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지훈 Dec 03. 2022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초등학교 때 배웠던 것이 기사 쓰기의 기본임을 처음 깨달았다.

나와 샘을 빼면 우리 팀 모두는 저널리스트라든지 에디터라는 직업이 배경인 사람들이었다. 소셜 미디어에서 일한다고 하면 젊고 힙한 사람들을 떠올리기 마련이었지만 방송국의 페이스북은 방송국의 얼굴과도 같았고 저널리즘 학위와 경력을 갖춘 사람들이 배치되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젊고 힙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대부분이 밀레니얼이었고 유행에 환하기로 말하자면 따라올 사람들이 없었다. 모두가 대중문화의 구석구석을 꿰고 있는 사람들이라 웬만한 지식 가지고는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였다. 대화 채널에 밈 하나를 올리면 거기에 한 수 두 수를 더 뜨는 유머로 감각을 자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비디오 프로듀서들이 쓰는 영상 카피는 모두 알리사에게 검토를 받아야 했다. 처음엔 영상 글쓰기를 하나도 몰라 알리사에게 폭풍 같은 피드백을 받아야 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초등학교 때 배웠던 그게 기사 쓰기의 기본이었음을 처음 깨달았다. 2분 내외의 영상이라 분량은 적었지만 거기서도 중요한 내용은 다 담아야 했다. 나름 조사를 해서 기사를 썼다고 알리사에게 보여주면 알리사는 날카로운 질문을 했고 나는 답을 몰라 그냥 그렇게 짐작했다고 (“I just assumed”) 말했다. 그럼 알리사는 "Let’s not assume"이라고 답했다. 네 명의 프로듀서들 중에서 글발이 제일 약한 건 분명 나였다. 이런 글은 써 본 적도 없었지만 문법부터가 문제였다. 나는 오늘날까지도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를 정확히 구별해서 쓸 줄 모른다. 이론상으로는 ‘There was a boy. The boy was…’라는 공식은 이해하고 있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했다. 어쩔 땐 둘 다 안 쓸 때도 있어서 미칠 노릇이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에겐 평생 알아가야 할 오묘함이었다. 방송국이 만드는 영상에서 문법을 틀린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알리사의 눈은 철저했지만 아주 드물게 오탈자가 영상에 나가기라도 하면 누리꾼들은 이를 놓칠세라 지적했고 어쩔 땐 유감없는 비웃음을 댓글로 전했다.

영작 능력의 부족함을 이상하게 상쇄하려는 실수도 자주 했다. 괜히 어려운 단어를 쓰는 것이었다. '책을 썼다'라는 문장은 그냥 'He wrote a book'이라고 하면 될 것을 'He authored a book'이라고 했다가 알리사에게 ‘authored’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따로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냥 유식해 보이느라 쓴 것뿐이었다. '모였다'라는 말도 'Gathered' 대신 'Congregated'라고 썼다가 똑같은 지적을 받았다. 뜻이 같거나 비슷하면 평범한 단어, 다 아는 단어를 쓰는 글쓰기 습관이 그때 몸에 배었다.

하지만 아이디어 발굴 능력과 편집 능력은 내가 제일 뛰어나다고 느꼈다. 한국과 일본에서 유난히 좋은 소재가 발견됐던 것은 팔이 안으로 굽듯 우리나라와 동양의 문화에 자꾸 관심이 가선지, 아니면 실제로 이 나라들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본은 확실히 기상천외한 소식들이 많은 것 같았다. 일본어를 조금 배운 적이 있어서 아주 기초적이나마 읽고 쓸 줄 아는 게 적잖은 도움이 됐다. 일본은 공예술이 발달한 곳이기도 해서 시사성, 다양성, 재미의 삼각형을 모두 갖춘 소재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일본에는 금이 가거나 이가 빠진 그릇을 예술품으로 승화시키는 '킨츠키'라는 기술이 있다는 영상은 SBS 청중들 취향에 딱 맞는 것이었다. 재활용이라는 환경보호의 의미도 있었다.

'후로시키'라는 보자기 예술도 좋은 소재였다. 일본과 우리나라에선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 보자기에 정성스레 싸서 준다는 풍습이 있다는 건 서양 대중들이 흥미로워하는 내용이었다. 일회용 포장지가 익숙한 요즘에 옛 전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훈훈한 콘텐츠였다. 유튜브에서 보자기 싸기에 관련된 영상을 찾던 중 문득 내가 직접 찍으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보자기라는 우리나라 것을 굳이 후로시키라는 일본말로 소개한 것은 일본에 대한 인지도가 더 크기 때문이기도 했고 '후로시키'로 찾았을 때 자료가 더 많은 이유도 있었다. 회는 영어로 ‘Sashimi’로 알려져 있고, 인삼은 영어로 ‘Ginseng’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과도 같았다.) 핸드폰 카메라와 삼각대를 설치해서 유튜브 영상을 따라 보자기로 물건을 예쁘게 싸는 법을 시연해 찍었다. 문제는 보자기로 쓰기에 적당한 천을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냈고 그날 올릴 영상으로 확정은 됐으니 어떻게든 만들어야 했다. 마침 사무실에 걸려있던 무지개 기가 보였다. LGBT 행사 때 썼던 것이었다. 그걸 반으로 접으니 대충 보자기 같은 모양새가 나왔다. 그걸로 영상을 만들었다. 영상은 큰 성적을 냈다. 동양의 문화를 소개한 점, 일회 용지가 아닌 보자기라는 그 자체로의 예술품으로 선물을 포장한다는 의미가 관객들에게 와닿았다. 댓글과 공유와 조회수가 평균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러나 모두가 좋은 말만 하는 건 아니었다. 무지개 기를 포장지로 쓴 게 성소수자들을 모욕하는 것 같다는 댓글이 있었다. 나는 오히려 성소수자의 상징을 가시화하는 것 같아 좋았는데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다는 건 놀라웠다. 그 댓글을 두고 열띤 설전이 오갔다. 대부분은 무지개 기가 보기 좋다는 의견이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무지개가 언제부터 성소수자들의 독차지가 됐냐며 또 다른 논점을 던졌다. 그렇게 댓글 토론이 일어나면 알고리즘의 힘을 얻어 콘텐츠는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바이러스 퍼지듯 바이럴 콘텐츠가 탄생하는 것이었다.

창작활동을 하다 보면 요건이 잘 갖춰지지 않았을 때 결과물이 오히려 다채로워지는 경험을 한다. 보자기가 없어 사무실에 있던 무지개 기를 어쩔 수 없이 쓴 것이 담론을 형성하는 촉매가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우연, 혼돈, 임기응변과 같은 요소가 중요했다.


설맞이 용선 젓기 대회
SBS에서도 네트볼 사랑은 계속됐다.

그러다 SBS 소셜 미디어 사상 가장 큰 인기를 얻은 영상이 만들어졌다.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고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좋은 아이디어는 단 몇 마디만으로 설명이 된다는 말이 있었다. 내가 회의에서 꺼낸 말은 딱 두 마디였다. "Cow brush".

북유럽 국가에선 소 농장에 소들이 몸을 긁을 수 있는 빗 같은 장치를 두는 걸 법으로 요구한다고 했다. 소들이 수시로 온몸을 비빌 수 있도록 농장 곳곳에 까끌까끌한 빗자루 같은 소재의 설비를 세우는 것이었다. 세차장에서나 볼법한 대형 원통 솔과 꼭 닮은 장치를 구비한 농장들도 있었다. 소가 근처에 가면 솔이 자동으로 돌아갔다. 그 기계를 쓰기 위해 줄을 서고 기다리는 소들, 한참 빗질을 하고 기분이 좋아 껑충거리는 소들을 보면 그저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스타그램에서 #cowbrush로 찾은 영상들과 솔 제조업체들의 유튜브 영상을 모아 소빗 영상을 만들었다.

영상의 인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재밌는 영상이 될 거라고 언뜻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거의 피칭을 안 할뻔했던 아이디어였다. 소빗 영상은 SBS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조회수가 많은 콘텐츠가 되었다.


내 영상에 달린 댓글을 읽는 것만큼 중독되는 일이 없었다. 잘 나가는 영상에는 읽어도 읽어도 자꾸 새로운 글이 달렸고 사람들의 기쁨과 그 기쁨을 가족과 친구를 태그 하며 공유하는 모습을 보는 게 큰 행복이었다. 더 좋은 아이디어를 찾고 싶었고 더 많은 영상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게 일중독의 증세인 것도 같았다. 즐겨찾기에 모아둔 웹사이트들을 하루라도 거르는 날이 있으면 아이디어를 놓치는 것 같아 불안했고, 사람들의 반응에 목말라 빨리 사무실에 나가 영상을 만들고 싶어졌다. 주말을 쉬고 나면 다시 일을 나가기가 기다려질 정도였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더 그랬다. 우리 팀은 공휴일에 쉬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는 휴일에 더 바빴기 때문이다. 텅 빈 회사를 나오는 게 나는 싫지 않았다.


아침에 아이디어 회의를 하면 우리는 뉴스 팀과 목록을 공유했다. SBS News 페이스북 페이지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의 소셜 미디어 팀도 따로 있었다. 그 소셜 팀장은 우리의 피칭 목록을 보고 가끔 아이디어를 채가는 일이 있었다. 뉴스 팀은 정치와 경제 같은 ‘진짜 뉴스'를 다뤘기 때문에 우리와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인기를 끌만한 피치가 있으면 자신들이 만들겠다고 우기는 일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Kill your darling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