 왼쪽 위_다솔사가는 길, 황금편백나무, 왼쪽 아래_안심료, 적멸보궁의 와불이다. 부산의 문학동호회에서 다솔사를 방문하여 문화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었다. >


< 소나무 숲길과 어금혈 봉표御禁穴封表 >

어느 절이든 절로 가는 길이 절보다 더 예쁜 것 같다. 월정사 전나무길이 그러하고 갑사 가는 길이 그러하다. 다솔사도 입구까지 가는 소나무길이 무척 멋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다솔사를 소나무가 많이 있는 절이라고 오해를 하기도 한다.     

소나무길을 오다 보면 “어금혈 봉표御禁穴封表”라고 적혀있는 바위가 있는데 “다솔사 경내에는 무덤을 파지 말라”는 임금님의 어명이다.

조선시대 다솔사의 터가 명당으로 알려지자 세도가들이 사사로이 묘를 쓰려고 하였다. 이에 다솔사 스님들이 상소를 올려 고종이 다솔사에는 혈자리를 파지 말라고 명한 표지석이다.      

     

< 다솔사 안심료(安心寮)와 만해, 효당, 등신불 >     

안심료는 3·1 운동 기미독립선언서 ‘공약 3장’을 초안했던 만해 한용운이 12년간 은거한 곳으로, 한용운은 이곳에서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교단의 혁신에 중점을 두고 불교유신운동을 전개하였다. 만해가 거처하던 안심료(安心寮)에는 1934년에 김동리도 함께 기거하였다. 김동리는 만해 한용원, 효당 최범술, 김범부(김동리 친형) 세 사람이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한 승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영감을 얻어 역작 ‘등신불(等身佛)’을 썼다고 한다.      

    

< 왼쪽 위_숲길에서 만난 야생화와 집에 꽃꽂이 한 모습, 왼쪽 아래_스님께 허락을 받고 서봉암 차밭에서 직접 끊어와서 만든 수제 녹차 >

< 적멸보궁과 사리탑 >

적멸보궁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으니 불상을 모시지 않는데, 다솔사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물게 열반에 들기 직전의 부처님 모습인 와불상이 모셔져 있다.

적멸보궁은 원래는 대웅전이었다. 그런데 1978년 대웅전의 삼존불상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할 때 후불탱화 안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되었다. 이후 대웅전을 중개축하여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바꾸고 전각 뒤에 사리탑을 세웠다.          


< 황금편백나무 3그루 >

1939년 8월 29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60세 회갑기념으로 직접 심었다는 황금공작 편백나무 3그루가 있다. 1939년 일제 강점기 암울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독립의 희망을 찾기 위해 회갑을 맞으신 만해 한용운 스님의 심경을 생각하면서 나무를 안아드리면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죽로지실(竹爐之室)>

다솔사 뒤편으로는 효담 최범술이 조성한 차밭이 있다. 다솔사는 일제 강점기 이후 끊어진 한국 근대 차문화의 산실이라고 한다.

적멸보궁 앞 종무소 건물에 죽로지실(竹爐之室)이라고 쓰인 현이 있다. 누가 봐도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죽로지실(竹爐之室)은 우리나라 절이나 암자에서 자주 보이는 편액으로 진품은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죽로지실(竹爐之室) 글씨는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 써 준 것으로,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났으며 이후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초의선사는 김정희에게 늘 차를 보냈는데 그것에 보답하고자 초의선사가 차를 마시며 거처하는 방의 이름을 지어서 글씨를 써 준 것이 바로 죽로지실(竹爐之室)이다.         

 

작은 절이지만 사연도 많고 볼거리도 많은 다솔사이다.  

< 직접 그려보고 비교해보면 덜꿩나무와 가막살나무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
< 덜꿩나무의 꽃이다. 이 꽃은 지난 5월봄에 찍은 사진이다. 가막살나무의 꽃과도 비슷한데 가막살나무의 슬픈 전설이 생각난다. >

< 덜꿩나무와 가막살나무 이야기 >     

- 덜꿩나무 -     

덜꿩나무의 꽃은 작은 흰꽃인데 이 꽃을 자세히 보면 예쁘다. 이 작은 꽃 하나에도 온갖 자연의 섭리와 신비한 구조가 다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는 덜꿩나무꽃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봄철의 하얀색 꽃과 가을철의 붉은 열매가 아름다워 공원수로 많이 식재된다.

타원형의 잎은 마주 보기로 달린다. 잎뒷면에 털이 소복하게 나 있어 만지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덜꿩나무라는 이름은 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들에 있는 꿩들이 좋아하는 열매를 달고 있다는 뜻으로 들꿩나무로 불리다가 덜꿩나무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덜꿩나무는 잎이 곁가지 하나 더 올라가 위에서 자라기 때문에 아래서 살펴보면 초록의 색깔도 다른 나무의 잎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런 설명을 듣고 위를 쳐다보니 초록의 잎 색깔이 더 다양하고 멋져 보였다. 자연의 신비란 끝이 없다.    


-가막살나무-      

5월에 피는 꽃은 흰색으로 여러 개가 모여 조금 흐트러진 접시 모양을 이룬다. 꽃이 피기 전, 하얀 꽃봉오리가 마치 '까마귀가 먹는 쌀'과 비슷하다고 하여 '가막살나무'라고 부른다. 꽃말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이다.     

생김새가 덜꿩나무와 흡사해 구별하기가 어려운데, 가막살나무의 잎은 타원형인데 비해 덜꿩나무는 잎 끝이 뾰쪽하게 나왔으며, 가막살나무의 잎자루가 덜꿩나무 잎자루보다 더 길기 때문에, 잎과 잎자루로 구별할 수 있다.   


가막살나무에는 슬픈 전설이 하나 있다. 옛날 옛적에 까막골에 가마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소녀가 살았는데 이 아이의 한살 많은 오빠와 오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가 탄 배가 뒤집혀 죽게되는 불행한 사고로 고아가 된 가마는 이웃동네에 양녀로, 오빠는 소금장수에게 입양되었는데 훗날 이 소녀가 자라 처녀가 되고 동네 총각과 결혼하여 아이도 낳고 잘 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 총각이 자기의 친 오빠였다. 이런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다가 식음을 전폐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내가 죽거든 까막골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  이듬해 무덤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라 행복했던 날들을 잘 알려주는 듯한 흰 꽃송이가 피어나고 사랑한 마음을 나타내주는 붉은 열매가 열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가막살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 메타쉐콰이어와 낙우송의 잎은 자세히 보면 쉽게 구분이 된다. 왼쪽이 메타쉐카이어_가지에 마주나는 메타세콰이아 잎, 오른쪽은 낙우송_가지에 두 줄로 어긋나는 낙우송의 잎 >


< 메타쉐콰이어, 낙우송, 일본 삼나무 이야기  >     


봉명산 다솔사 가는 길에 메타쉐콰이어 멋진 숲길이 나온다. 메타쉐콰이어는 자연에서는 사실상 멸종위기 종이지만 인간에 의해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은행나무의 경우와 비슷하고 할 수 있다. 메타쉐콰이어와 낙우송, 일본삼나무에 대해서 나무위키 사전에서 알아보았다.  


-메타쉐콰이어 -

 1940년대 전까지 화석으로만 알려졌었는데,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 중국 사천 지방 주민들이 ‘수삼(水杉)’이라고 부르던 나무가 알려지면서 1943년 왕짠이 처음 표본을 채집했고, 그 자료를 토대로 쩡완준이 신종임을 확신하고, 확인을 위해 베이징에 후시안수에게 자료를 보낸다. 이렇게 화석종으로만 알려졌던 메타세쿼이아 속 나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 보도블록을 파괴하는 경우도 생겨서, 이런 단점이 알려지고 나서는 도심지 가로수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 낙우송 -

보통 침엽수는 낙엽이 지지 않는 데 비해, 낙우송은 침엽수이면서도 낙엽이 지는 특이한 나무이다

생김새가 비슷한 수목으로 메타쉐콰이어와 낙우송이 있으며, 심지어 가까이에서 유심히 보지 않는 한 구별이 힘들다. 차이점은 메타세쿼이아는 잎이 마주나는데, 낙우송은 잎이 어긋난다는 점이다. 또한 크게 자란 낙우송은 공기뿌리가 송송송 튀어나오는데 반해, 메타세쿼이아는 그런 게 없다.

공기뿌리 때문에 정원수나 가로수로서는 기피되는 편이다. 비슷한 모양에 공기뿌리도 없고 낙엽도 훨씬 붉은 메타세쿼이아를 심으면 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메타세쿼이아가 가로수로 유명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일본 삼나무 -

나무가 높고 곧게 뻗기 때문에 숲을 이루면 상당히 장관이다. 그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에서 조림사업, 귤밭 방풍림(제주) 목적으로 많이 심는다. 그러나 삼나무 특성상 수관이 온통 숲을 덮어 그 아래로는 햇볕 한 점 들지 않아 관목과 풀들이 자랄 수 없고, 작은 나무들이 없으니 새와 동물들이 깃들지 않아 나무는 있으되 야생 생태계는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삼나무의 문제점은 일본에서뿐만 아니라 제주도에서도 골칫거리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심은 삼나무는 식목일 식수사업으로 심은 것으로 감귤나무 방풍용으로 심은 것 등으로 인해 삼나무가 급속도로 불어났는데, 이 때문에 한라산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높게 자란 삼나무 울타리가 햇빛을 가리고 겨울 냉기를 가둬서 감귤나무에 냉해를 입히며, 제주도민의 20%가 꽃가루 알레르기에 괴로워하는 등, 일본과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 옆으로 누워 자라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 나무가 한 그루가 힘겹게 버티고 서있다.>


< 옆으로 누운 나무 >    

 

이 나무를 보면  쉼보르스카의 시 구절 '두 번은 없다'가 생각난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이 굽은 나무의 생태를 오늘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굽은 나무가 특이하여 예쁘다고 하는데 굽은 나무는 햇빛 경쟁에서 밀려나 나무들 사이에 왕따를 당해 힘들게 살아가는 나무였다. 또한 이 굽은 가지는 뿌리도 힘들게 반대방향으로 자리를 잡아 나무가 쓰러지지 않게 아주 힘들게 지탱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나무의 뿌리 처럼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 나무도, 사람도 사회도 지탱하지 못한다는 숲 선생님의 말씀에 무척 공감하였다.


< 숲속에서 하는 자연놀이, 숲에서는 나무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 교감하면서 행복한 힐링을 찾는다.>


10월 10일 진주 시민의 날이다. 진주에 남강에서는 남강유등축제가 한창이다.    

 

1592년 10월 임진왜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날이 10월 10일이어서 진주시민의 날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593년 7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극심한 장마로 지반이 약해져 진주성이 무너져 조선군과 진주 백성들이 왜군에 맞서 진주성을 지키다 민관군 7만명이 전멸하였고 남강은 피로 물들었으며 진주성에는 시신 냄새가 30리를 진동하였다고 한다. 두 차례의 전투에서 순절한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진주 백성들이 남강에 유등을 띄우던 유등 풍습을 1949년부터 유등놀이로 정착시켰다.    

< 진주남강 유등축제 불꽃놀이와 김시민호 유람선 >

서산대사, 사명대사는 무엇때문에 목숨을 걸고 일본과 싸웠고,

만해 선생님은 왜 이 곳 다솔사까지 와서 죽기를 각오하고 독립운동을 했을까?

김시민 장군과 진주시민, 그리고 논개가 정말 중요하게 여긴 것은 무엇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사랑하자 죽음이 두렵지 않게, 질투하지 말자 스올보다 잔인해지지 않게...     


“ 분명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


P.S.: 스올의 뜻_구약 성경에 나오는 스올(Sheol)은 히브리어로 ‘보이지 않는 세계’ ‘죽은 자들의 세계’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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