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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다니엘 Sep 23. 2022

리스타트 51 - (38)

넘버 원


한국어와 한국 문화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서 내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미국에서 거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 한시도 한국어나 한국문화를 잊고 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 조국에서 일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견해는, 그 당시 내가 10대 시절을 보낸 1980년대의 여느 이민가정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가정 분위기와는 많이 차이가 났다. 왜냐하면 그 당시 어린 자녀들을 키우던 대부분의 이민가정 부모들은, 그들의 어린 자녀들이 모국어와 모국문화의 뿌리를 소홀히 하더라도, 가능하면 빠른 시일 안에 영어를 습득한 후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서 그 또래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을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내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없는 미국의 작은 소도시들에서 내 10대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나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잊고 사는 것이 더 정상적인 분위기에 휩쓸려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잊고 살던 그 시절의 내 또래 친구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그들이나 나에게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좀 달랐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시절, 단 한 번도 내 부모님으로부터 한국어나 한국문화를 소홀히 여기더라도 영어를 빨리 습득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두 분께서는 항상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잊지 않고 유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두 분의 그런 개방적인 사고방식은 나로 하여금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한국에서 일하면서 모국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체험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잘 알려진 개척지


그래서 반드시 2002년에 서울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이유만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나는 2002년 봄이 되면서부터 한국에서 일할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4월의 어느 날, 나는 내가 이력서를 내고 지원했던 한국의 어느 한 직장으로부터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는지의 여부를 묻는 이메일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인터뷰에 참석하겠다는 답글을 이메일로 송부한 후, 서울에 나갈 때 가지고 갈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내가 과연 한국에 거주하며 일할 수 있을지의 여부를 나 스스로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그런 나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상당히 우려하셨다.  


“얘야. 잘 해낼 수 있는 거지? 여비는 충분히 있는 거냐?” 


평소라면 내게 절대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셨을 아버지께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내게 물으셨다. 


“그럼요, 아버지. 걱정 마세요.”


“얘야. 만약에 도저히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되면 아무 때라도 돌아오려무나. 우리는 항상 여기 있을 거니까. 알겠지?” 


어머니께서도 서둘러 짐을 싸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우려의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사실 나의 그런 결정은 나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내 부모님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아들인 내가 조국을 떠난 지 거의 20년 만에 그때 당시로는 외국이나 다름없는 고국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도 없고, 그 끝을 알 수 없는 모험의 길을 나선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우려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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